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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대륙은 넓은 땅과 풍부한 천연자원 등을 가진 가능성을 가진 곳이지만, 경제적 빈곤과 이에 따라 만성적 기아, 낙후된 생활 등의 부정적 이미지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상당수 아프리카 국가들은 세계 최빈국에 속해 있고 그 국민들은 큰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런 아프리카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각국의 정치 지도자들 중 상당수는 부정부패가 수반된 장기 독재의 길을 걷고 있고 정치 불안으로 인한 쿠데타와 내전이 끊이지 않는 곳이 아프리카다. 또한, 유럽의 식민 지배 시절 인위적으로 그어 놓은 각국의 국경선은 민족이나 문화 등을 고려하지 않았고 이는 종족 간 종교 간 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에 아프리카는 유럽의 제국주의 시대 각종 인적, 물적 착취의 대상이었고 식민 지배의 후유증을 계속 겪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아프리카에서 짐바브웨는 최근까지 초 인플레이션 국가로 뉴스의 중심에 섰다. 작은 물건 하나를 사도 엄청난 동 뭉치가 필요한 상황은 정상적인 경제 상황과는 큰 거리가 있었다. 이런 비정상의 일상화를 초래한 건 수십 년간 정권을 잡고 있었던 독재자 무가베 집권기의 한 단면이었다. 무가베 정권은 소수의 기득권이 권력과 국가의 부를 장악했고 잔혹한 철권통치를 했다. 그 과정에서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반대 세력에 대한 폭력과 학살이 자행됐다. 그러면서 집권세력을 초호화 생활을 즐겼다. 

하지만 무가베는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짐바브웨를 있게 한 독립 영웅이었고 국부였다. 그는 이러한 업적에도  권력을 사유화하고 종신 집권을 독재자로 완벽히 흑화했다. 그의 모습은 상당수 아프리카 국가에서 겪는 독립 영웅이 독재자로 변질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무가베 - 위키백과

 




짐바브웨 독립 영웅 무가베


무가베는 1924년 영국의 식민지가 된 짐바브웨의 이전 이름 로디지아에서 태어났다. 아프리카 남부 내륙 국가인 짐바브웨는 일찍부터 강력한 왕조가 존재했고 그 왕조는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 있는 도시를 아프리카 곳곳에 건설한 강성한 국가였다. 그때의 왕조를 뜻하는 그레이트 짐바브웨 왕국은 15세기까지 존재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쇠퇴기를 거쳐 제국주의 전성기 아프리카 전체가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시절, 멸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무가베가 태어난 시기는 짐바브웨가 영국의 식민자가 된 직후였다. 그는 서구식 교육을 받았고 1942년 식민지 국민으로서는 매우 안정적인 직업인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쉽지 않은 교육 기회에 엘리트로 인정받는 직업까지 무가베는 식민 지배를 받는 아프리카 국가에서 성공한 삶을 살았다. 그때까지 그는 식민 지배를 받는 나라와 민족의 상황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 지배 시대가 끝나고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 열기가 고조됐다. 아프리카 국가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나라들이 지배하던 아프리카 국가들이 하나 둘, 독립 국가가 됐다. 이는 짐바브웨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영국령 짐바브웨를 지배하던 백인 정권은 소수의 백인들의 짐바브웨 경제의 핵심인 농업 생산을 하는 농장의 대부분을 소유하는 등 국가의 부를 독점하고 있었고 흑인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유지했다. 인근 국가들이 하나 둘 독립하는 과정에서 짐바브웨는 소수의 백인들의 지배하는 로디지아로 존속했고 그 지도자 이언 스미스는 백인 우월주의를 바탕으로 백인들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집중했고 독재자의 면모를 보였다. 짐바브웨는 인종 분리 정책을 유지한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함께 소수의 백인이 다수의 흑인을 폭력적으로 지배하는 불평등의 국가였다. 

이런 불합리한 현실에 아프리카 지식인들이 저항했고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무가베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흑인 독립운동가 중 엘리트에 속한 인물이었고 얼마 안 가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됐다. 하지만 백인정권은 흑인들의 독립운동을 강하게 탄압했고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됐다. 무가베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가베는 감옥에서 장기간 복역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무가베는 독학으로 다양한 학위를 취득하는 학구열을 보였다. 교육자 다운 모습이었고 이는 그가 독립된 짐바브웨 지도자가 된 이후 교육에 큰 관심과 국가적인 투자를 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독립영웅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무가베 


1974년 출옥한 무가베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무장 투쟁에 나섰다. 그를 중심으로 무장독립투쟁 단체들이 통합됐고 백인 정권과 강력하게 맞섰다. 무장 독립투쟁 세력은 백인 정부군과 치열하게 교전했고 각종 테러 활동을 했다. 그 과정에서 민간인을 포함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백인 정부군은 생화학 무기를 무차별 사용하는 잔혹함을 보였다. 

하지만 짐바브웨 다수를 차지하는 흑인들의 독립 의지를 꺾는 건 무리가 있었다. 소수 백인정권에 대한 국제 여론도 악화됐다. 특히, 영국에서의 여론이 그들에게 등을 돌렸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우호 국가들의 지원도 줄었다. 결국, 짐바브웨 백인 정권은 영국이 중재하는 평화 협상에 나서야 했고 랭커스터 협정에 따라 자유 민주주의 선거에 기반한 정권 수립이 합의됐다. 사실상 다수 흑인들 중심의 짐바브웨 시작이었다. 

이후 독립운동 세력과 기존 백인 정권 세력들은 정치 세력화됐고 경쟁했다. 1979년 12월 총선거에서 무가베가 이끄는 정당이 압승하면서 무가베는 1980년 4월 짐바브웨의 첫 총리에 올랐다. 무가베가 독립운동가에서 짐바브웨의 역사를 여는 국부가 되는 순간이었다. 

짐바브웨의 지도자가 된 무가베는 백인 장관들을 내각에 기용하고 기존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등 백인들에 대한 유화정책을 유지하며 그들을 포용했고 통합의 정치를 했다. 이를 통해 국가적 신인도를 높일 수 있었다. 또한, 교육과 의료 인프라 확대를 통해 교육 기회 확충과 의료 서비스를 개선했다. 그 영향으로 짐바브웨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낮은 문맹률의 국가가 될 수 있었다. 

이처럼 독립 영웅에서 정치가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그였지만, 그는 권력의 달콤함에 취하고 말았다. 그는 점점 독재자의 길을 걸었다. 이완 관련해 우호관계에 있었던 북한 방문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설이 있다. 1980년 김일성 유일체제가 공고했던 북한을 방문한 무가베는 그 체제에 매료됐다. 

 

 

 




합리적 지도자에서 독재자로의 변신 


이후 무가베는 북한과 같은 개인 우상화와 함께 자신을 중심으로 한 정당의 1당 독재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정적들을 대거 숙청했고 개인의 친위부대를 양성에 권력 기반을 더 공고히 했다. 그 과정에서 북한은 대규모 군사 고문단을 파견해 무가베 정권을 도왔다. 그렇게 조직되고 훈련된 무가베의 친위부대는 한때 독립운동의 동지였던 야당 지도자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지역의 종족들을 학살하는데 동원됐다. 계속된 피의 숙청과 학살을 지속한 끝에 무가베는 야당과 반대 정치 세력을 무력화하고 1당 독재체제를 확립했다. 

이후 무가베는 대통령제로 개헌을 하고 1987년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본격적인 장기 집권의 시작이었다. 이후 무가베는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자가 됐지만, 거듭된 실정으로 짐바브웨를 나락으로 빠뜨렸다. 

무가베 정권을 그들의 중요한 정치 기반인 군부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려 했고 퇴역 군인들에 대한 지원을 지속적으로 강화했다. 하지만 그 정도가 과했고 결과적으로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됐다. 비옥한 토지로 인해 아프리카의 빵 공장이라 불릴 정도로 막대한 식량 생산을 했던 짐바브웨의 농업이 흉년을 거듭하면서 국가 경제를 더 어렵게 했다.

여기에 무리한 민영화 정책은 공공요금의 대폭 인상과 함께 가뜩이나 힘든 국민들의 삶을 더 어렵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인근 국가인 콩고 내전에 개입하면서 불필요한 군비가 지출되고 국가 재정은 파탄 상태로 빠져들었다. 결국, 무가베 정권은 구제 금융을 받아야 할 상황에 몰렸다. 구제금융을 받는다는 건 필연적으로 각 산업의 대대적 구조조정을 의미하는 일이고 이는 대량의 실업자 발생으로 이어지며 국민들의 삶을 더 악화시키고 말았다. 

1990년대 급 추락한 짐바브웨 경제 상황은 핵심 지지층인 퇴역 군인들에 대한 지원도 축소하게 했다. 당연히 큰 반발이 일어났고 그들이 반대세력이 된다면 무가베 정권의 장기 집권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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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무가베 정권은 백인 소유 토지에 대한 강제 몰수와 무상 분배 정책을 강행했다. 이는 무가베 집권 후 유지했던 사유재산 보호와 백인 포용 정책을 정면으로 뒤집는 일이었다. 무가베는 권력 유지를 위해 국가 운영의 중요한 원칙을 스스로 져버렸다. 이는 얼핏 식민지 시절부터 국가의 부를 독점했던 백인들에 대한 응징의 의미가 있었고 힘든 경제 상황에 신음하는 국민들에게 환영받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 목적인 정치적이었고 방법도 매우 폭력적이고 무계획했다. 

백인 토지주들은 당장 신변의 위험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상당수 백인 농장들이 강제 점거되고 일부 백인들이 폭력에 희생되기도 했다. 이에 대다수 백인들은 해외로 급히 탈출해야 했다. 흑백이 공존하는 짐바브웨의 역사는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러한 토지정책은 큰 부작용으로 이어졌다. 우선, 토지 분배에 있어 상당수 토지가 무가베의 측근들이 차지하면서 부의 재분배 효과가 반감됐다. 또한, 농업 기술 자체가 부재한 상황에서 토지의 활용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고 농업생산도 극히 부진했다.

이는 짐바브웨 경제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농업의 황폐화와 경제적 빈곤을 더 심화시켰다. 또한, 백인 농장주들에 고용되고 일하던 흑인 노동자들이 실업자가 되면서 빈민으로 전락했다. 무엇보다 국가의 불확실성이 심화되면서 국가 신인도로 추락하고 영국을 포함해 선진국의 지원과 해외 기업들의 투자가 급격히 감소했다. 

보통은 이런 정책적 실패를 개선하고 상황을 나아지게 하는 게 정부의 일이지만, 무가베 정권은 그들의 권력 유지에만 몰두했다. 이는 최악의 경제 정책으로 이어졌다. 무가베 정권은 부족한 국가 재정을 무한 양적 완화, 무한 화폐 찍어내기로 대신하려 했다. 통화량이 급격한 증가는 화폐 가치를 땅에 떨어뜨렸다. 이는 앞서 언급한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연결됐다.

 

 

 




무가베의 몰상식의 정치, 최빈국으로 전락한 짐바브웨


이런 즉흥적이고 몰상식한 경제정책은 짐바브웨를 최 빈국으로 전락하게 했다. 이는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그나마 잘 유지되던 의료 시스템을 붕괴시켰고 수많은 국민들이 감염병과 질병으로 사망하게 됐다. 그 사이 짐바브웨 국민들의 평균 수명은 세계 최저 수준이 됐다. 

나라를 파탄 지경에 이르게 한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 여론도 점점 커져갔다. 하지만 무가베 정권은 군부를 배경으로 한 철권통치로 반대 세력을 탄압하고 권력에 의한 폭력과 지속적인 감시, 통제로 권력을 유지하는 데만 급급했다. 또한, 국민들의 정권교체 열망이 매우 큰 상황에서도 공공연한 부정선거를 자행하며 무가베의 권력을 계속 이어갔다. 2008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 후보의 승리가 유력한 상황에서 폭력과 살인, 협박 등으로 야당 지지자들을 압박했고 견디다 못한 야당 후보는 선거를 보이콧했다. 

이렇게 권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짐바브웨를 전제 왕조국가로 만든 무가베는 2017년 12월 대통령직을 사임할 때까지 37년간 독재정치를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국민들은 상당수는 빈민으로 전락한 가운데도 그와 그의 영부인 측근 인사들은 상상을 초월한 초호화 생활을 하며 국내외적으로 큰 지탄을 받았다.

심지어 무가베는 그의 권력을 첫 번째 부인 사별 후 재혼한 두 번째 부인에게 이양하려는 비상식을 자행하려 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집권층 내부에서도 큰 반발을 불러왔고 이는 군부의 쿠데타로 연결됐다. 결국, 무가베의 무한한 집권욕은 자신의 핵심 지지층에 의해 저지됐고 그는 사임 형식을 거쳤지만, 권좌에서 축출됐다. 

이후 무가베는 집권 기간의 각종 죄악에 대한 단죄를 받아야 마땅했지만, 군부가 중심이 된 새 정권은 무가베의 국부로서의 권위를 인정해 주고 그의 가족까지 편안한 노후를 보장했다. 군부의 쿠데타가 국민들의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을 담은 일이 아닌 기득권 층 내부의 권력 투쟁의 결과였고 함께 부정부패를 저지른 세력 간 야합이 이루어진 결과였다. 

결국, 무가베는 천수를 다 누렸고 2019년 9월 싱가포르의 병원에서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실정과 권력욕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국민들에게 사죄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짐바브웨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장기 집권이 남긴 건 최빈국 짐바브웨의 참혹한 현실이다. 이는 정상적인 정치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상당수 아프리카 국가들의 겪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단죄받지 못한 폭정, 아프리카 빈곤 탈출을 위해 필요한 정치 민주화


아프리카는 서양의 대항해 시대 이후 유럽을 서구의 침략을 받았고 긴 세월 수탈을 당했다. 근대에 와서도 그런 상황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어렵게 독립을 이뤘지만, 식민 지배의 후유증은 그들의 성장 동력을 상실하게 했다. 또한,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조차 만들 수 없게 됐다.

식민 지배 과정에서 불합리하게 그어진 국경선은 계속되는 분쟁과 전쟁으로 이어지고 있고 각 부족 간 갈등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정치 불안과 집권 세력들의 부정부패는 아프리카 발전의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 정치세력들은 강대국들과 연결되어 이권을 주고받으며 그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가 지났어도 아프리카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는 강대국 이기주의의 한 단면이다. 

무엇보다 무능하면서도 권력에만 집착하는 독재자의 권력 사유화와 비 상식적인 지배체제는 아프리카 국가들을 병들게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다. 무가베는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는 권력을 주면 된다는 옛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즉, 아프리카 국가들의 경제적 빈곤 탈출을 위해서는 정치의 민주화가 함께 이루어져 한다. 이는 어쩌면 아프리카만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건강한 민주주의 사회는 우리 삶을 지키는 버팀목이라 할 수 있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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