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 남단에 자리한 오키나와현은
일본 남부에서 대만과 가까운
동중국해에 이르기까지 많은
섬들을 품고 있다.
오키나와는 한국과 일본
중국을 오가는 뱃길에 자리한
지리적 입지로 인해 예전부터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다.
지금도 많은 미군 기지가
오키나와에 설치되어 있다.
이에 오키나와는 일본에
속해있지만, 미국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일본 현대사에서 가장 늦게
편입된 땅 오키나와
또한, 동남아시아와 가까운
위도상에 자리하고 있어
연중 온화한 기후로 계절을
가리지 않는 휴양지로 많은
많은 전 세계 여행자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 안에는 다수의 한국인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 오키나와와 완벽히
일본의 영토로 편입된 게
불과 50여 년 밖에 안됐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을 생각보다
많지 않다.
오키나와는 선사시대부터
지역민이 살고 있었고
독자적인 고대 왕국을 세우고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키기도
했다. 그 속에서 오키나와는
류큐왕국, 류큐국으로 불렸다.
우리 역사에서도 오키나와는
유구국으로 기록 곳곳에
남아있다. 우리 역사에서도
오키나와는 지속적인 교류를
한 나라였다.
하지만 그런 역사적 전통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됐다.
그 사이 오키나와는 중국,
일본, 미국 그리고 일본까지
외세의 지배를 받아왔다.
지금은 일본의 영토가 됐지만,
여전히 그들은 본토인과 다른
외지인 취급을 받으며 차별적
대우를 받는 게 현실이다.
일본이지만, 일본이 아닌듯한
섬이 오키나와는 그리고 그
안에는 여러 굴곡진 역사가
함께 하고 있다. 그 역사는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고
많은 무고한 이들이 희생이
뒤따랐다. 모두 오키나와 인들이
원치 않았던 일이고 외세의 침략과
폭력에 의한 일이었다.
이에 오키나와의 역사에는 슬픔과
한이 담겨 있다. 수많은 외침을
받았고 식민 지배의 역사를 거쳤던
우리나라와도 통하는 면이 있다.
오키나와의 황금기
류큐왕국 시기
오키나와가 세계사에 본격 등장한 건
15세기 초반 무렵이다.
그전까지 선사시대부터 원주민이
살아왔지만, 각 섬별로 독자적 세력이
존재했고 국가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 그 덕분에 국가의 발전 속도도
더딜 수밖에 없었고 문명의 발전도 늦었다.
1429년 오키나와는 통일 왕국이
들어섰고 명나라와 조공 책봉 관계를
수립하며 국가 발전을 본격화했다.
그때부터 오키나와는 중국 황제가
내려준 이름인 류큐를 국호로
사용하며 류큐국, 류큐왕국으로
그 역사를 시작했다.
류큐왕국은 중국과의 조공무역과
동남아시아, 일본, 조선에 이르는
해상 무역로의 중심에서 중계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며
경제적으로 부유한 해상왕국이
됐다.
또한,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발전시켰다.
류큐왕국은 일본과는 다른
독자적인 국가로 중국과
교역했다. 이는 왜구들의
계속된 노략질로 인해 중국과의
무역, 교류가 단절된 일본과
크게 비교되는 일이었다.
류규왕국은 중국 문화권에
편입됐고 명나라의 그들 아래에서
안보를 보장받았고 해상무역을
주도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과
자주권 상실
이후 류큐왕국은 16세기 후반까지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류큐왕국의 번영은
16세기 후반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토요토미의 등장과 이어진
임진왜란으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됐다.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는
영토 확장에 큰 야욕을 가지고
있었고 류큐왕국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류큐왕국은 명나라에 조공하고
있었지만,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에 일본에도 조공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결정적으로 임진왜란의
발발은 류큐왕국에 큰 시련이 됐다.
당장 류큐왕국은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려야 했다.
당시 일본 규슈 섬 남부
지금의 가고시마 일대를
지배하던 사쓰마번의 시마즈
가문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침략에 대규모 부대를
파견했다.
그 과정에서 사쓰마번은
류큐왕국에 막대한 군비 지원을
강요했다.
류큐왕국은 그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중인 조선은 물론이고
그들이 조공하는
명나라 침략까지 목표로 하는
일본의 조선 침략에 협조할 수도
직접적인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협조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류큐왕국은 실리와 국익 관점에서
사츠마번 군수지원에 미온적으로
대응했고 심지어 침략 관련 정보를
명나라에 전달하기도 했다.
이런 대응은 결과적으로 류큐왕국에
큰 위기를 불러왔다. 임진왜란 이후
사쓰마번은 군대를 파견해 류큐왕국을
복속시켜다.
사쓰마번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이
사망한 토요토미를 추종하는 서군과
도쿠가와를 추종하는 동군이
대립하는 내전 속에서 서군 편에
섰다. 서군이 동군에 패하면서
사쓰마번은 멸문의 위기를 맞이했지만,
가까스로 이를 벗어났다.
대신 그들 영역의 확장은 극히 제한됐다
이들은 남쪽 바다로의 진출을
적극 모색했고 류큐왕국을
그들 영역으로 포함시켰다.
수탈의 역사 시작
이후 일본에 도쿠가와가 주도하는
에도막부 시대가 열리면서
류큐왕국 역시 하나의 번으로
전락했다.
류큐왕국은 사쓰마번과 에도 막부로
부터 지속적인 수탈에 시달렸다.
명나라와의 교역을 위해 류큐왕국의
명맥을 이어가도록 했지만, 실제
국가 운영은 사쓰마번이 주도했다.
그러면서 왕족들이 인질로
잡혀가기도 했고 중계무역을 통해
얻은 수익 중 상당수도 강탈당했다.
각종 국가 재산도 수탈의 대상이었다.
이런 류큐왕국의 상황에도
조공을 받고 있었던 명나라는
이를 구원하지 못했다.
거리상 문제도 있었지만,
명나라는 임진왜란 직후
급속히 약해지고 있었고
만주 지역에서 일어난
청나라의 위협과 민란 등으로
류큐왕국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또한, 영락제 이후
해상으로의 진출을 사실상
포기한 대외정책도 류큐왕국에 대한
영향력을 스스로 내려놓게 했다.
일본에 복속된 이후 류큐왕국은
자주성을 상실했고 국력도 쇠퇴했다.
나라의 명맥만을 유지할 뿐이었다.
이는 명나라에 이어 등장한
청나라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유지하던 류큐왕국의 명칭도
일본의 정세 변화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메이지 유신과
단절된 왕국의 역사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막부 시대를 끝내고 일왕
중심의 중앙집권 시스템과 국가
주도의 서구화 정책을 강력히
시행했다.
그 결과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근대화는 서구 제국주의를
답습하고 일본을 힘에 의한 지역
패권을 추구하는 침략국가가 되도록 했다.
이는 강력한 영토 확장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우선 류큐 왕국을
완전히 그들의 행정 체제 속으로
복속시켰다.
일본은 혹시 모를 청나라의 반발을
우려했지만, 이미 내적으로 부패한
정부의 서구의 침략 속에 쇠약해진
청나라는 일본의 류큐왕국
복속과 대만 침공에 대응하지
못했다.
청나라의 묵인 속에 일본은
쉽게 류큐왕국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에 류큐 왕국은 형식적이었지만,
그들의 자주 국가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했다.
나라를 대표하는 왕은 번왕으로
전락했고 일본의 귀족이 됐다.
류큐왕국은 2차례 일본의 류큐처분을
거치며 기존의 류큐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일본이 붙인 오키나와라는
행정명으로 불리게 됐다. 1879년의
일이다.
이후 일본은 류큐인들에 대한 강력한
일본 동화정책을 시행했다.
고유의 언어와 풍습, 문화 대신
일본어를 사용토록 하고 그에 맞는
교육을 했다.
그러면서도 일본은 류큐인들을
일본으로 대하지 않고 2등 국민으로
차별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이는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정책과 너무 닮아있었다.
류큐인들에 대한 차별은
이후 계속됐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전쟁의 비극 속으로
더 큰 문제는 오키나와가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전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는 점이었다.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으로 참전한 일본은
승전국의 지위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더 강력히 대외 팽창을
했다.
이후 일본은 중. 일전쟁을
일으켜 대륙 침략을 시작했고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추축국의
일원이 됐다.
이후에는 진주만 공습을 기점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침략전쟁의
범위를 확대했다.
오키나와는 태평양 전쟁의
전진기지로서 많은 일본군이
주둔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렸고 강제징집되거나
노역에 시달렸다. 그 안에는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하지만 일본의 야욕은 애초
이룰 수 없는 망상에 근거한
일이었고 미국의 참전이 본격화된
이후에는 각 전선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태평양 전쟁에서도 일본은
점령지에서 하나 둘 패퇴했고
일본 본토가 연합군에
수시로 폭격을 당하는 등
패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오키나와는 제국주의 일본에는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보루였다.
미국이 중심이 된 연합군은
오키나와의 전략적 가치를
알고 있었고 일본 본토 상륙전
오키나와 점령을 위한
상륙전을 전개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오키나와 섬 곳곳에
땅굴을 파고 저항하는 등 끈질긴
게릴라전으로 맞섰다.
또한, 가미카제로 불리는 자살
비행대를 총동원해 미국의 항공모함과
선박 등의 파괴에 나섰다.
일본은 연합군을 최대한 오키나와에
묶어두고 피해를 주면서 본토 상륙을
저지하려 했다.
문제는 이런 일본군의 저항에
무고한 오키나와 주민들이
강제로 동원됐다는 점이었다.
항전이라는 미명하에
나이 어린 남학생들들은
학도병으로 여학생들은 간호병으로
최전선에 동원됐다.
학도병들은 총알받이나
자살 공격조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간호병이 전장에 투입된
여학생들도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했다.
그 속에서 많은 어린 학생들이 희생됐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이 연합군에 항복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위협했고 항전에 참여토록
했다.
전황이 크게 기운 이후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강요하면서
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지금 오키나와에 있는 평화공원의
해안 절벽은 수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이 강요에 의해 몸을 던져
희생된 곳이다.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진행된 오키나와 전쟁은
연합군과 일본군 양측 모두에
엄청난 인명피해를 남겼다.
그 안에는 강제징용된 수많은
조선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확한 숫자와 신원은
지금도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오키나와 평화공원 한편의 한국인
위령탑이 당시 조선인들을
존재를 기억하게 할 뿐이다.
지금도 당시 희생된 일들의 유골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만큼
오키나와 전쟁은 참혹한 전쟁이었다.
그로 인한 피해의 상당수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몫이었다.
이렇게 연합군에 점령된 오키나와는
이후 일본에 두 번의 핵폭탄이
투하되고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과 소련을 양대 축으로 하는
냉전시대가 찾아왔고
오키나와는 미국의 대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동아시아 지역
군사 전략에서 매우 중요한
요충지가 됐다.
오키나와는 중국과 소련을
대외 팽창을 저지하는 전진 기지이자
유사시 대응할 수 있는 군대의
주둔지가 됐다. 아울러 전범국가인
일본은 견제하기 위해서도 오키나와는
중요했다.
미국의 지배
이에 오키나와 지역 곳곳에는
미군 기지가 건설됐고 많은
미군이 주둔했다. 가장 많을 때는
오키나와 지역 땅의 20%를
미군이 점유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미국은 오키나와
지역을 그들 관할하에 두고
군정을 실시했다.
이에 오키나와의 행정 체계는
일본이 아닌 미국 시스템에
따라 운영됐다.
미국식 교육 방식을 따르는
지역 대학을 설립하는 등
일본과 다른 교육정책도
시행했다.
미국은 일본이 과거
오키나와 지배 시 행했던 동일화
정책을 시행하지 않았고 류큐어나
전통, 문화에 대해서도 통제를
가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자치 정부 수립을
하도록 하고 자치권을 일부
인정하기도 했다.
이는 그들의 정체성을
되살릴 수 있는 기회였지만, 그 이면에는
일본과 분리해 오키나와의 지배를
보다 용이하게 하려는 미국의
의도도 숨어 있었다.
그들의 필요에 맞게 지역민들을
교육시키면서 미국의 통치를
보다 효율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 오키나와에는
일본 본토와 달리 미국의 문화가
사회 전반에 급속히 유입되고
자리를 잡았다.
지금도 오키나와의 식문화에는
미국의 영향이 그대로 남아있다.
하지만 오키나와의 미군의
주둔지라는 본질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미군의 대규모 주둔으로
오키나와 지역민들의
재산권 행사나 경제 발전에는
상당한 제약이 발생했다.
아울러 미군 기지 건설 시
지역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수용하는 등 강압적 조치가
잇따르면서 갈등이 커지기도 했다.
이 외에도 미군들에 의한
지속적인 범죄 피해와
민간인 지역과 군부대가
인접하면서 비행기 추락 사고 등으로
인한 피해도 지역민들의 삶을
위협했다.
미군의 주둔에 따른 경제적
이익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패해가 커졌다.
여기에 일본도 미국도 아닌
오키나와의 혼란스러운
정체성 문제도 함께 했다.
이렇게 사실상의 미국령으로
자리했던 오키나와는
1972년 미국의 지배를
벗어나 일본으로 반환되는
변화가 생겼다.
미국은 오키나와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고 있었지만,
이를 유지하는데 막대한
비용이 부담이었다.
결정적으로 베트남전이 길어지면서
그에 대한 전비 부담이 커졌다.
이에 미국인 일본 정부와의
협의를 통해 오키나와의 일본
반환에 합의했다. 그 한편에서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미국의 지배를
벗어나려는 일본 귀속 운동도
자리하고 있었다.
비록, 과거 역사에서 일본이
오키나와는 억압, 차별하고
수탈하긴 했지만, 그 역사를 공유하고
있고 보다 더 문화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미국보다는 일본의
행정체계 속으로 들어가는 대
낫다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
아울러 일본이 196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경제 대국이
되면서 그 그늘 아래 들어가는 게
실리적으로 유리하기도 했다.
한편 일본 정부는 과거 그들
영토의 회복이라는 명문도 있었다.
일본 반환
여전한 차별
이에 일본 정부는 일본 내 주둔하는
미군에 대한 방위비 분담액을
크게 증가시키는 조건으로 오키나와의
반환 협상을 타결했다.
이에 오키나와는 다시 일본의
영토가 됐다.
하지만 지역민들의 기대와 달리
오키나와는 여전히 미군 기지의
역할을 벗어날 수 없었다.
오히려 일본 본토 내 미군 기지가
오키나와로 이전하면서 지역민들이
기대했던 미군 기지 축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미군들의 범죄 문제와 각종
사고, 경제적 불이익은 여전하다.
또한, 지역민들이 원했던
완전한 일본인으로서의
삶도 보장받지 못했다.
오키나와인들은 여전히
본토인들에게 차별 대우를
받고 있고 편견과 혐오의 대상이다.
이에 오키나와인들은 일본에
속하지 못하는 주변인의 삶을
살고 있다.
천년 가까운 세월 침략을 당했고
피지배를 당했던 오키나와의 역사는
여전히 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오키나와의 역사는
수많은 외침을 겪었고
일제의 불법과 폭력으로
점철한 식민 지배 역사를 겪었던
우리나라와 통하는 면이 많다.
앞서 언급했듯이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당시
전쟁 피해를 함께 당하기도
했다. 이는 정서적 공감대를
가질 수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멋진 풍경속에 담긴
슬픔의 역사
이렇게 오키나와는 강대국들의
틈에서 고통과 슬픔의 역사를
계속 쌓았다.
이에 오키나와에서는 과거
역사의 아픔을 기억하고 이를
반복하면 안 된다는 평화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행사가 매년
열리고 있기도 하다.
지금은 일본과 미국, 남국의
멋진 풍경이 융합된 휴양지가 된
오키나와지만, 이런 역사를 알고
방문한다면 보다 더 깊은 이해를
가지고 여행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오키나와가
아픈 역사를 뒤로하고 보다 밝은
역사를 쌓아가길 기대해 본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지후니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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