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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이 그들의 평화헌법을 무력화하고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헌법 개정의 문제가 있지만, 일본은 이미 군사대국이고 미국과의 안보동맹을 고리로 대외 군사활동에 사실상 나서고 있다. 미국은 대중국 견제를 위해 일본의 군사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고 일본의 전쟁국가 전환을 묵인하는 모습이다. 이에 아시아 국가들의 우려가 크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한. 미. 일 군사동맹에 적극 참여하면서 일본의 형태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유사시 일본군의 한반도 진입을 가능하게 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미국과 중국의 군사 충돌에 우리 군과 일본군이 함께 해야 함을 의미한다. 일본의 최근 움직임에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이유다.

일본이 그들의 주장대로 보통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배상, 재발방지 약속이 전제돼야 하지만, 일본은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를 왜곡하는 등 과거사 문제 해결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 반성하지 않는다는 건 그와 같은 일이 또다시 발생할 가능성을 높일 수밖에 없다. 

일본은 중. 일 전쟁을 시작으로 태평양 전쟁까지 아시아 태평양 일대를 전쟁의 비극 속으로 몰아넣은 원죄가 있다. 일본은 전쟁범죄 국가, 전범국이다. 그들의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일본은 한편에서 두 차례 원폭으로 인한 피해국임을 강조하며 그들의 잘못을 희석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원폭은 그들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전세가 기울었을 때 항복을 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그보다는 그들의 전쟁범죄에 대한 사과와 반성이 우선되어야 한다. 

 

 

재판소 사진

 



이렇게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 고압적인 자세로 나오는 중요한 배경에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열렸던 극동국제군사재판, 도쿄 전범재판이 있다. 전범재판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뉘른베르크와 도쿄에서 열렸다. 이 재판은 전쟁 발발의 책임이 있는 전범들을 단죄한 역사적 재판이었다. 이를 위해 연합국들은 다국적 재판부를 구성했고 장기간의 변론을 통해 전쟁범죄의 실상을 알리고 단죄의 과정을 역사에 남겼다. 

분명 의미 있는 재판이었지만, 도쿄 전범재판은 그 시작보다 과정, 결과에 이르기까지 아쉬움이 많았다. 전쟁에 책임이 있는 상당수 인사들이 심판대에 오르지 않았고 기소된 전범 중 상당수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처벌을 받았던 이들은 소수였고 그마저도 그 형기를 다 채우지 않고 가석방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전쟁범죄의 단죄라는 취지가 무색한 결과였다. 

도쿄전범재판의 근거는 연합국이 합의하여 공포한 포츠담 선언의 철저한 이행을 일본의 항복문서에 있다. 패망 후 일본은 1945년 9월 2일 미군의 군함 미주리호에서 정부 대표단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포츠담 선언에는 제10조에 전쟁범죄자에 대한 처벌을 명시하고 있다. 

포츠담 선언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45년 7월 미국과 영국, 중화민국이 서명하여 발표됐다. 이 선언은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공인한 카이로 선언의 이행을 강조했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군국주의 배제,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함께 군수산업의 금지, 일본의 영토 한정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피고인석

 



이는 일본 평화헌법의 근간이 됐다. 일본은 연합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두 차례 원폭을 당한 이후에서야 항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일왕이 발표한 항복 선언문에는 항복이라는 표현이 없고 포츠담선언의 이행이라는 표현을 했다. 어쩌면 일본은 끝까지 그들의 패전을 인정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문제는 포츠담 선언에서 전쟁범죄자에 대한 처벌을 명시하긴 했지만, 그 대상과 범위가 축소됐다는 점이었다. 연합국들은 전쟁범죄 중 포로들에 대한 학대와 학살에 주목했다. 실제 일본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 포로들에 대한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학대를 자행했다. 그 과정에서 상당수 연합국 포로들이 질병이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이는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에 큰 분노를 불러왔다. 

하지만 일본군의 만행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군은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중국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을 지속적을 저질렀다. 대표적인 사건이 난징대학살이었다. 일본군은 중화민국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중국 군인들은 물론이고 민간인도 무차별 학살했다. 그 참상은 전 세계에 큰 공분을 불러왔다. 일본군은 상부의 묵인하에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고 일부 군인들은 이를 즐기기까지 했다. 심지어 일본 내에서 이런 학살극에 동조하는 언론의 보도가 있었고 이에 동조하거나 심지어 응원하는 모습도 있었다. 중국 외에도 일본군은 점령지에서 민간인 학살과 여성들에 대한 성범죄를 일으켰다.

문제는 이런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우리 한국인과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의 피해가 제대로 인정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난징대학살의 경우 당시 학살이 일어났던 난징 지역에 다수의 서양인들이 있었고 그들이 증인이 되어 이를 입증할 수 있었지만,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일본의 반인권적 범죄에 대해서는 전범 재판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가장 큰 피해국이었던 한국으로서는 아쉬움이 큰일이었다. 연합국들은 전범재판에서 자국의 피해에 집중했고 일본의 광범위한 전쟁범죄 단죄에는 소극적이었다. 

 

 

재판관석

 



시작부터 한계점이 있었던 도쿄 전범재판은 일본 점령군의 총책임자로 부임한 맥아더를 중심으로 그 과정이 진행됐다. 맥아더는 1946년 1월 19일 극동국제군사재판소 특별 포고문을 발표하고 관련 조례를 제정했다. 이와 함께 전범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와 기소가 진행됐다. 재판소가 설치됐고 1946년 5월 3일 재판이 시작됐다. 대대적인 수사가 이루어졌지만, 애초 기소 대상에 있었던 인물 중 28명만이 기소됐다. 

전범들은 그 죄의 경중에 따라 통상적인 전쟁범죄에 전쟁을 기획하고 주도한 A급, 전쟁법과 보편적인 상식과 관습에 반하는 민간인 학살 등을 저지른 B급, 민간인이나 포로들에게 고문 등 가혹행위와 살해는 저지른 C급으로 구분됐다. A급 전범들은 도쿄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고 B급과 C급 전범들 상당수는 각지의 재판소에서 별도 재판을 받았다. 화제의 중심은 A급 전범들이 있었던 도쿄재판소였다. 

A급 전범들은 그들의 전쟁범죄를 인정하지 않기 일쑤였고 심지어 승자들의 재판이라는 점에서 재판의 정당성을 부정하기도 했다. 전쟁이 특수한 상황 속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난 일이라는 변명도 있었다. 일본 군국주의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사상가 오카와 수메이는 정신이상자 행세를 하며 결국 재판을 모면하는 꼼수를 부리기도 했다. 그는 재판을 받지 않았고 천수를 누리고 사망했다. 

이 재판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내각 총리대신으로 전쟁의 총책임자로 지목된 도조 히데키였다. 그는 재판 전 자해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그 시도가 실패하면서 재판정에 섰다. 그는 자신만의 논리로 무고함을 항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군인이기도 했던 그는 총살형을 주장했지만,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도조 히데키 외에도 버마 지역에서 무차별적인 학살의 책임자였던 기무라 헤이타로, 중일 전쟁의 관동군 지휘관이었던 이타가기 세이시로, 중국 내 학살 책임자 도이하라 겐지, 필리핀에서의 연합국 포로 학살 책임자인 무토 아키라, 난징 대학살의 책임자 마쓰이 이와네, 태평양 전쟁의 정책 입안자인 히로타 코키까지 7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16명은 종신형, 2명은 금고형, 2명은 재판 도중 지병 등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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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히토 일왕

 



하지만 이들 외에도 상당수 전범들은 재판에서 배제되는 등 면죄부를 받았다. 무엇보다 전쟁의 가장 책임자이자 권력의 정점이 있었던 인물인 쇼와 덴노, 일본인에게는 쇼와 천황, 우리에게는 히로히토 일왕으로 더 많이 알고 있는 그의 단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일본의 헌법상 국가 중요 정책의 결정권자였다. 그의 승인이 없었다면 일본은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지금의 일왕은 상징적인 존재지만, 메이지유신 이후 일왕은 내각 총리대신과 함께 권력의 가장 중심부에 있는 인물이고 전쟁 책임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맥아더의 미 군정은 일왕의 기소와 단죄를 반대했다. 맥아더는 일왕은 일본의 통치에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겼다. 일본인들에게 절대적인 존재인 일왕의 처벌이 일본인들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왕 역시 맥아더에 적극 협조를 약속했다. 정치적 밀약 속에서 일왕은 전쟁범죄 책임을 모면했다. 대신 히로히토 일왕은 인간선언을 통해 자신의 자신의 신적 우상화를 스스로 배격했고 일체 정치에 관여하지 않은 국가 원수로서의 상징적 존재가 됐다. 

일왕 외에도 중국 만주에서 끔찍한 생체 실험을 자행한 731 부대의 책임자들과 부대원 역시 책임에서 벗어났다. 이들은 생체 실험 자료들을 미국에 넘기는 조건으로 면책을 받았고 상당수는 관련 분야에서 전문가로 권위자로 편안한 삶을 살았다. 미국은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731 부대의 자료들이 의학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극히, 판단하에 전쟁범죄를 외면했다. 

이들 외에도 전쟁 수행에 큰 역할을 했던 정계 인사들과 관료들도 상당수 책임을 모면했고 이후 일본 사회의 주류 세력으로 그 지위를 확고히 했고 그 세력은 여전히 일본 사회에서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 세력들을 중심으로 일본은 현재 재무장과 함게 군사 대국화, 전쟁국가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런 일본을 이끌다 최근 암살되어 세상을 떠난 아베 신조 총리의 외조부는 전범 출신으로 전후 일본 총리를 역임하며 큰 영향력을 행사한 정치인 기스 노부시케다. 

 

 

 



이렇게 도쿄 전범재판은 그 한계가 명확했고 전쟁범죄 단죄라는 목적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전범들이 분류되고 면책을 받았다. 재판에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도 대부분 미 군정이 끝나면서 가석방되어 일본 사회의 저명인사로 활약했다. 그나마 사형이 선고되어 집행된 A급 전범 7명 역시 사후 일본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들 7명의 A급 전범 외에 상당수 전범들은 일본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에서 전쟁 중 전사한 이들의 추모하는 곳으로 이곳에 전범들이 함께 하고 있다는 건 그들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고 전쟁 범죄를 부인하는 일이다. 더군다나 야스쿠니 신사에는 한국인을 포함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사망을 한 외국인들도 함께 합사되어 있다. 전쟁범죄자들과 피해자들이 함께 추모되는 현실은 전쟁 피해국들이 분노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일본의 정계 인사들은 수시로 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있고 이는 외교적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 점에서 도쿄전범재판은 매우 위선적인 재판이라는 비판을 함께 받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시작된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시대의 시작과 함께 전쟁범죄 단죄에 역량을 집중할 수 없었고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한 요충지로 일본을 선정한 미국이 일본을 지원하면서 당시 일본의 주류 세력이었던 전쟁범죄자들은 자연스럽게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는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가볍게 했다. 이는 역사의 중요한 퇴행이고 정의의 상실이었다.

단죄되지 못한 전쟁범죄는 과거사 청산을 미완의 상태로 남겼고 지금도 일본과 주변국들의 외교 현안이 되고 있다. 이제 과거를 잊고 미래를 위해 함께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반성과 사죄가 없는 가해자와의 밝은 미래를 함께 하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일본은 최근 노골적인 패권국으로의 변화를 꿈꾸고 있다. 이런 일본을 신뢰하기는 어렵다. 일본이 그들이 말하는 보통 국가로 당당히 나서려 한다면 유럽의 리더가 된 독일처럼 지속적인 과거사 청산과 사과 반성, 이를 통해 주변국들의 이해와 공감을 이끌어내야 한다. 즉, 도쿄 전범재판은 아직 끝난 게 아니라 할 수 있다. 



사진 : 프로그램 / 위키백과,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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