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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음악 장르가 공존하는 21세기, 그 음악들은 서로 융합하고 창조되며 장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기도 하고 시대 흐름에 맞게 변형되어 대중들과 함께 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넘어 전 세계에서 사랑받고 있는 우리 대중가요 K팝은 이런 장르 파괴와 조화 이를 통한 보편성 확보가 큰 장점이다. 

이런 음악 장르 중 재즈와 힙합은 그 발전사에 있어 독특함이 있다. 재즈와 힙합은 미국 사회의 비주류 계층인 흑인 사회에서 발생되어 발전했고 이제는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통용되는 주류 음악이 됐다. 이제 재즈와 힙합을 두고 흑인들의 음악이라는 사람들은 없다. 누구나 인정하는 음악의 장르이고 이 음악들은 우리나라 대중 음악사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줬다. 

재즈와 힙합의 발전사에는 당시 시대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재즈는 미국 남부 멕시코만과 접하고 있는 오래된 항구 도시 뉴올리언스에서 그 역사를 시작했다. 뉴올리언스는 18세기 프랑스 영토였다. 연중 온화한 기후와 비옥한 토지는 농사에 적합했고 다양한 인종들과 문물이 교류하는 무역항이기도 했다. 물론, 그 속에서 흑인 노예무역의 아픈 역사가 함께 하고 있다. 

뉴올리언스는 노예로 이주한 흑인들과 프랑스와 영국 등 서양의 문화가 함께 하는 다양성이 공존하는 곳이었다.그 속에서 흑인들은 농장에서 일하면서 고단한 노동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그들만의 노동요를 만들었다. 아프리카 토속 음악에 서양의 음악 영향을 받은 블루스 음악이 탄생했다. 기독교에 귀의한 흑인들은 교회에서 찬송가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가스펠 음악을 만들어 불렀다. 이는 재즈 음악의 기반이 됐다. 

 

 

 



재즈라는 음악을 새로운 장르로 만든 이들은 뉴올리온스뉴올리언스 지역에서 백인과 흑인의 혼혈 인종인 크레올들이었다. 그들은 프랑스가 그 지역을 지배하던 당시 백인들에 준하는 지위와 권리를 인정받았다. 고등교육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가 뉴올리언스를 포함한 미국 내 점령지역인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하면서 크레올들의 삶도 변화를 맞이했다. 

프랑스는 매각 당시 미국에 크레올의 지위와 권리를 유지해 줄 것으로 조건으로 제시했다. 초기 크레올들은 기존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었지만, 노예제도가 유지되고 흑인들에 대한 차별이 극심한 남부 지역에 속한 뉴올이언스 지역의 크레올 역시 유색인종으로 분류되면서 그 지위가 크게 흔들렸다.

미국 남.북 전쟁이 노예해방을 주장하는 북부의 승리로 끝났지만, 미국 남부 지역의 유색인종 차별은 여전히 극심했다. 미국 남부주들은 노골적인 인종 불리 정책과 차별 정책을 시행했고 그 정책은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당연힌 크레올들의 사회적 지위로 크게 하락했다. 그들은 백인들과 함께 살 수 없었고 그들의 주거지는 흑인들이 주로 사는 빈민지역으로 제한됐다. 이는 크레올들의 만든 음악과 흑인들의 음악이 결합되는 계기가 됐다.

대부분의 흑인들과 달리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든 크레올들은 그들의 음악을 체계화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흑인들과 함께 하면서 습득한 흑인들의 블루스, 가스펠 음악을 그들의 음악에 더했고 재즈라는 음악을 만들었다. 이 재즈는 뉴올리언스의 대표적인 유흥가였던 스토리빌 지역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다양한 음악의 융합된 결과물인 재즈는 인종에 상관없이 주목을 받았다. 재즈를 매개로 스토리빌은 다양한 인종이 함께 음악과 유흥을 즐기는 해방구가 됐다. 재즈를 즐기는데 인종의 구분과 차별은 없었다. 

그 사이 재즈 음악계에서는 미국 대중음악의 전설이라 할 수 있는 루이 암스트롱이라는 재즈 음악가가 등장했다. 그는 친근한 인상에 새로운 재즈 창법을 만들었고 재즈를 보다 대중화하고 발전시켰다. 지금도 재즈 음악을 말할 때 루이 암스트롱은 항상 언급되는 인물이다. 이런 스타의 등장은 재즈를 더 대중과 가깝게 했다. 

 

 

루이 암스트롱

 



하지만 뉴올리언스를 중심으로 발전하던 재즈 음악은 다시 큰 변화에 직면했다. 재즈의 중심지였던 뉴올리언스 항구가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미국이 참전이 이어지면서 군사항으로 활용되기 시작했고 그 지역의 대중음악 활동도 제한됐다. 이는 재즈 뮤지션들의 무대를 사라지게 했다. 뮤지션들은 새로운 무대가 필요했고 그들의 향한 곳은 당시 미국에서 떠오르는 신흥 도시 시카고였다. 

1920년대 시카고는 최고의 호황기를 누리던 미국 경제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돈이 넘쳐나는 도시의 밤은 화려했고 재즈 음악은 그 밤을 더 멋지게 만들어주는 매개체였다. 시카고는 어느 새 재즈 음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됐다. 고비도 있었다. 1929년부터 시작한 경제 대공황은 미국 사회 전반을 침체하게 했고 대중음악 역시 크게 위축됐다. 이후 루스벨트 정권이 들어서고 대공항이 극복되고 제2차 세계대전 승전을 거치며 미국 경제는 다시 부흥기로 접어들었다. 여기에 오랜 기간 유지되면 금주법이 폐지되면서 유흥문화가 다시 활력을 얻었다. 

사회 전반에 낙관적 분위기가 커졌고 대중음악에서 반영됐다. 재즈 역시 빠르고 비트있는 장르인 스윙이 등장하면서 다양성을 더했다. 여기에 백인 재즈 음악가들이 늘어나고 재즈 음악이 영화에 삽입되며 재즈의 대중화가 가속화됐다. 뮤지컬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에 삽입된 주제곡 'sing in the rain'은 지금도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재즈 영화음악이다. 

이렇게 미국에서 그 입지를 다진 재즈는 이후 세계화의 길을 걸었다. 그 중심에는 재즈의 전설 루이 암스트롱이 있었다. 그는 미국 정부의 지원 속에 세계 각국을 다니며 재즈 공연을 했다. 1963년 4월에는 내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재즈는 전 세계에 그 존재감을 알렸고 미국의 이미지 재고에도 긍정적이었다.

 

 

 



루이 암스트롱은 비틀즈가 지배하던 1960년대 팝 시장에서 62세의 나이에 1964년 미국 최고 권위의 팜 차트인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하는 등 재즈를 대표하는 뮤지션으로 활약했다. 그는 1967년에는 베트남 전쟁의 참상과 아픔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곡 'what a wonderful world'를 발표하며 반전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이렇게 미국 주류 음악으로 자리한 재즈는 1987년에는 미국 의회에서 미국의 국보로 지정되는 등 음악 장르 이상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재즈는 미국을 대표하는 음악 장르이자 미국 문화의 한 부분으로 지금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재즈와 더불어 1970년대 미국 뉴욕에서는 새로운 흑인 음악이 새롭게 나타났다. 뉴욕의 대표적인 빈민가인 브룽크스가 그 무대였다. 이 지역은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 경제 중심지 맨해튼 북쪽 지역으로 애처 백인들의 거주지였지만, 뉴욕시가 확대되고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 소외되면서 슬럼화됐다. 악화된 주거 환경에 백인들이 떠나고 브룽크스 지역은 가난한 흑인들과 히스패닉계들의 거주지로 변모했다. 

이 지역은 여러 강력 범죄와 방화 등 빈번하게 발생했고 범죄 집단들이 지배하는 뉴욕시의 대표적 우범지대가 됐다. 브롱크스 지역에 사는 이들은 매일 위험 속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1970년대 초반 지역의 범죄 조직 간 평화협정이 맺어졌다. 이들은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을 극복하고 지역의 평화를 함께 지켜가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지역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놀이 문화가 등장했다. 

힙합이라는 새로운 문화의 시작이었다. 힙합은 곡의 리듬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DJ의 디제잉과 강렬한 비트의 음악, 비보이로 불리는 댄서들, 도시의 벽을 캔버스 삼아 강렬한 그림을 그리는 그라비트 등으로 요약된다. 그 속에는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과 저항의식이 깔려 있었다. 여기에 말을 하 듯 음악을 하는 랩이 더해져 새로운 음악 장르로 발전했다. 

 

 

 



1970년 대 말 그 음악에 힙합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힙합은 대중화의 길을 걸었다. 힙합의 사회 부조리, 인종차별에 대한 비판 메시지는 강렬한 가사로 전달됐고 점차 흑인들을 중심으로 큰 반응을 얻었다. 1980년 초반 등장한 뮤직비디오 전문 채널의 등장은 힙합의 발전에 날개를 달게 했다. 힙합은 단순한 음악이 아닌 문화의 한 형태였고 이전 음악과 달리 매우 동적이고 독특한 퍼포먼스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힙합 음악이 24시간 뮤직비디오를 방영하는 음악 방송 전파에 실려 대중들에게 알려지면서 힙합의 인기는 급격히 상승했다. 

이에 힙합은 특유의 비트 가득한 음악뿐만 아니라 힙합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패션까지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고 하나의 사회 현상이 됐다. 힙합은 미국을 벗어나 전 세계에 청년들의 새로운 문화 사조가 됐다. 그 음악과 문화는 1990년 대 초반 한국의 1세대 아이돌 들의 중요한 컨셉 중 하나였다. 

이렇게 힙합이 대중성을 가지게 되면서 힙합은 힙합이 탄생한 뉴욕을 중심으로 한 동부지역에 맞서 로스엔젤레스 등 미국 서부 대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서부 지역의 힙합이 등장하면서 강력한 라이벌 구도가 형성됐다. 서부지역의 힙합은 더 직설적이고 강렬한 가사로 주목받았다. 서부 힙합은 흑인인 물론이고 빈곤층에 속하는 백인들에게 호응을 얻어 그 세력을 확대했다. 

이런 동.서부 힙합의 라이벌 구도는 양측에 유혈 충돌을 불러오며 지나치게 가열됐다. 그 과정에서 동. 서부 힙합을 대표하는 뮤지션들이 상대 팬들에게 살해당하는 비극도 있었다. 무분별한 팬심과 상대에 대한 혐오가 불러온 사건이었다. 이는 사회 부조리와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힙합 정신에 배치되는 일이었다. 이와 함께 힙합의 강렬한 메시자와 퍼포먼스는 그 음악과 공연에 대한 검열과 콘텐츠 접근에 대한 제한을 불러오기도 했다. 이는 오히려 힙합에 대한 청년들의 관심을 더 증폭시키는 역설을 불러왔다. 

 

 

 



이런 힙합에 있어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은 백인 랩퍼 애미넘의 등장이었다. 쇠락한 디트로이트 공업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흑인들의 전유물이었던 힙합에 도전장을 던진 백인이었고 그 속에서 성공해 대표적인 힙합 뮤지션이 됐다. 애초 그는 흑인 뮤지션들의 큰 견제를 받았지만, 그의 성장 배경과 음악적 재능이 인정받으면서 오히려 힙합을 더 대중화시키는 촉매제가 됐다. 재즈와 마찬가지로 백인 뮤지션의 등장은 흑인들의 음악은 모두의 음악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재즈와 힙합은 가난하고 소외받고 차별받는 이들의 음악이었다. 재즈에는 흑인들의 한과 아픔의 정서가 담겨있고 힙합에는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흑인들의 분노가 담겨있다. 이에 재즈와 힙합은 비주류의 음악이었지만, 그 메시지는 점점 대중의 공감을 얻었다. 부조리와 불평등은 인종을 떠나 양극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사회 속에서 일부의 문제가 아닌 다수의 문제가 됐기 때문이었다. 

이제 재즈와 힙합에 대한 흑인 음악이라는 한계점을 부여하는 목소리는 거의 없다. 여전히 흑인들과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멸시는 남아있지만, 그 문제 해결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사회적 약자였던 흑인들과 유색인종들의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면서 그 차별의 정도도 점점 약화되고 있다.

특히, 대중음악이나 문화에서 그 차별의 벽은 크게 옅어졌다. K팝의 전세계적 유행은 시시하는 바가 크다. 그 점에서 재즈와 힙합의 발전사는 문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문화가 대중음악에 미치는 영향을 살피는 데 있어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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