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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세종대왕은 최고의 성군으로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인물이다. 세종시대 조선은 창업 초기 혼란기를 극복하고 전성기를 열었다. 여진족과 왜구의 침입을 모두 섬멸할만큼 강력한 국방력을 구축했고 민생은 안정됐다. 국가 시스템은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학문과 문화, 과학기술은 발전은 눈부셨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한글 창제는 최고의 업적 중 하나였다. 조선은 이후 성종 대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열어갈 수 있었다. 


이런 조선 시대 세종대의 영광은 세종대왕의 영민함과 애민정신, 강한 추진력 등이 큰 요인이었지만, 이런 그의 정책을 뒷받침했던 이들이 있어 가능했다. 그의 아버지 태종 이방원은 철혈 군주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왕권에 위협되는 세력을 철저히 숙청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공신세력과 외척 세력이 정치권력에서 멀어졌다. 이는 세종대왕인 훗날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요인 중 하나였다.


세종대왕은 강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인재를 고루 기용하고 집현전이라는 일종의 학문 연구소를 통해 수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이들은 세종대왕의 정치에 있어 가장 강력한 후원세력이었고 정치와 국가 시스템 확립, 학문 발전 및 민생과 관련된 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세종대왕이 더 위대했던 건 유학 중심의 사회에서 잡학이라 일컷어 지며 관심을 받지 못했던 과학기술 발전에도 상당한 노력을 했고 많은 성과물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 다양한 발명품과 천문연구 성과는 누구도 이루지 못한 일이었다. 


이런 성과의 중심에는 장영실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2016년 시작되는 대하드라에서 주인공으로 자리한 장영실은 노비에서 조선 과학 기술의 중심인물로 변신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아버지가 양반이었지만, 어머니가 기생이었던 탓에 관청에 소속된 노비의 삶을 살아야 했다. 반상의 차이가 뚜렷하고 사,농,공,상의 직업에 대한 귀천을 크게 따졌던 조선에서 장영실은 조선의 국가 시스템에서 지금으로 말하면 흙 수저보다 못한 최하층의 삶을 살아야 했다. 


장영실에서 세종대왕과의 만남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세조대왕은 노비 신분이었지만, 각종 기구를 발명하는 등 과학 분야에 재능을 보인 장영실을 과감히 발탁했고 그를 면천 시키는 결정을 했다. 인재기용에 있어 차별을 두지 않았던 세종대왕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장영실은 세종대왕 시기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 다양한 발명품 제작에 중추적 역할을 했고 관직은 더 높아졌다. 


이후 장영실은 세종대왕이 야심차게 추진한 천문과학 프로젝트에도 참여했고 그 시대에 만들어진 천문기구 제작에도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장영실은 금속활자 개발 등에도 역할을 하면서 조선의 과학 발전에 있어 핵심 인물로 자리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장영실은 최고의 엔지니어겸 과학자였고 이런 재능을 바탕으로 신분제의 높은 벽을 뛰어넘은 인물이었다. 


이렇게 세종대왕 시설 승승장구했던 장영실이었지만, 그의 말년은 순탄치 않았다.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조차 확실치 않을 정도로 자영실은 조선의 역사에서 순간 사라졌다. 장영실은 세종대왕의 어가가 파손되는 사고의 책임을 지고 파직당한 이후 더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됐다. 누구보다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고 상당한 업적을 쌓은 과학자였던 장영실임을 고려하면 허무함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혹자는 그가 당시 조선의 독자적인 천문연구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던 명나라에 의해 신변에 위협을 받고 있던 장영실을 보호하기 위한 세종대왕의 계책이 숨어있었다는 설도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노비출신으로 높은 벼슬을 하고 있는 그를 시기하는 양반 세력들의 계략이 작용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노비 출신으로 왕의 측근으로 자리한 그는 양반들에게 곱게 보일리 없었다. 


어찌되었 건 장영실은 뭔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지는 비운을 겪었다. 그의 업적에 대해서도 그가 여러 발명품을 주도적으로 만들었는지 대해 의문을 가지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당시 조선사회에서 노비에서 높은 벼슬까지 할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가 세종대왕 시절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그의 삶을 조명할 드라마 장영실 1회는 그의 출생 배경과 당 시대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었다. 앞으로 이야기는 장영실이 노비의 신분에서 과학자로서 기술자로서 신분을 뛰어넘는 성공 신화를 보여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최고의 과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 외에는 크게 알려진 것이 없었던 장영실의 삶이 앞으로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해진다. 


사진, 글 : 심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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