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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34번째 여정은 서울 서남부의 금천구의 이런저런 이야기로 채워졌다. 금천구는 과거 구로공단이라 불렸던 섬유 산업의 중심지로 1970년대 대한민국 수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던 공업단지였다. 이곳에는 당시 수많은 섬유, 의류 공장을 비롯해 경공업 공장이 즐비했고 고향을 뒤로하고 서울로 올라온 많은 젊은이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며 꿈을 키워왔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금천구는 세월이 흐르고 대한민국의 산업의 첨단 산업으로 변화하면서 경공업 단지는 쇠락했고 당시의 공장들은 하나둘 사려져 지금은 고층 빌딩들이 즐비한 IT 산업단지로 변모했다. 이 때문에 금천구는 대한민국의 산업화 흐름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으로 독특한 현대사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진행자는 이 금천구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유서 깊은 사찰, 호압사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호압사는 관악산의 지류인 호암산에 자리한 사찰로 그 기원이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 시점으로 올라간다. 조선 개국의 중요한 인물인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지는 호압사는 호랑이의 기운을 누른다는 의미로 호암산의 형상이 호랑이와 같아 조선의 궁궐을 위협하고 있어 이를 막기 위해 호압사를 창건했다. 풍수지리설에 근거한 사찰로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사찰이라 할 수 있다. 




호압사를 내려와 안양천을 따라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됐다. 한강의 지천인 안양천은 과거 산업화 당시 크게 오염되어 하천으로서의 기능을 잃었지만, 최근 그 환경이 크게 개선되었다. 지금은 지역민들이 여가를 즐기는 장소로 변했고 안양천변을 따라 심어진 벚꽃의 풍경은 또 다른 절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 안양천을 따라 걷다. 자전거 3개 높이의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자전거 전문점을 운영하는 기술자였다. 그는 과거 큰 사고로 장애를 얻었지만, 자전거를 통해 재활에 성공해 지금은 건강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에게 자전거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고 삶의 일부라 할 수 있었다. 그의 자전거 사랑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고층 자전거 제작으로 이어졌고 지금은 출퇴근을 그 자전거로 하면서 삶의 일부가 되었다. 큰 불행을 이겨내고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 

안양천을 벗어나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그곳에서 과거 구로공단에서 일했던 청춘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구로공단 생활체험관을 만났다. 구로공단 생활 체험관은 지금은 사라진 구로공단에서 일했던 근로자들의 삶의 모습을 재현한 공간으로 당시의 여러 사진 자료와 함께 좁디좁은 공간에  4~5명이 함께 생활했던 쪽방촌을 볼 수 있었다. 당시 저임금과 상상할 수 없는 작업량에 시달리면서도 고향의 식구들의 위해 참고 견디며 일했던 10대의 여성 근로자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이 지금의 대한민국의 산업화의 밀알이 되었지만, 그 힘든 삶 속에서도 좀 더 나은 내일의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견뎠을 이들의 고단함에 고개가 숙여졌다. 

당시의 고단함과는 크게 다르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청춘들 역시 취업난에 시달리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금천구에는 그 청춘들을 위한 쉼터가 있었다. 청춘삘딩이라는 이름의 건물은 소정의 회원비를 내면 누구나 찾아와서 공유 주방에서 요리를 해서 식사를 하거나 공부할 수 있는 독특한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지역의 청춘들은 잠시나마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진행자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젊은이들을 위해 주변 시장에서 과일을 사서 공유 주방의 냉장고를 채우며 그들을 응원했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금천구에서 과거가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는 곳이 있었다. 독산동의 우시장이 그것이었다. 1970년대 도축장이 들어서며 형성된 독산동 우시장은 이제 마장동과 함께  축산물 유통의 또 다른 메카로 자리했고 수많은 축산물 유통 업체들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이곳에서는 쉽게 구하기 힘든 신선한 소, 돼지고기 부산물을 만날 수 있었다. 

진행자는 우시장을 돌아보다 어머니가 운영하는 부산물 전문점에서 곱창 재료를 받아 곱창 식당을 운영하는 젊은 부부를 만났다. 신선한 곱창을 받아 정성껏 손질한 후 판매하고 있었는데 이 곱창집은 1970년대와 지금의 시간이 함께하는 공간 같았다. 

곱창집의 맛있는 향기를 뒤로하고 여정은 잣나무 숲길이 일품인 호암늘솔길에서 힐링의 시간과 함께했고 호암산 정상에 자리한 거대한 우물로 사적지로 지정된  한우물에서 오랜 과거와의 만남을 할 수 있었다. 한우물은 절대 마르지 않는 우물로 신기함까지 더한 장소였다. 

막바지로 접어든 여정은 36년간 운영된 의상실  앞에 발걸음을 멈췄다. 이 의상실은 단골들이 아니며 찾기 힘든 장소였다. 실제 그 동네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었다. 이곳의 사장님은 자신의 집 한편에서  오랜 경력에서 우러나온 경험과 실력으로 의상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곳의 사장님은 과거 재봉 실력 하나만을 믿고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온 이후 이 기술로 자녀들을 공부시키고 집도 장만하면서 지금의 일이 너무나 고맙고 천직이 되었다. 

지금은 다양한 경로로 옷을 구입하면서 옷단을 가져와 자신의 옷을 만드는 이들이 많지 않지만, 여전히 이 의상실을 실력을 믿고 찾는 이들이 있어 의상실을 지키고 있었다. 단골손님들의 성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 그들만의 맞춤 의상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이곳의 큰 장점이었다. 그 때문에 이 의상실의 손님들은 단순한 손님 그 이상의 존재였다. 이제는 옷도 쉽게 소비되고 버려지는 것이 일상인 현실에서 이 의상실은 과거의 것이라만 할 수 없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다시 골목길을 걷다. 돌들을 이용해 멋지게 집 앞을 장식한 집을 만났다. 팔순이 가까운 집주인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독특한 정원을 꾸며놓았다. 사업을 정리한 이후 시작한 일은 이 집을 지역의 명소로 만들었다. 멋진 정원이 함께하는 이 집은 식구들이 함께 하는 식당으로도 운영되고 있었는데, 천연 조미료로 맛을 내는 등 나름의 철학과 원칙을 지키고 있었다. 그 덕분에 많은 손님을 받을 수 없지만, 좋은 음식을 나누는 것이 이들에게는 더 소중해 보였다. 이런 식당을 이웃에 두고 있는 마을 사람들이 부러워 보였다. 

금천구는 해당 이후 우리 현대사에서 많은 변화를 몸소 겪은 곳이다. 어렵고 힘든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의 애환도 이곳에 담겨있고 그 자리를 수많은 직장인들의 분주한 발걸음으로 채워지고 있다. 이런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과거의 것들이 공존하며 함께하고 있었다. 역동성과 과거의 전통이 공존하는 곳이 금천구였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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