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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사실상 경제 수도 역할을 하고 있는 상해는 현대 중국 경제 발전을 상징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끈 지도자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정책의 시작도 상해에서 이루어졌고 상해는 세계 그 어느 대도시와 견주어도 전혀 밀리지 않는 세계적 도시다. 

이렇게 화려함의 도시 상해지만, 이 도시의 역사는 서양 열강에 침탈당했던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나라 말기의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 공화정이 시작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그 역사를 시작한 곳으로 우리 역사에서도 의미가 큰 도시다.

상해가 근. 현대사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던 1840년 제1차 아편 전쟁에 그 배경이 있다. 영국이 대 청나라 무역 역조를 개선하기 위해 아편, 마약을 중국에 수출하기 시작했고 아편은 영국의 대 중국 무역수지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됐지만, 중국은 다수의 마약 중독자들이 발생하는 등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중국은 아편 무역을 근절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규제를 시행했다. 이에 영국은 크게 반발했고 양국의 갈등은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아편 전쟁의 시작이었다. 1840년 발발한 아편 전쟁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앞세운 영국의 일방적 승리였다. 

이 승리로 청나라는 기존의 광저우 외 4개항을 추가로 개항하는 한편, 홍콩을 영국에 넘겨야 했다. 이 외에도 불평등 조항과 막대한 배상금이 포함된 조약이었다. 이 조약으로 서양 국가로부터 잠들어 있는 사자로 여겨지던 중국은 병든 돼지가 됐고 이후 서구 열강들의 이권 다툼의 장으로 전락했다. 중국은 2차 아편전쟁으로 더 큰 국권을 침탈당했고 내부적으로 집권층의 부정부패와 무능, 태평천국의 난 등 사회 혼란이 이어지며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걸었다. 

 

 

1930년대 상해 지도

 

 


이 과정에서 상해는 아편 전쟁의 결과 추가 개항하는 항구로 포함됐다. 그전까지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던 상해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영국은 상해가 중국의 중요한 강인 양쯔강 상류로 향할 수 있는 거점이고 베이징과 연결되는 대운하의 시작점으로 지리적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영국은 중국을 압박하고 더 많은 이권을 확보하기 위한 일종의 전초 기지로 상해를 선택했다.

이후 상해에는 중국의 통치와 무관한 영국민들의 집단 거주지이자 치외법권 지역인 조계지가 건설됐다. 1845년 건설된 영국의 조계지에 이어 미국과 프랑스도 앞다퉈 상해에 그들의 조계지를 건설했다. 이곳은 중국민들과 불리된 서양인들의 세상이었고 서구 열강들의 중국 침탈의 상징이었다.

이런 상해 조계지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1850년부터 1864년까지 장기간 지속한 태평천국의 난을 겪으면서 중국인들이 서양인들의 조계지로 대거 유입됐기 때문이었다. 심각한 살육이 끊임없이 자행되는 상황에서 다수의 중국인들에게 서양의 조계지는 최적의 피난처였다. 늘어나는 인구 유입에 조계지는 인종 분리 정책을 포기했다. 대신 상해는 늘어나는 인구에 비례해 그 규모가 크게 확대됐다. 조계지 역시 그 범위가 크게 늘었다. 

이에 조계지 내에서는 자치적인 정부 시스템을 만들고 중국과 다른 행정, 사법 체계가 작동됐다. 자체 치안유지를 위한 자경단이 만들어지고 군대로 발전했다. 이는 중국인을 고려했다기보다는 늘어가는 중국인들의 통치를 위한 일이었다. 이에 중국인들은 조계지 내에서 차별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조계지 밖은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더 위험한 곳이었다. 

도시의 확대는 필연적으로 도시 개발을 불러왔다. 조계지에서는 서구식 근대화가 빠르게 진행됐다. 전기, 통신, 수도 등 사회 인프라가 속속 갖추어지기 시작했고 상해는 근대 도시로 발전했다. 하지만 그 혜택은 서양인들이 주로 받았고 중국인들은 열악한 주거 환경과 저임금 노동에 시달렸다. 

 

 

현재 상해 거리

 



이렇게 중국 내 서양의 도시로 발전한 상해에는 중국에 진출하는 외국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국제도시의 면모도 보이기 시작했다. 초창기 서양인들의 유입이 많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급속한 근대화를 이루며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른 일본의 진출도 본격화됐다. 1894년 청. 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일본은 중국의 이권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상해 조계지에서도 서양인들과 같은 지위와 권리를 누렸다. 

이런 배경 속에 상해는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근대 도시로 다수의 외국계 기업들이 진출한 금융과 상업의 중심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그 발전은 중국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청나라는 거듭된 전쟁의 패전으로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이는 재정파탄을 불러왔다. 서구 열강들과 일본은 각종 경제 이권을 잠식했다. 중국의 경제는 점점 서양에 예속되어 갔다.

그 속에서 국민들의 삶은 나날이 피폐해지고 다수의 국민들이 생활고에 시달렸다. 중국에서 아편 중독자가 만연한 건 이런 고단한 현실을 잊지 위한 가난한 이들이 그 탈출구로 아편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그 속에서 중국 경제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농업이 붕괴되고 농민들은 대거 도시로 몰려들었다. 차별과 멸시를 받더라도 서양인들이 지배하는 조계지가 더 나은 삶을 보장해 줄 수 있는 현실은 정부의 존재 이유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했다. 

중국인들은 국. 내외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한 청나라 조정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하늘과 같은 황제에 대한 권위 역시 땅에 떨어졌다. 이는 중국의 역사와 함께 군주제를 뒤흔들었다. 1911년 청나라 왕조를 타도하려는 신해혁명이 일어났고 1912년 청나라 왕조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며 중국은 자체적인 근대화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청나라 말기 혼란기 속에서 각 지역에서 군사력을 바탕으로 지배권을 행사하는 군벌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중앙 정부의 통제권이 크게 약해졌다. 마치 과거 영주들이 각 지역을 지배하는 봉건제와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사회 혼란은 여전했고 국민들의 삶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런 현실을 개선하려는 지식인들의 움직임이 상해 조계지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서양이 지배하는 조계지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상대적으로 잘 유지됐기 때문이었다. 1921년 7월 중국 공산당이 창립된 곳도 상해였다.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그 근거지가 상해였다. 상해는 일제 강점기 중요한 해외 독립운동의 장소였다. 

이렇게 다양성이 공존하는 상해는 중국에 국민당 정부가 들어서며 중국 현대화를 이끄는 곳으로 변모했다. 상해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유행이 먼저 유입되는 곳이었고 새로운 번영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 번영은 오래가지 못했다.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의 국공 내전이 지속됐고 일제의 중국 침략과 중. 일 전쟁이 시작되면서 중국 전역은 거대한 전쟁터가 됐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이었던 상해도 전쟁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중. 일 전쟁 기간 일본은 중국의 조계지를 포함해 상해를 점령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인근의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난징에서는 참혹한 학살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이후에도 상해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 못했다. 일본이 물러난 이후 다시 본격화화된 국민당 정부의 공산당의 국. 공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국민당 정부는 중국 본토에서 밀려 대만으로 향했고 중국에는 공산당 일당 독재의 사회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됐다. 이 체제는 대외 교류가 극히 제한됐고 서구 국가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일명 죽의 장막이라 불리는 대외 폐쇄 정책이 지속됐다. 이는 국제도시 상해의 몰락을 불러왔다. 상해를 중심으로 중국에 진출했던 서구 국가의 기업들과 대부분 외국인들도 중극을 벗어나야 했다. 이후 상해는 동아시아 금융, 상업 중심지의 역할을 상실했다. 

 

 

상해 야경

 



이런 상해가 다시 국제 사회로 등장한 건 1970년 대 후반부터 중국을 통치한 덩샤오핑의 집권 시기였다. 덩샤오핑은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도입하고 미국을 포함한 서구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과감히 시도하는 개혁, 개방 정책을 통해 중국의 죽의 장막을 걷어내고, 중국을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큰 영향력을 가진 나라로 변모시켰다. 

그리고 상해는 중국, 개혁. 개방 정책의 중심지로 다시 한번 발전했다. 다수의 외국 기업들이 상해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고 중국 경제의 중심지로 그 입지를 다시 다졌다. 지금은 세계 경제에서도 상해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 상해는 서양인들의 조계지가 아닌 중국의 번영과 발전의 상징으로 우뚝 섰다. 하지만 그 발전의 역사 속에는 침탈과 수많은 전쟁의 역사가 함께 하고 있다. 분명 중국에는 아픈 역사였다.

1840년 아편 전쟁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인 수립된 1949년까지 100여 년의 기간을 중국에는 현대사의 암흑기로 보는 경향이 있다. 실제 그 시기 중국은 수많은 침략과 수탈을 당했고 엄청난 인명이 희생됐다. 그 시기를 거쳐 중국은 미국과 함께 초강대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중국은 아픔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보다는 다시 힘으로 동아시아, 세계 패권을 차지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그들을 몰락하게 했던 중국 중심의 중화주의에 근거한 것으로 구 시대적 사고다. 힘에 의한 통치와 관계는 큰 반발을 불러오고 궁극적으로 그 나라의 지속적인 번영과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 상해의 역사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지금 상해의 발전은 다른 나라와의 자유로운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자국 이기주의가 국제 질서를 지배한다고 하지만, 더불어 살지 않은 나라는 지속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중국 역시 이 점을 항상 고려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상해가 편협한 세계관에 갇힌 중국의 상징이 아닌 진정한 국제도시로 계속 지속하길 기대해 본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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