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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권과 접하는 북유럽의 나라 노르웨이는 대표적인 복지 국가, 또는 멋진 자연경관의 여행지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만, 현대 미술사에 중요하게 거론되는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의 나라이기도 하다. 뭉크는 노르웨이의 국민화가로 미술사에서 변방에 있었던 노르웨이를 미술사의 중요한 국가로 만들었다.

이런 공로로 인해 그는 지금도 노르웨이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고 노르웨이 지폐에 그 초상이 실려 있을 정도다. 그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미술관이 운영되고 있기도 하다. 또한, 뭉크의 그림은 경매에서 세계 최고가로 거래될 정도로 높은 대중성과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위대한 화가로 추앙받는 뭉크지만,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1863년 노르웨이 한 도시에서 태어난 그는 의사였던 아버지와 예술적 소양을 가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제적 여유가 있고 많은 형제와 함께 한 유복한 가정이었지만, 그의 유년기는 불행이 지속됐다. 5살 어린 나이에 그의 어머니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가 믿고 의지했던 누이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결핵은 불치병으로 전 유럽에서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런 가정의 불행에 더해 그의 어린 여동생마저 정신병으로 고통받았다.

뭉크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 종교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광신도로 자녀들에게도 자신의 의지만을 강요하는 강압적인 아버지로 변해갔다. 뭉크는 가족애를 제대로 느끼기 못한 채 유년기를 보냈고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너무 일찍 경험하면서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이 됐다. 그는 삶 내내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고 이는 삶과 세상에 대한 인식을 부정적으로 변하게 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누이를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병든 소녀

 



이런 세상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가진 뭉크는 사랑에도 거듭 실패하며 더더욱 세상과 멀어지고 말았다. 그에게 그림은 이런 삶의 고통을 덜어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마침 그의 이모는 그의 화가로서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가 화가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뭉크는 화가로서 재능을 일찍부터 인정받고 젊은 나이에 파리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뭉크는 당시 새로운 미술 사조로 떠오른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에 큰 영감을 얻고 자신의 화풍을 정립해 나갔다. 프랑스 유학 시절 그의 작품은 밝으면서도 당시 유행하던 사실주의와 다른 인상주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뭉크는 화가로 성장하면서도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불안 증세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이는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작품에 그대로 반영됐다. 그의 대표적 작품 '절규'는 그의 불안한 마음과 죽음에 대한 공포,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절규'는 뭉크 특유의 인물에 대한 괴귀스러운 표현, 그림 전반에 흐르는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까지 그의 전성기 작품의 기법이 담겨 있다. '절규'의 주인공 모습은 공포영화 등에서 차용되면서 대중들에게 더 많이 알려졌다. 

뭉크는 그의 작품 '절규'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친구 둘과 함께 길을 가고 있었다. 해질녁이었고 나는 약간의 우울함을 느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멈춰 선 나는 죽을 것만 같은 피로감으로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핏빛 하늘에 걸친 불타는 듯한 구름과 암청색 도시가 있었다. 그때 자연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 소리를 들었다.' 이 글에는 그가 세상을 보는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다. '절규' 속 머릴 감싸 쥐고 있는 인물은 바로 뭉크 자신이었다. 뭉크는 거대한 피오르드 절벽에서 붉은 노을이 지는 멋진 풍경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이후 그의 작품은 '절규'와 같은 느낌의 작품이 주류를 이뤘다. '절규'는 4가지 기법으로 그려졌다. 여기에 여인들과의 잇따른 시련은 그의 작품을 더 우울하고 어둡게 만들었다. 그는 4명이 있었지만, 아픈 이별을 경험해야 했다. 가장 오랜 기간 관계를 유지했던 여성인 툴라와의 갈등 속에 총기 사고로 왼쪽 중지 손가락을 잃는 사고를 겪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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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의 대표작 절규

 



가족들의 계속되는 죽음, 연인들과의 연이은 이별 속에 뭉크는 사회적 관계 자체가 두려워졌다. 세상을 보는 시각도 부정적으로 변했다. 이는 그의 그림에 그대로 투영됐다. 그의 작품은 당시 미술계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당연히 평론가들과 대중들에게 그의 작품은 긍정 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 그의 작품은 혹평을 받았다. 제정신으로는 그릴 수 없는 작품이라는 비판도 들어야 했다. 뭉크로서는 그의 삶에서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인 그림마저 비판을 받으며 더 큰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하지만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사회가 발전하면서 문화, 예술을 즐기는 이들이 늘어나고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로의 변화는 뭉크 작품에 대한 다른 해석을 하는 이들 또한 늘어나게 했다.  특히, 독일을 중심으로 예술의 자유를 강조하는 예술가 그룹에서 뭉크 작품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인상주의를 뛰어넘어 작품에 예술가의 느낌이나 철학을 함께 담으려 했다. 뭉크의 작품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이 보는 대로만 그리지 않고 자신이 느낌대로 본 것을 그리는 작품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표현주의라는 새로운 미술 사조가 만들어지는 계기였다. 뭉크는 이런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뭉크는 새로운 미술을 이끄는 화가가 됐고 대중들의 높은 관심을 받았다. 여전히 그 작품에 대한 비판이 존재했지만, 예술을 향유하는 인구가 증가하는 상황 속에서 그의 작품에 높게 평가하는 인구도 함께 늘었다. 이런 대중성의 확보는 그가 유명 화가로 발전하는데 큰 힘이 됐다. 

이는 뭉크를 성공한 화가로 만들었고 뭉크는 생전에 많은 부와 명예를 얻도록 했다. 하지만 그의 불안 증세와 이에 따른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그를 계속 괴롭혔다. 이에 뭉크는 술에 의존해 살아가야 했다. 심각한 정신병 증세로 인해 뭉크는 장기간 병원에서 요양을 하기도 했다.

이런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고 노년기에 접어든 뭉크는 점점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그의 작품을 판매하며 쌓은 돈으로 노르웨이에 넓은 땅을 구입하고 그곳에서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경제적 안정과 자연 속에서 뭉크는 작품 활동에 다시 매진했다. 후기 뭉크의 작품은 이전처럼 우울하고 어두운 느낌에서 한층 밝아지고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 

오슬로 대학교 개교 100주년을 기념해 대학교 강당에 걸린 벽화 '태양'은 뭉크에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그대로 상징하는 작품이다. 뭉크는 이 벽화 공모전 당선되기 위해 온 힘을 다했고 채택을 위해 작품료를 감액하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기도 했다.

 

 

뭉크 후기 작품 태양

 



그렇게 그려진 '태양'은 밝은 태양의 햇살의 에너지를 그대로 담고 있다. 마치 은둔의 삶을 살다 세상 밖으로 나온 자신을 보여주는 듯한 작품이다. 같은 하늘이지만, 우중충하고 우울하게 그렸던 '절규'의 하늘이 밝고 빛나는 하늘과 풍경으로 변모했다. 이는 뭉크가 더는 어둠 속의 화가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뭉크는 보다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예술가로 변모했다.  과거에는 세상과의 단절을 작품에 표현했지만 노년의 뭉크는 작품을 통해 세상과 소통했다. 평생 그를 괴롭히던 죽음에 대한 공포 역시 떨쳐냈다. 그는 194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작품을 오슬로 시에 모두 기증했다. 그의 작품을 중심으로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에는 두 개의 미술관이 세워졌다.

그리고 뭉크는 노르웨이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로 남아 있다. 뭉크 작품의 유명세는 두 차례 도난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도난당한 작품들은 다시 돌아왔고 이는 그의 작품을 세상에 더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파란만장하다는 말이 맞는 뭉크의 삶이었다. 그는 그의 삶은 작품 속에 그대로 녹아냈다. 그의 작품을 따라가면 각 시대별로 뭉크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세상을 보는 시각을 함께 느낄 수 있다. 그 느낌을 뭉크는 독특한 기법으로 표현해 특별함을 더했다. 그의 삶은 오랜 세월 덴마크, 스웨덴의 지배를 받다 독립 후 시행착오를 겪으며 독립 국가가 되고 북유럽의 부국이 된 노르웨이의 역사와도 닮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르웨이 인들이 그의 작품을 다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그 점에서 뭉크의 그림은 그 시대 노르웨이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예술은 시대의 반영이고 시대의 거울이라는 말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님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사진 : 뭉크 미술관, 위키백과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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