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이베리아반도 대부분을 차지하는 유럽의 대국 스페인은 이슬람과 기독교 문화 전통이 융합한 독특한 문화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지중해와 대서양을 접하는 기후적 특징에서 오는 멋진 자연 경관 등이 더해져 스페인은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이들이 찾는 관광대국이기도 하다. 또한, 대표적인 농업 생산국으로도 유명하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전 세계 최고 프로 축구 리그인 라리가 리그가 유명하다.
한편에서 스페인은 현대사에 남은 최악의 내전을 치른 아픈 역사가 함께 하고 있다. 1936년부터 1939년 사이 일어난 스페인 내전은 수십만 명의 인명피해와 함께 스페인 전역을 초토화시켰다. 그 후유증은 상당 기간 스페인의 발전에 큰 부담이 됐다. 또한, 스페인 내전 이후 수십 년간 지속된 독재 정치는 스페인의 민주주의, 사회 발전을 뒤처지게 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됐다.
스페인 내전은 한때 전 세계 최강국이었던 스페인 제국의 쇠퇴와 그 이후 정치, 사회적 혼란이 그 배경에 있다. 15세기부터 본격화된 대항해시대, 유럽 각국은 지중해에 국한된 그들의 대외 영역을 대서양과 태평양 등으로 확대했다. 새로운 항로가 개척되고 아메리카 대륙 등이 발견되고 식민지가 급속히 늘어났다. 이를 바탕으로 쌓은 부와 국력으로 유럽은 변화하는 세계 질서 속에서 그들이 아시아를 능가해 주도권을 잡도록 했다.
그런 대항해 시대의 선두 주자 중 하나가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콜럼버스의 아메이라 대륙 발전 이후 아메리카 거의 전 지역을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었고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창출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유럽의 강대국이 된 스페인을 상징했다. 스페인은 18세기까지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으로 군림했다. 또한, 가톨릭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대표적인 가톨릭 국가가 됐다. 이를 통해 스페인은 로마 교황청의 강력한 지지를 이끌어냈고 이는 강력한 왕권의 기초가 됐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지나친 경직성은 변화하는 세계 질서 속에서 스페인을 소외시켰다. 다양한 문화, 종교가 공존하고 융합하면서 그 다양성 속에서 국가 발전의 새로운 동력을 만들어내는 여타 유럽 국가와 달리 스페인은 교회가 사회 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제 군주적 봉건제 체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그들의 발전을 더디게 했다. 스페인은 점점 대외 식민지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했고 그의 부의 원천이었던 아메리카 대륙 등의 식민지 국가들이 잇따라 독립했다. 이에 스페인의 대외 영향력 또한 축소됐다. 19세기 들어 스페인은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등 신흥 강국이 유럽의 질서를 주도하는 변화 속에서 이베리아반도로 그 영역이 줄었다.
제국의 쇠퇴와 약해진 국력은 경제를 함께 어렵게 했다. 후진적인 정치, 사회 시스템의 문제점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스페인은 경제적 부의 불평등과 편중 현상이 극심했다. 근대 사회로 접어든 시점에도 가톨릭교회는 스페인 토지의 상당 부분을 점유했고 소수의 귀족, 자본가 들이 국가의 부를 독점했다. 이른 부의 불균형은 필연적으로 국민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이는 국민들의 민주 공화정 수립에 대한 강렬한 요구로 이어졌다.
이는 스페인의 군주제를 폐지하게 했다. 1873년 스페인에는 제1공화국이 수립됐다. 하지만 제1공화국은 사회 시스템의 개혁과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사회적 갈등이 커졌다. 이에 군부가 주도하는 쿠데타로 헌정이 중단되면서 군부독재체제가 들어서기도 했다. 이후에도 스페인은 극심한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고 공화정이 입헌군주제로 다시 군부 독재로 변화하는 등 격변기를 거쳐야 했다.
이런 혼란기에 나라를 이끌었던 알폰소 13세의 부족한 리더십은 스페인을 더 큰 혼란 속으로 빠져들도록 했다. 정치적 혼란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 스페인 독감, 경제 대공황의 대외 변수들이 국가를 위기로 몰아갔지만, 알폰소 13세는 위기를 극복하고 관리할 능력이 없었다. 오히려 축구와 영화 제작 등 자신의 취미 생활에 열중하는 등 국가 경영에는 큰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이뿐만 아니라 군부의 쿠데타와 독재를 묵인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지도자의 무능과 무기력은 공화정에 대한 국민들의 의지를 더 높였다.
국민적 저항과 공화정에 대한 요구는 스페인의 왕정을 다시 폐지하고 제2공화정을 열게 했다.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실현된 결과였지만, 스페인 제2공화국 역시 정치, 사회의 불안을 해결하지 못했다. 부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경제개혁은 스페인 부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교회, 자본가, 왕정 복구 세력, 군부 등 기득권 세력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사이 사회 개혁에 적극적인 좌파 세력과 그에 반대하는 우파 세력이 각각 정권을 잡으며 반목했다.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한 정치적 합의가 도출되지 못하고 양측에서 극단주의 세력들이 더 힘을 얻으며 양 정치 세력 간 갈등이 커졌다.
1936년 집권한 좌파 정권은 이전과 달리 더 과감한 경제,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지지부진하던 토지개혁을 시행하고 지역의 자치권 확대와 보통선거 시행 등 개혁 조치를 시행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기득권 세력의 반발이 커졌고 군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전개됐다. 당시 스페인 정부는 이런 군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군 내부의 우파 세력을 축출하는 등 조치를 치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과격파에 의해 반대 세력에 대한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대응이 이루어진 게 문제였다. 우파의 대표적 정치인의 암살 사건은 우파 세력의 결집과 반발을 촉진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군사 쿠데타의 중요한 빌미가 됐다.
세를 규합한 군부 세력은 훗날 36년간의 장기 독재를 했던 프랑코 장군을 중심으로 당시 식민지였던 모로코를 시작으로 각지에서 군사행동에 들어갔다. 하지만 주력 부대가 있는 모로코에서 본토가 상륙하는 일이 문제였다. 주력군이 상륙하지 못한다면 반란군의 기세가 꺾일 수 있었다. 이런 반란군에 손을 내밀어 준 나라가 있었다. 극우 파시즘 정당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독일과 이탈리아였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집권하고 있는 독일과 파시즘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무솔리니가 지배하고 있던 이탈리아는 파시즘 세력의 확산과 이권 확보를 위해 반란군을 적극 지원했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주의 좌파 세력이 중심이 된 스페인 정부의 전복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후 막대한 보상금을 부담하고 무장 해제가 이루어졌던 독일은 1930년대 중반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유대인에 대한 혐오 등을 기치로 내건 히틀러의 나치당 집권 이후 군비를 증강하고 전쟁국가로 재 무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연합국 들의 눈을 피해 독일은 각종 신무기를 개발하고 양산하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은 그들의 신무기와 그 신무기를 활용할 수 있는 전술을 시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는 스페인 내전을 더 큰 비극 속으로 빠뜨리는 또 다른 원인이 됐다.
우선, 독일은 그들의 공군 전력을 활용해 모로코에 있는 반란군 주력 부대를 스페인 본토로 상륙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여기에 각종 신무기와 장비, 탄약 등 군사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그에 더해 공군 지원에 집중했던 독일과 달리 대규모 육군 병력을 지원하며 반란군에 힘을 실어줬다.
이런 나치즘 국가들의 지원 속에 반란군은 빠르게 스페인 영토를 장악해 나갔다. 반란군의 기세는 수도 마드리드를 압박하며 공화정의 붕괴를 가속화했다. 이에 대응한 정부군은 무기력했다. 절대적인 군사력이 열세였고 각종 무기가 장비도 턱없이 부족했다. 주변 나라들의 지원도 없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의 강국들은 합법적인 정부를 전복하려는 파시즘 국가의 지원을 받는 스페인 반란군에 대한 반대 여론이 강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큰 아픔을 겪은 이후 유럽은 또 다른 세계대전의 발발 가능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유럽 각국은 중립 노선을 유지했다. 이는 정부군에게 또 다른 악재였다. 심지어 무기나 장비 등의 구매조차 어려워지면서 내전의 전황은 정부군에서 불리하게 전개됐다.
이 상황에서 공화정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스페인 내부에서 강하게 일어났다. 노동조합 등 좌파 세력들은 그들의 조직력을 활용해 세를 모았고 의용군을 조직해 반란군에 대응했다. 화력에서 절대 열세에 있었지만, 극우 세력들이 주축을 이루는 반란군을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와 그에 따른 강렬한 의지와 열정은 불리함을 극복하는 에너지가 됐다.
여기에 유럽을 포함해 세계 각지에서 파시즘 세력의 확산을 막으려는 이들이 정부군을 지원하면서 내전의 흐름이 달라졌다. 국적을 불문하고 반란군에 맞서려는 의용군이 모여들었고 이들에 의해 국제 여단이 조직됐다. 국제 여단은 밀리던 정부군에 큰 힘이 됐다. 이런 국제 여단에는 많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도 함께 했다.
세계적인 소설가 헤밍웨이는 이 내전에 종군기자로 참전했고 훗날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했다. 지금도 나이를 불문하고 많은 이들이 읽는 '어린 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도 이 내전에 참전했고 소설 '동물농장'의 작가인 조지 오웰은 전투병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이들의 참전과 그들에 의해 알려진 내전의 참상은 세계인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왔다. 또한, 공화정을 지키려는 스페인 정부군에 대한 동정과 지지 여론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여기에 상황을 관망하던 스탈린이 지배하던 소련이 정부군을 적극 지원하면서 정부군에게 부족한 무기와 각종 장비 등이 보강됐다. 하지만 소련 역시 자신의 국익을 고려한 참전이었다. 소련은 그들과 큰 대척점에 있던 파시즘 국가들의 세력 확산을 경계했다. 또 한편으로 그들 역시 군비 증강을 위해 개발하고 있는 각종 신무기들의 시험장으로 스페인 내전을 활용했다.
이렇게 독재자가 지배하는 유럽 국가들이 개입하면서 스페인 내전은 복잡한 국제전 양상을 보였다. 양측의 전력도 다시 팽팽해졌다. 물론, 다른 나라의 내전 개입은 스페인의 각종 이권과 국부 손실로 이어졌다. 독일은 지원의 대가로 스페인의 각종 광산의 채굴권을 약속받았고 소련은 스페인의 금을 대가로 챙겼다. 국제 관계에서 공짜가 없음을 그대로 보여준 스페인 내전이었다.
치열한 양측의 공방은 전쟁을 더 참혹하게 했다. 이전에 없었던 강력한 살상 무기가 전장에 사용되면서 인명과 재산 피해가 크게 늘 수밖에 없었다. 또한, 반대파를 향상 학살이 곳곳에서 자행됐다. 일부 과격파에 의한 학살은 양측 지도부가 묵인하면서 학살은 한층 더 잔인하고 폭력적이 됐다.
특히, 반란군의 점령지에서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학살이 쉼 없이 이어졌다. 이에 수십만 명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를수록 정부군에 가담한 의용군들의 전투에 대한 의지는 더 강하게 불타올랐다. 정부군은 부족한 화력을 각종 사제 무기와 강한 의지로 극복하며 반란군의 진격을 막았다. 이에 한때 함락 위기에 몰렸던 수도 마드리드가 지켜질 수 있었다.
이렇게 세력 확산에 제동이 걸리고 마드리드 함락이 실패한 반란군은 공화정에 우호적이었던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역 공략에 나섰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스페인 내전의 가장 큰 비극이 발생했다. 반란군은 북부 지역의 작은 마을인 게르니카를 공격하기로 했고 독일 신형 전투기가 주력을 이루는 대규모 폭격을 했다. 독일 전투기들의 폭격은 이전 폭격과 달리 지역을 초토화하는 융단 폭격이었다. 독일군은 이 과정에서 그들의 신형 무기와 대형 화재를 발생하는 소이탄을 무차별로 사용했다.
스페인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에는 무려 30여 톤의 폭탄이 일시에 쏟아졌고 마을은 생지옥으로 변했다. 게르니카 마을을 완전히 폐허가 됐고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게르니카의 비극은 스페인의 유명 화가였던 피카소에게 큰 분노와 함께 창작의 소재가 됐다. 피카소는 게르니카의 참상을 한 폭의 그림에 표현한 작품 게르니카를 발표해 전 세계 많은 이들에게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반전의 메시지를 전했다. 게르니카는 이후에도 반전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중요한 상징으로 보이고 활용되고 있다.
이렇게 스페인 북부 지역을 장악한 반란군은 경제의 거점이자 정부군의 요충지인 바르셀로나가 있는 카탈루냐 지역 공략에 나섰다. 이 지역은 공화정 정부 인사들이 있었고 정부군의 중요한 지지 기반인 노조 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이었다. 이 지역을 차지한다면 반란군은 내전의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이에 정부군은 필사적으로 맞섰지만, 독일의 최신 전투기가 무기를 앞세운 반란군의 공세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정부군 내부의 반복과 분열, 지도부의 무능도 전쟁을 어렵게 했다. 결국, 1939년 1월 반란군이 바르셀로나는 점령하면서 공화정 세력은 마드리드와 그 일대로 세력이 축소됐다.
기울어진 전세에 정부 인사들이 프랑스 등지로 망명하고 공화정 세력 내에서도 분열이 일어나면서 정부군은 저항의 힘을 잃었다. 정부군의 항복과 함께 1939년 3월 프랑코가 이끄는 반란군이 마드리드에 입성하면서 내전은 종결됐다.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세워진 정부를 전복한 반란군 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던 유럽 각국 역시 프랑코의 반란군 세력을 스페인의 합법적 정부로 인정했다. 스페인 내전은 성공한 반란으로 종결됐다.
스페인 내전 이후 스페인은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파시즘의 대표하는 국가로 자리했다. 결국 그 연합은 전 세계를 제2차 세계대전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최악의 비극이었다. 스페인 내전 당시 파시즘 세력의 확장을 막아냈다면 인류의 역사는 달라질 수 있었다. 스페인 내전은 스페인의 비극이기도 했고 전 세계 더 큰 비극의 시작점이었다.
내전으로 스페인은 많은 이들이 희생되고 나라 전체가 크게 파괴되고 성장 기반을 잃었다. 여기에 프랑코가 총통에 오르며 종신 집권 체제를 열며 스페인은 긴 독재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기간 프랑코 정권은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했다. 내전 이후에도 사회주의 세력들이 국가 폭력에 희생됐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페인 국민들이 탄압을 피해 이웃 프랑스를 비롯해 세계 각지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프랑코 독재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강력히 저항하며서 무력 충돌이 지속되기도 했다.
장기간의 독재로 스페인은 인권이 후퇴하고 각종 사상 표현의 자유도 통제받았다. 반대파들에 대한 공권력에 의한 체포와 구금, 고문과 학살이 이어졌다. 가장 충격적인 일은 사회주의, 좌파 인사들의 신생아를 포함한 유아들을 납치해 살해하거나 강제 입양하는 일이 장기간 이어졌다. 그 수는 수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특히, 이런 비 인륜적인 범죄에 가톨릭교회까지 가담하면서 스페인 사회에 충격을 더했다.
이렇게 내전 이후 프랑코가 사망한 1975년까지 지속된 독재 시간 스페인은 국제 사회에서 크게 소외되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해서는 독일과 이탈리아 협력한 전력이 문제가 됐다. 직접 지원에 소극적이었고 전쟁 막바지 중립으로 돌아서며 나라가 전쟁터가 되는 상황은 막았지만, 전범 국가에 준하는 시선을 받아야 했다.이에 유럽 연합의 일원으로 쉽게 인정받을 수 없었다. 스페인은 1986년에 가서야 유럽연합에 가입할 수 있었다.
또한, 스페인의 민주주의는 1975년 프랑코가 세상을 떠나고 입헌 민주주의 국가로 국가 체제를 바꾼 후 전 국민의 보통 선거가 이루어질 정도로 그 발전이 크게 더디게 진행되고 말았다. 그 사이 스페인은 공산주의 세력 확산을 막으려는 미국의 대외 정책에 적극 협조하며 미군이 주둔하고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1960년대 이후 경제 발전을 이루는 성과도 있었지만, 회복되지 못하는 민주주의는 그들의 선진국 반열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가 됐다. 스페인이 넓은 영토에 삼면이 바다로 대외 진출에 유리한 환경과 농업에 유리한 입지, 많은 인적 자원 등 어려가리고 성장 잠재력이 풍부함에도 사회, 경제이 더딘데는 정치의 후진성이 큰 요인이 됐다.
그런 시련과 아픔을 이겨내고 스페인은 최근 다당제 의회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고 명실 상부가 민주주의 국가 선진국으로 자리할 수 있게 됐다. 그 과정에서 프랑코 독재 시절을 포함해 국가에 의해 자행된 범죄의 진상을 파악하고 단죄하는 등의 조치도 이루어졌다. 또한, 스페인 내전을 규정함에 있어 정치적 성향에 따른 선악의 구분이 아닌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역사의 비극으로 규정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실제 스페인 내전은 사회적 갈등 속에 극단주의가 힘을 얻으면서 상대에 대한 증오와 혐오, 비이성이 나라를 지배하면서 발생한 비극이었다. 하지만 그에 따른 피해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짊어져야 했다. 어떤 이념과 사상과 철학도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 인권 위에 설 수 없어야 하지만, 스페인 내전의 시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는 모든 전쟁에도 적용될 수 있는 일이다. 이는 모든 전쟁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전쟁은 인류의 역사에서 끊이지 않았고 힘만이 지배하는 가장 야만적인 행위다. 그런 전쟁은 인간성을 말살하고 보통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전쟁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다. 같은 국민끼리 민족끼리 죽고 죽이는 내전은 그 비극의 정도가 더 크다. 우리 역시 그런 비극을 경험했지만, 그 비극은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스페인은 내전을 통해 긴 세월이 흘렀지만, 교훈을 얻고 나라를 새롭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전 세계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전쟁은 누구에게도 이익이 될 수 없고 이해관계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앞으로 일류 역사에서 전쟁이 현실이 아닌 과거의 역사로만 기억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사진 : 프로그램 / 위키백과,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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