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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이었던 12.12 군사반란을 소재로 한 영화 서울의 봄과 이순신 장군을 주제로 시리즈 영화의 마지막 편 노량에 이어 또 하나의 한국 영화가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통상적으로 마니아들의 영화라고 알고 있는 악령이나 악마 그리고 초자연적이거나 신비로운 사건을 소재로 한 오컬트 장르 영화인 파묘가 그 작품이다. 

파묘는 이미 천만 관객을 훌쩍 넘어서고 우리나라 영화 흥행 역사상 상위권에 자리하는 영화 서울의 봄을 능가하는 관객 동원 속도로 주목받고 있다. 이 영화는 오컬트 영화의 성격에 더해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등 항일 영화적 성격을 보이며 대중들의 관심을 받았다. 여기에 이 영화의 항일 영화적 성격에 더해 모 영화감독과 특정 정치 세력의 커뮤니티 등에서 좌파 선동 영화라는 강한 비판을 하면서 오히려 흥행에 가속도가 더해진 모습도 보이고 있다. 

이 영화는 파묘라는 작품명 부터 스산한 느낌이지만, 오랜 세월 민간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풍수지리에 오컬트 장르 다운 귀신의 이야기 속에 일제 강점기 역사가 함께 하고 있다. 또한, 이전 영화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일본 귀신까지 등장하면서 차별성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이에 더해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이 더해지면서 강한 흡입력을 보이고 있다.

그중에서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언급되는 부분은 등장인물의 이름 등에서 나타난 일제 강점기 항일 독립운동과의 연계성이다. 이 부분은 영화를 본 이들이나 영화 관련 자료를 찾는 이들에 의해 SNS와 관련 커뮤니티를 통해 공유되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영화 파묘 인물과 독립운동가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인 실제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고 영화에 등장하는 사찰이나, 차량의 변호에도 관련한 역사가 함께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속에서 사람들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운동가에 대해서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고 관련한 자료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중 큰 어른으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김상덕은 일제 강점기 독립군과 임시정부에서 요직을 역임했다. 김상덕은 광복 후 친일파들에 대한 법적 처벌을 위해 만들어졌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줄여서 반민특위의 위원장으로 친일파 처단에 앞장섰다.

반민특위는 1948년 대한민국 제헌국회에서 결의하여 그해 10월 결성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반민특위는 다음 해 1월부터 특별조사위원회와 특별검찰과 특별재판소 등을 설치하며 실질적인 검거와 조사 재판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반민특위는 광복 후 미 군정 실시로 바로 하지 못한 친일파 척결을 통한 민족정기 회복을 하려 했다. 이는 일제강점기 큰 고통을 받았던 국민들의 여망이기도 했다. 반민특위는 자체 조사와 제보 등을 접수해 수천여 명의 대상자를 선별했고 혐의가 큰 이들을 수사하고 체포했다. 그중에는 대표적인 친일 자본가였던 박흥식과 일제의 전쟁과 관련해 선전전에 적극 협조한 최남선과 이광수 등 문화 예술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반민특위의 활동은 이에 미온적이었던 이승만 정부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광복 후 3년 기간 한국을 통치했다 미 군정은 친일파 척결과 관련한 민족적 열망과 달리 통치의 효율성을 위해 일제 강점기 통치 구조를 유지했고 그 안에서 일하던 친일파 관리들을 그대로 기용했다. 특히, 일제의 앞잡이로 가장 악랄하게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민족을 억압했던 일제 경찰 상당수도 광복 후 경찰에서 요직을 차지했다. 

친일 경찰들이 주도권을 잡은 경찰 조직은 반민특위 활동에 가장 강하게 반발했다. 특히, 고문 기술자이자 가장 악독한 친일 경찰의 대명사인 노덕술 등이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자 경찰력을 동원해 반민특위 사무실을 기습공격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이승만은 이런 경찰을 지지했다. 

 

 

반민특위 위원 임명장




친일파 청산의 소중한 기회였던 반민특위 위원장이었던 김상덕 


결국,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권의 지속적인 방해로 점점 그 힘을 잃었고 1949년 10월 해체되고 말았다. 김상덕은 이후 정치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6.25 한국 전쟁 발발 후 납북되어 북한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런 전력은 그의 독립운동과 관련한 업적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가 됐다. 김상덕은 민주화가 이루어진 1990년 정부의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을 수 있었다. 

이런 김상덕을 중심인물로 한다는 건 그가 생전에 못다 이룬 친일 청산을 영호 속에서나마 이루게 하려는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실제 파묘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애초 금전을 목적으로 모였고 일정 목적을 달성했지만, 그들이 했던 일과 관련해 역사적 의미를 알게 된다. 또한, 그 안에는 일제 강점기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한 음모가 있었음도 인지하게 된다. 김상덕은 일행들을 각성시키는 인물이다. 

김상덕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하는 인물인 고영근은 대한제국 시기 군인이자 개화 지식이었다. 그는 민비,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조선인 장교 우범선을 사살한 인물이기도 하다. 우범선은 민비를 시해한 을미사변 이후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일본 여인과 결혼해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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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실해에 협조한 조선인 우범선을 척살한 고영근 


고영근은 1898년 도일하였고 그곳에서 독립협회 활동을 했던 조선인 망명자 윤효정을 만나 우범선의 존재를 알게 됐고 1903년 그를 모처로 유인해 사살했다. 이 일로 고영근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사형은 선고받았지만, 고종황제의 선처 노력으로 감형되어 복역 후 출소했다. 그는 이후 고종과 민비, 순종이 묻힌 남양주에 자리한 홍유릉의 능지기로 여생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애와 관련해 독립운동가로의 삶에 대한 의문도 있지만, 그는 개화사상가로 대한제국 시기 관련한 활동을 활발히 했고 관련 인사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했다. 무엇보다 친일 인사를 척살했다는 점에서 그 활동에 큰 의미가 있다. 영화에서 고영근은 풍수지리 전문가인 김상덕과 동업관계에 있는 장례업자로 등장한다. 그는 그 분야에서 인정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인물 설정은 인생 말년에 능지기로 여생을 보냈던 실존 인물 고영근과 묘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우범선의 아들 우장춘

 




우범선의 아들 우장춘 


참고로 고영근에 척살당한 우범선은 한국의 대표적인 농학자이지 생물학자인 우장춘의 아버지다. 우장춘은 일본에서 태어났고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지만, 아버지의 과오를 잊지 않았다. 그는 광복 후 정부가 설립한 농업과학 연구소 소장이 되어 귀국했다. 일본에서 보다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고 더 큰 연구 성과를 얻을 수도 있는 그였지만, 우장춘은 일본에 가족을 남겨두고 귀국을 결정했다.

우장춘은 열악한 조건에도 벼와 감자, 무, 배추 등 대표적인  농산물의 품종 개량 등에서 큰 성과를 냈고, 우리나라 현대 농업기술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제주의 대표적 작물인 감귤산업 발전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는 평소 검소하고 소탈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지나친 과로로 몸이 쇠약해졌고 1959년 8월 만성 십이지장궤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당시 우리나라의 의학 수준이 높았다면 충분히 치료가 가능한 병이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이 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해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상하며 마침내 친일파의 자식이라는 오명을 벗고 한국인 농학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김상덕과 고영근이 브레인의 역할을 했다면 그들과 함께 한 두 인물 이화림과 윤봉길은 귀신과 맞서는 전사와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속 무속인 이화림은 동명의 여성 독립운동가 이화림과 연결된다. 이화림은 1919년 3.1 운동 당시 14살의 나이로 이에 참여했고 오빠들과 함께 항일 무장 투쟁에 적극 참여했다. 이후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공산주의자로 평생을 살았다. 

 

 

조선의용대 사진




여성 무장 독립 투쟁의 대표 인물 이화림과 논란


이화림은 중국에서 항일 무장독립운동에 참여 중 임시정부에서 일을 했다. 그 과정에서 김구가 주도한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 이봉창과 윤봉길의 거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임시정부가 재정적으로 힘들었던 시기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고 일하며 임시정부에 자금을 보태기도 했다. 

하지만 이화림은 이후 반 공산주의자였던 김구와 이념적으로 대립하며 임시정부에서 멀어졌고 조선 의용군의 일원으로 항일 무장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조선 의용군의 전신은 조선의용대로 주로 중국 화북지역에서 활동했고 조선의용대는 가장 큰 규모의 무장 독립 단체였다. 이후 김원봉을 중심으로 조선의용대 일부가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에 가담한 상황에서도 이화림은 다수의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된 부대에 잔류했다. 

이후 조선 의용군의 중국 국민당이 아닌 중국 공산당과 함께 한다. 이들은 중국 공산당의 주력 부대인 팔로군 산하에 소속됐고 광복 후 북한에서 연안파로 불렸다. 팔로군 소속의 조선인들은 6.25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주력이기도 했다. 이화림은 중국에서 활동 시 간호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이를 바탕으로 간호장교와 같은 역할을 했다.

이후 광복 후 의사로 일하며 중국에 머물던 그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고 6.25 한국 전쟁 당시 참전한 중공군 간호장교로 참전하기도 했다. 이후 이화림은 전쟁 중 입은 부상으로 중국으로 호송됐고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마침 6.25 한국 전쟁 후 김일성 유일 체제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북한 내 중국계 연안파와 소련파가 모두 숙청되는 상황도 영향을 줬을 것으로 보인다. 

이화림은 청년 시절 여성의 몸으로 전장의 한복판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지만, 공산주의자로의 경력으로 인해 남한에서는 언급조차 금기시됐다. 북한에서도 연안파의 숙청과 동시에 그 존재감이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이화림은 광복된 조국에서 살지 못한 비운의 인물이었다. 

그의 경력이 서훈과 관련해 문제가 되는 건 불가피한 일이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논란이 있다면 있는 그대로 그의 생애는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영화에도 이화림이 무속인으로 등장해 귀신과의 싸움에서 가장 선두에 섰던 건 의미심장하다. 

 

 

윤봉길




1932년 상하이 의거 윤봉길과 이화림 


그리고 이런 이화림과 누나 동생의 관계처럼 함께 하는 인물 윤봉길은 잘 알려진 대로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군의 일왕 탄생 기념식과 상하이 점령 전승기념식장에서 폭탄을 투척해 다수의 일본군 고위 인사들을 사살하고 부상당하게 한 의거를 했다. 그의 나이 25살 때 일이다. 

그는 청년 시절 애국계몽 운동에 관심을 보였고 다양한 교육사업을 전개했지만, 일제의 방해와 탄압으로 원하는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에 윤봉길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 애국단에 가입했고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의거를 성공했다. 윤봉길의 의거에는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한인애국단의 역할이 있었고 앞서 언급한 이화림은 윤봉길의 사전 답사에 함께 하는 등 조력자로 함께 했다. 

영화에서도 윤봉길은 이화림을 의지하며 그가 무당으로 일하는 데 조력자로 함께 한다. 영화의 절정에서는 일본 귀신의 공격을 받고 생명의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윤봉길과 이화림의 영화 속 관계는 임시정부 한인애국단 시절 함께 했던 그들의 관계를 연상하게 한다. 

 

 

신채호




영화 속 또 다른 인물과 독립운동가 


이 밖에 영화에서는 극의 전개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장소가 보국사이고 보국사라는 이름 자체에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가 있다. 보국사를 창건한 이의 이름이 대표적인 항일 무장 투쟁 단체인 의열단의 수장이었던 김원봉을 연상하게 하는 원봉 스님이다. 

무속인 이화림의 주변 인물인 또 다른 무속인 오광심은 일제 강점기 임시정부와 광복군에서 활약한 여성 독립운동가 오광심과 같은 이름이다. 어른 무속인 박자혜는 궁인 출신으로 간호사가 되어 간호사들의 독립운동을 이끌고 중국에서는 신채호의 배우자로 그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박자혜와 같은 이름이다. 

그리고 조상의 김상덕 일행에게 파묘를 의뢰한 인물들의 이름에는 조선 후기 개화파 인사였고 일제 강점기 친일파이자 기업인이기도 했던 박영효를 연상하게 한다. 또한, 일을 의뢰한 인물인 박지용과 그의 아버지 박종순,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악귀 박근현이라는 이름은 대표적인 친일파인 을사 오적의 일원인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의 이름의 조합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가능하게 한다. 

 

을사오적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장르물의 재미와 역사의 숨은 그림 찾기가 함께 하는 파묘


이렇게 영화 파묘는 등장인물과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장면에서 일제 강점기 역사적 사실들을 숨은 그림 찾기처럼 담고 있다. 그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일제를 상징하는 일본 귀신에 맞서게 된다. 그 장면들을 보면서 관객들은 다시 한번 일제강점기 역사에 궁금증을 느끼게 된다.

아울러 일제 강점기 후반기 자행했던 민족말살 정책을 다시 조명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일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으로 조선인들도 전시 총동원령에 함께 하도록 했다. 이를 위해 그들의 조선인들을 일왕에 충성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창씨개명과 한글 사용 금지 등의 민족말살 정책으로 연결된다. 그 일환으로 일제는 한국인들의 삶에 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풍수지리적 부분에도 침탈을 자행했다. 

대표적으로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인 경복궁 바로 앞에 조선 총독부 건물을 지은 것이나 그 맞은편 남산에 일본 신궁을 건설하기도 했다. 또한, 민족의 정기를 끊는다는 목적으로 우리나라 산맥 곳곳에 쇠말뚝을 박아 놓기도 했다. 다만, 쇠 말뚝과 관련해서는 토지 측량을 위한 목적으로 설치한 것으로 풍수지리와는 무관하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앞으로도 이와 관련해서는 논란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해도 일제의 토지 조사사업은 경제 수탈과 관련한 일이었고 우리 땅 곳곳에 인공 구조물을 수없이 설치했다는 점은 결코 무심히 넘길 일은 아니다. 

이런 논란에도 영화 파묘는 컬트영화로서의 장르적 특징을 살리며 그 그 안에 역사적 코드를 더하는 독특한 구성으로 흥행까지 잡았다. 마니아들의 영화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컬트 영화가 국민적 관심을 얻는다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를 통해 대중들이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건 영화의 순기능이라 할 수 있다. 아직 영화를 관람하지 않았다면 관람했더라도 영화속에 담긴 역사를 살피는 게 영화를 보는 재미를 더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 : 영화 홈페이지 / 위키백과,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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