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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큰 자부심을 가지게 하는 시기는 삼국시대 그중 고구려의 역사다. 지금은 우리 영토가 아닌 만주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여러 북방 민족과의 대결과 전쟁을 통해 나라의 영역을 넓혔고 만주 일대를 장악한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했다.

고구려는 이에 그치지 않고 수나라와 당나라까지 강력한 중국 통일 왕조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자주성을 잃지 않았고 굴복하지 않았다. 이에 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지속적으로 받았지만, 이를 이겨내고 강국의 입지를 단단히 했다.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는 자주적이 외교와 활발한 대외 교류를 했고 주변 북방 민족들을 아우르는 제국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구려가 668년 나. 당 연합군에 멸망한 이후 만주 지역은 우리 역사의 무대에서 멀어졌다. 고구려 계승을 천명하고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발해가 698년 건국되면서 통일 신라와 남. 북국 시대를 열며 만주에서의 우리 민족 역사를 이어갔지만, 그 발해가 926년 멸망하면서 만주 일대는 북방 민족과 중국 통일 왕조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후삼국의 혼란 통일한 고려의 건국 


이렇게 고구려의 영광이 먼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갈 무렵, 새로운 통일 국가가 들어섰다. 통일 신라 후기 극심한 혼란기와 후삼국 시대의 최후 승자였던 고려가 건국됐기 때문이었다. 고려는 지금의 개성 일대 호족 가문의 출신의 왕건이 918년 후 고구려, 태봉의 왕이었던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국호로 정하며 그 역사를 시작했고 936년 후백제를 멸망시키며 우리 역사상 두 번째 통일 국가로서 그 역사를 시작했다. 

고려는 국호에서도 드러나듯 고구려 계승을 분명히 했다. 이에 대한 반론이 나오기도 하지만, 고려라는 국호에서만 봐도 고려의 정체성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고려는 개국 초기 대외 정책에 있어 북방 민족에 대해 대결 정책을 분명히 했고 태조 왕건 이후 북진 정책을 국시로 삼았다. 특히, 발해를 멸망시키고 만주 일대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거란에 대해서는 매우 적대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거란은 916년 요나라를 건국한 이후 만주 일대를 장악한 데 이어 중국의 통일 왕조 송나라를 압박하며 그 영역을 계속 넓혀가고 있었다. 송나라의 문치주의를 강력히 표방했고 역대 중국 왕조 중 가장 약한 군사력으로 북방 민족의 침입에 매우 취약했다. 요나라의 압박에 송나라는 막대한 세폐를 지급하며 이를 무마시키는 처지였다. 하지만, 요나라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송나라 본토 침략을 본격화했다. 

그런 요나라에 고려는 중요한 걸림돌이었다. 고려는 전통적으로 그들과 적대관계였다. 송나라와의 전쟁시 고려가 배후에서 그들은 공격한다면 전쟁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없었다. 또한, 동아시아 일대 나라와 민족들이 자신들에게 굴복하는 상황에서 고려는 자주성을 잃지 않았다. 실제 고려는 과거 고구려가 그러했듯 독자 연호를 사용하는 등 황제의 나라를 표방했다. 이런 고려를 거란은 좌시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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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위협과 침략, 이에 맞서야 하는 고려의 국정 혼란 


거란은 전쟁을 통해 고려를 굴복시키려 했다. 이른 993년부터 1019년까지 이어진 고려, 거란 전쟁으로 이어졌다. 거란은 993년 고려 성종 12년, 대규모 부대가 고려 국경을 넘어 침략했다. 1차 고려, 거란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거란은 자신들의 고구려의 옛 영토에서 건국했고 고구려를 계승했으므로 고려 건국 후 개척한 서경 북방의 영토를 내놓고 신하의 나라가 되기를 요구했다. 사실상의 항복을 요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고려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하고 요나라에 대한 적대 정책 철회가 있었다. 그들의 침략은 전쟁보다는 위세를 과시하는 측면이 강했다. 이에 고려는 요나라의 총사령관 소손녕과의 담판을 위해 서희를 파견해 맞섰다. 서희는 요나라의 주장에 적극 반박했다. 그러면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분명히 했고 오히려 거란이 차지한 만주 일대 영역이 고려의 영역임을 주장했다. 한편으로 고려가 거란과 고려 사이에 살고 있는 여진족들로 인해 요나라와 고류를 하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북방 영토 개척을 정당화했다. 

결국, 고려와 요나라는 고려가 송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하고 요나라에 사대를 하는 조건으로 강화협상을 체결했다. 대신 고려는 지금의 평양인 서경 이북의 땅, 강동 6주를 개척해 그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명분을 내주고 실리는 취한 고려의 외교적 승리였다. 이에 서희는 우리나라 외교사의 중요한 인물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이렇게 전쟁을 피했지만, 고려는 요나라를 진심으로 사대할 마음이 없었다. 또한, 송나라와의 교류도 이어갔다. 요나라는 역시 호시탐탐 고려 채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사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팽팽한 긴장감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의 국정 혼란이 커졌다. 1차 고려, 거란 전쟁 당시 왕위에 있었던 성종 이후 왕위에 오른 목종은 실권 없는 왕이었다. 그의 모친인 천추태후가 섭정으로 최고 권력자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추태후는 선왕인 성종의 여동생으로 여성이었지만, 매우 뛰어난 정치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정치에 적극 참여해 조정에서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로는 성인인 18살 나이에 그의 아들 목종이 왕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섭정이 될 수 있었던 건 그 세력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문제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천추태후가 그 권력을 사유화하고 남용했다는 점이었다. 여기에 천추태후는 그의 내연 관계였던 김치양과 지속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와 그의 측근 세력들을 중용해 정치 시스템을 왜곡했고 심지어 김치양과 사이에 낳은 아들을 아들 목종에 이어 차기 국왕으로 삼으려 했다. 이는 고려 왕조의 기반을 흔드는 일이었다. 

이런 천추태후의 계획에 중요한 방해물은 왕위 계승 서열에서 가장 앞선 대량원군 왕순의 존재였다. 왕순은 태조 왕건의 아들이었던 왕욱과 고려 다섯 번째 왕인 경종의 네 번째 왕비 헌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 삼촌과 조카 사이에의 자식이었다. 지금 기준으로서는 말아 안되는 일이었지만, 태조 왕건 이후 고려 왕실에서는 광범위하게 근친혼이 이어졌다.

 

 

전성기 요나라(분홍색), 위키백과

 




고려, 거란 전쟁의 중심인물 현종의 즉위


이를 통해 왕실의 혈통의 보존하고 그 세력을 유지하려 했다. 이에 왕실 사이 혼인이 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왕욱과 헌정왕후의 관계는 매우 비정상적이었다. 그런 복잡한 관계였지만, 경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목종의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왕순은 차기 왕위 계승자 1순위였다. 목종은 국정에 큰 관심이 없었고 동성애 성향까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목종 이후 차기 권력과 관련한 권력 투쟁은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해 목종은 모친인 천추태후의 섭정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왕위 계승에 있어서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했고 김치양과 천추태후 사이 이복동생에게 왕위를 넘기는 것에 크게 반발했다. 그로서는 고려 왕실의 단절만큼은 참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려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던 천추태후, 김치양의 세력과의 극한 대립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목종은 거란과 맞서고 있었던 북방의 군을 이용해 반대파를 견제하려 했다. 그 중심에는 강조라는 장군이 있었다. 강조는 목종의 뜻을 받드는 걸 넘어 군대를 동원해 정변을 일으켜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파는 숙청한 데 이어 목종을 폐위시켰다. 1009년의 일이었다. 이후 강조는 목종을 살해하고 왕순을 새롭게 왕으로 옹립했다. 그가 고려, 거란 전쟁의 중심에 있었던 왕인 현종이다. 

현종은 어린 시절부터 치열한 권력 암투 속에서 목숨을 위협받았고 강제로 승려가 되기도 했다. 승려가 된 이후에도 현종은 지속적인 암살 위기를 넘겨야 했다. 죽음의 위기를 수없이 넘긴 현종은 17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성장기 동안 궁에 있지 않았고 중앙 정치와 거리가 있었다. 당연히 그의 우호 세력이 없었다. 국정은 정변을 통해 그를 왕위에 올린 강조를 포함한 군인들이 가지고 있었다. 현종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불안했다. 

이런 현종에게 얼마 안 가 요나라의 대규모 침입이라는 큰 과제가 던져졌다. 요나라는 혼란스러운 고려 정치 상황을 틈타 전쟁을 단행했다. 요나라의 왕 성종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 1010년 2차 고려, 거란 전쟁의 시작이었다. 요나라의 침공 이유는 정변을 일으킨 강조를 징벌한다는 것이었지만, 고려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고려를 완전히 정복하려는 게 큰 이유였다.

고려는 강조와 양규 등을 중심으로 북방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맞섰지만, 강조의 주력 부대가 요나라 군에 패하고 강조가 잡혀 처형되면서 전열이 크게 무너졌다. 이에 현종은 나주까지 몽진을 가야 했다. 그 과정에서 현종은 지방 호족세력들의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 했고 수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요나라는 북방 방어선을 돌파한 이후 고려 수도 개경까지 점령했지만, 고려는 항복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전쟁 수행에 어려움이 가중됐다. 보급이 원활하지 않았고 빠른 진격을 위해 지나쳤던 국경 지역 고려군의 저항이 가면 갈수록 강해졌다. 요나라는 서둘러 고려 왕이 직접 친조를 한다는 내용의 강화협상을 체결했고 철군을 단행했다. 이는 전쟁을 진행하기 어려운 요나라 사정과 왕이 나주까지 피신한 상황에서 국정이 마비되고 피해가 커지는 상황을 막으려는 고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치열했던 거란과의 전쟁 그리고 최후 승자가 된 고려, 강감찬 


요나라 군은 철군 도중 양규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의 거센 반격에 직면했고 큰 피해를 입고 돌아가야 했다. 고려로서는 요나라의 요구를 수용한 강화협상을 했지만, 요나라에는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2차 고려, 거란 전쟁 이후 현종은 흔들리는 왕권을 다시 새우고 무너진 국가 운영 시스템을 새롭게 했다. 한편으로 오랜 전쟁으로 비해해진 군부 세력을 견제하고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이를 통해 고려는 문치주의를 더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강감찬이 현종의 최 측근으로 권력의 중심에 자리했다.

강감찬은 983년 35살의 다소 늦은 나이에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된 문인이었다. 그는 조정에서 크게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천추태후가 실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매관매직 성행했고 그 상황에서 강감찬은 권력 지향적인 인사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현종 즉위 후 고위직에 올랐다. 현종으로서는 기존 정치세력에 맞설 새로운 우호세력이 필요했고 강감찬은 이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강감찬은 2차 고려, 거란 전쟁 당시 국경 방어선이 돌파당하고 요나라 군이 개경을 함락하는 상황에서 항복론을 일축하고 현종의 몽진을 관철시키는 항전을 지속하도록 했다. 이때부터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그는 요나라와의 강화협상을 이끌며 전쟁을 종식토록 했다. 이후 전후 복구와 요나라의 재침에 대비한 군사력 강화를 주도했다. 

그리고 70살이 넘은 나이에 강감찬은 고려, 거란 전쟁의 마지막 대결이었던 1019년 3차 고려, 거란 전쟁에서 고려의 총사령관으로 요나라의 대군을 섬멸하는 귀주대첩을 대승으로 이끌었다. 강감찬은 이후에도 노령의 나이에도 고려 국정을 주도했고 현종이 세상을 떠난 1031년 8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강감찬은 그 업적도 대단했지만, 고려가 문벌 귀족 사회로 가는 데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이렇게 현종과 강감찬의 만남은 고려가 거란, 요나라의 전쟁을 이겨내고 그 자주성을 지켜내는 데 있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3차 고려, 거란 전쟁 후 양국은 우호적인 국교를 수립했다. 형식으로 고려가 거란에 사대를 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고려는 송나라의 교류를 지속할 수 있었고 강동 6주를 포함해 북방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했다. 천리 장성을 축조하는 등 방어선을 더 공고히 했다.

고려의 존재는 요나라가 더는 송나라 침략을 지속할 수 없도록 했다. 고려, 송, 요가 3각 구도를 형성하고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동북아시아 질서를 만들도록 했다. 고려는 이 시기 동북아시아 질서의 한 축이었다. 이는 고려, 거란 전쟁이 단순히 북방 민족의 침략을 막아낸 전쟁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게 하는 결과였다.

이처럼 고려, 거란 전쟁은 그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우리 민족이 그 정체성을 지켜내고 다른 나라와 대등한 관계를 형성했던 거의 마지막 시대가 그때였기 때문이다. 이런 국제 정세는 병자호란 당시 만주 지역에서 건국한 신흥 강국 후금과 쇠락해가는 중국 통일 왕조 명나라 사이에 낀 조선의 상황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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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거란 전쟁을 다룬 새로운 드라마 


당시 조선은 복잡한 국제 정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전쟁에도 패하면서 굴욕적인 항복을 해야 했다. 물론, 고려와 조선의 상황은 다르지만, 고려는 뛰어난 외교 역량과 함께 군사적 대비를 함께 하면서 나라를 지키고 평화적인 동북아 질서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일본 등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속에 있는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큰 교훈이 될 수 있다.

평화는 결국 누군가에 의존해 지킬 수 없고 치밀한 전략과 우리를 지킬 수 있는 힘이 뒷받침돼야 한다. 거란과의 전쟁에서 고려는 이를 그대로 실천했다. 

KBS에서 새롭게 시작한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은 20년 넘게 이어진 전쟁사를 정사를 기반으로 재현하고 있다. 1, 2회에서는 2차 고려, 거란 전쟁을 앞두고 커지는 전쟁의 위협 속에서 앞서 언급한 현종 즉위까지 복잡한 고려 정치 상황을 보여줬다.

그 속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점점 강한 권력의지를 보이기 시작한 현종과 목종과 천추태후, 김치양의 얽히고설킨 권력 투쟁, 강조의 정변, 백성에 대한 애정과 나라에 대한 충심으로 가득한 충직한 관료가 등장한 강감찬의 모습까지 역사적 인물들의 성격과 역사적 배경이 함께 했다. 

앞으로 드라마는 현종의 즉위와 바로 이어지는 거란과의 전쟁, 고려의 수난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 이미 스포이긴 하지만, 1, 2회에서 드라마는 빠른 전개와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를 더해 흥미를 더했다. 앞으로 드라마가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극적으로 보여주며 역사와 재미를 조화시킬지 궁금하다. 


사진 : KBS,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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