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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드라마 등을 통해 재조명되고 있는 고려의 역사, 고려 거란 전쟁에서 여러 인물들이 새롭게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있다. 과거 고려 거란 전쟁은 3차 고려 거란 전쟁의 마지막 전투, 귀주대첩으로 대표됐고 그 승리를 이끌었던 강감찬이 중심인물이었다. 흔히, 고려와 거란의 역사는 귀주대첩 강감찬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고려 거란 전쟁 드라마를 통해 2차 고려 거란 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양규라는 위대한 장군을 알 수 있었고 위기의 고려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하공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명, 고려사에서는 위대한 군주로 칭송받았던 현종에 대해서도 다시 살필 수도 있었다. 

현종은 고려 왕조의 치열한 권력투쟁 과정에서 어린 시절부터 수차례 목숨을 잃을 위기를 넘겨야 했다. 그의 즉위 역시 강조의 정변으로 인해 옹립된 형태였다. 성장과 왕위에 오르기까지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집권 이후에도 실권자가 된 강조 정권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기 힘들었다. 얼마 안 가 거란의 대규모 침공을 받게 되면서 수도 개경에서 나주까지 몽진을 떠나기도 했다. 왕위에 오른 직후 가뜩이나 왕권이 미약했던 그로서는 또 다른 시련이었다. 몽진 과정에서 현종은 수차례 살해 위협을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2차 고려 거란 전쟁 이후 현종은 왕권을 다시 확립하고 역대 왕들에서부터 시작한 지방행정 체제 개편을 완성해 중앙집권 시스템을 완성했다. 이를 통해 고려는 호족들의 지방에서 자치권을 행사하는 봉건적 왕조체제에서 벗어나 진정한 군주제로 들어설 수 있었다.

 

 

 




고려 사회의 모순, 현종의 실책이 원인이 김훈. 최질의 난


또한, 현종은 근친혼이 보편적이었던 고려 왕실에서 신라계 호족 출신인 공주 절도사 김은부의 딸들을 왕비로 맞이해 다수의 후사를 얻으면서 근친혼의 고리를 끊었다. 또한, 그의 자손들이 이후 고려 왕실의 왕이 되면서 현종은 왕조의 기틀을 완벽하게 다진 군주이기도 했다. 어쩌면 현종 이후 고려는 진정한 왕조 국가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중요한 업적을 남긴 현종이지만, 그에게도 실책이 없지는 않았다. 현종은 고려 초기부터 문제가 됐던 문신과 무신의 차별적 구조를 타파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문신 우대를 더 본격화하면서 문신과 무신의 갈등이 심화되고 말았다. 이런 차별과 갈등은 현종 집권기 무신의 난으로 연결됐다. 

흔히 무신의 난은 고려 의종이 왕위에 있었던 이 무신의 난은 1170년 정중부, 이의방, 이고, 이의민 등이 일으킨 정변으로 알고 있지만, 현종 집권기였던 1014년에도 일어났다. 그 중심에는 군 최고위 직인 상장군에 있었던 김훈과 최질이 있었다. 그전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옹립한 강조의 정변이 있었지만, 강조는 서북면 도순검사가 되기 전 중앙 정부에서 중추원사 등을 역임했다. 무신으로 고위직에 올랐지만, 문신의 관직도 겸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훈과 최질은 2차 고려 거란 전쟁에서 장렬히 전사한 양규에 버금가는 활약을 했다. 김훈은 총사령관 강조가 이끄는 고려 주력 부대에 궤멸된 통주 전투 이후 군사를 수습해 인근 지역에서 거란군에 맞서 그들의 진격을 막는 승전을 이끌었다. 최질은 통주 전투 이후 거란에 항복을 하려 했던 통주성을 항전을 이끌고 지켜내는 데 앞장선 장군이었다. 이런 공으로 이들은 2차 고려 거란 전쟁 이후 군 최고위직에 올랐다.

하지만 이들 역시 문신과 무신의 구조적 차별을 벗어나지 못했다. 고려는 무신들이 재상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종 2품 이상의 품계를 주지 않았다. 군 최고위 직이라 해도 정 3품이 한계였다. 이에 전쟁 시 고위직 문관들이 군을 지휘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도 문관이었고 2차 고려 거란 전쟁의 영웅 양규 역시 문관 출신이었다. 이는 무신들에게는 큰 불만일 수 있었다.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하는 이들이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있었다. 고려 시대에는 조선과 달리 과거에 무신들을 위한 무과 제도가 없었다. 무신들의 등용은 대대로 무신이었던 가문에서의 세습과 특채 형식의 등용이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학문적 소양보다는 무력과 무예가 중요한 평가 기준이었다. 이에 고려 무신들은 지식수준이나 국가 경영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무신들이 국정에 참여하기 힘든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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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개월간 이어진 무신 정권


이런 불만을 고려 거란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점점 누적됐다. 고려는 군사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해야 했고 사실상 전시 체제를 유지했다. 이 과정에서 무신들의 역할 비중이 컸지만, 그들은 의사결정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중앙 정부의 최고위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문신의 직책도 겸할 수 있었야 했지만, 무신들에게는 기회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신들의 불만을 더 폭발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가 재정이 점점 쪼들리는 상황은 상황은 관리들에게 지급해야 하는 전시과 체제도 흔들리게 했다. 전시과는 관리들에게 나눠주던 토지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지인 전지와 뗄감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나무를 얻을 수 있는 시지로 구분됐다. 그 두 개를 합쳐 전시과로 통칭했다. 

이 토지는 관리들의 직급에 따라 분배됐고 관리들을 그 토지에 대한 수조권, 일종의 세금 징수권을 가질 수 있었다. 일부 토지는 관리직에서 퇴직한 이후에도 수조권을 유지하고 세습도 가능했다. 이렇게 사유지화된 토지는 영업전으로 불리기도 했다. 

문제는 고려 거란 전쟁 기간 관리들에게 분배할 토지가 부족해지면서 중앙 정부에서 무신들의 영업전 일부를 문신들의 전시과로 전용하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중앙 정부의 운영을 문신들이 주도하는 상황에서 이는 문신들의 무신들에게 차별적 사고가 함께 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는 분명 불합리한 일이었고 당연히 무신들의 불만이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현종은 이런 조치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역시 문신과 무신의 차별적 구조를 모를 리 없었지만, 문신들이 주도하는 정국에서 문신들의 의견을 먼저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강조의 정변으로 왕위에 올랐고 강조 정권에서 숨죽여 살기도 했다. 또한, 2차 고려 거란 전쟁 당시 몽진길에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현종은 항상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전시 상황이 길어지면서 커지는 군부 세력에 대해 현종은 우려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고 문신들에게 보다 기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는 그의 집권기 중요한 실책이었다. 누적된 불만은 1014년, 김훈과 최질 두 장군이 주도하는 무신의 난으로 폭발했다. 두 장군이 주도하는 군부는 일부 문신 관리들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에 현종은 무신들의 영업전을 문신들의 전시과로 전용하는 일을 주도한 관리들을 파직하고 귀양보내는데 동의했다. 또한, 군부의 주장대로 무신들의 문신 관리 등용도 허락했다. 

 

 

 




무신의 난 진압으로 왕권 강화의 계기 마련한 현종


이후 군부는 중앙 정부의 관제를 바꾸고 중요 요직을 장악했다. 사실상 무신정권의 수립이었다. 현종으로서는 강조에 이에 또다시 실권을 잃고 왕위가 흔들리는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 무신정권은 이후 무신의 난처럼 왕을 폐위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않았다. 대신 무신정권은 민심을 수습할 정책을 시행하고 무신들의 정치 참여와 전시과 체제 개편들을 단행했다. 하지만 국정 운영의 경험이나 자질이 부족했던 무신정권은 고려의 국정을 혼란스럽게 했다. 또한, 그들에 대한 반발은 또 다른 난이 발생할 위험성도 상존하게 했다. 

이는 거란에게는 고려 침공의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거란은 고려 조정의 혼란을 틈타 국지적인 침공을 단행했고 1015년에는 고려와의 국경을 넘어 지금의 의주인 보주에 성을 축조하고 일종의 전진기지를 만들기도 했다. 고려로서는 그들의 영토에 거란의 전진기지가 건설되는 건 큰 위기 상황이었다. 또한, 거란의 대규모 침략에 대한 우려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현종은 기지를 발휘했다. 현종은 서경 지역에서 큰 신망을 얻고 있었던, 훗날 왕가도로 개명하며 고려 조정의 중요한 외척이자 실제가 되는 인물인 이자림과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으며 계책을 만들었다. 현종은 이자림을 서경 지역을 관장하는 관리로 임명한데 이어 서경을 포함한 거란 국경지역의 방비를 점검하는 명분으로 서경으로 행차했다. 

당시는 거란의 지속적으로 고려를 침공하는 상황이었고 왕의 국경지역 시찰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행차에 현종은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던 군부 인사들을 대거 동반했다. 1015년 3월, 현종은 함께 서경에 온 관리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그 연회가 무르익어 갈 무렵, 이자림의 서경군이 연회장으로 들이닥쳤고 김훈, 최질을 포함한 군 수뇌부를 모두 체포했다. 수개월간 지속됐던 무신 정권이 붕괴되는 순간이었다. 

 

 

 



현종의 현명했던 반란 진압과 사후 처리 


이후 현종은 김훈과 최질 등 무신의 난을 주도한 19명의 인사들을 처형했다. 하지만 이후 반란의 처리 과정은 여느 군주들과 달랐다. 현종은 무신의 난 이후 왜곡됐던 중앙 정부의 시스템을 바로잡는 한편, 반란을 주도한 인사들에게 적용되는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았다. 처형된 인사들의 가족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대신 해당 집안의 향후 조정으로의 출사길을 막는 선에서 처리를 마무리했다. 

또한, 현종은 전쟁에서 전사한 전몰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처우를 대폭 개선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군인들에 대해서는 대대적은 포상을 단행했다. 이는 누적된 무신들의 불만을 해소시키는 한편, 또 다른 반란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일종의 유화책이었다. 여전히 거란의 위협이 지속되고 있고 큰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군의 동요를 막고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현종은 반란 진압 후 항상 발생하는 대규모 옥사와 숙청을 최소화하고 외부의 적에 맞서 국가적 화합을 위한 조치를 했다. 이는 그의 성군으로서의 면모를 다시 한번 보여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문신들이 군 최고위직에서 군을 통솔하는 시스템은 그대로 유지하며 군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는 유지했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을 통해 현종은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더 확실히 가질 수 있었다. 무신들을 불만을 일정 해소하고 문신들의 그에 대한 충성심을 더할 수 있었다. 김훈과 최질의 난은 현종에게는 큰 위기였지만, 결과적으로 왕권을 더 강하게 하는 전화위복의 결과로 이어졌다. 이는 3차 고려 거란 전쟁의 대승과 고려 거란 전쟁의 승전에 있어 중요한 바탕이 됐다. 

 




현종 시대의 교훈 잊은 고려가 맞이한 무인 시대


하지만 고려는 현종 시대 김훈, 최질의 난에서 얻은 교훈을 잊고 말았다. 이후 문신들의 지배체제가 더 강하게 확립하면서 무신과의 차별적 구조가 다시 고착화됐다. 고려 거란 전쟁 이후 긴 평화시기 무신들의 역할이 축소하면서 차별 구조는 더 강해졌다. 이와 관련해 무신들에 대한 처우 개선 등 정책적 배려도 없었다. 이에 무신들의 무신과 고려 조정에 대한 불신과 불만은 다시 누적됐다.

이는 고려 의종 집권기 무신의 난으로 연결됐다. 고려 의종 시기 무신의 난은 고려의 역사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무신의 난은 고려의 국정 운영 시스템을 붕괴시키고 무신들 사이의 권력투쟁과 장기 집권이 지속하는 100여 년의 무신정권 시대로 이어졌다. 여기에 몽골의 침략과 장기간의 전쟁이 더해지면서 고려는 국가 체제가 무너지고 권문세족이라는 특정 집단이 나라를 지배하는 상황이 됐다. 이는 나라의 운명을 점점 멸망으로 이끌고 같다. 

현종은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고 문제를 해결했다. 구조적 문제를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지만, 갈등의 발생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화합을 이끌었다. 이것만으로도 현종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만하다. 다만, 고려 거란 전쟁의 영웅이었던 김훈과 최질 두 장군이 역적으로 역사가 기록되면서 그들의 활약이 역사의 한 귀퉁이로 밀려난 부분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들의 죄는 크지만, 김훈과 최질은 고려 거란 전쟁 승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건 분명하다. 그들의 공적에 대해서도 함께 조명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아울러 이들이 역적이 된 당시 고려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서도 보다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사진 : 고려 거란 전쟁 드라마 / 위키백과,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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