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명은 사전적으로 이전에 없었던 기계나 물건, 작업과정 등을 창조하는 일이다. 발명이라는 말에는 새로움, 진보, 혁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발명을 하는 발명가는 시대를 앞서가는 인물이고 발명 당시의 정해진 규범과 가치를 깨는 괴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발명품들은 시대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일이 많다.
발명가로서 첫 손 꼽히는 인물은 단연 토머스 에디슨이다. 에디슨은 19세기 후반 20세기를 거쳐 활동한 발명가이자 사업가였다. 그는 생전에 1,000개가 넘는 발명 특허를 취득했고 그 안에는 인류의 삶을 바꾼 발명품들도 다수 포함됐다. 이에 에디슨은 위대한 발명가이자 위인으로 기억되고 우리 교육과정에도 다수 등장한다.
이렇게 큰 위인으로 칭송받는 에디슨은 어린 시절은 순탄하지 않았다. 에디슨은 유년기 매우 호기심이 많은 어린이였다. 거의 알을 스스로 부화시키기 위해 헛간에서 알을 품고 있었다는 일화는 그의 특별함을 상징하는 일이었다. 이런 호기심과 특별함은 정규 학교 교육에서는 수용되기 어려웠다. 에디슨은 그런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에디슨은 초등학교를 중퇴했다.
이런 상황은 에디슨을 사회 부적응자로 만들 수 있었지만, 에디슨의 어머니는 달랐다. 에디슨은 어머니는 에디슨을 이해하고 홈스쿨링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어머니의 교육으로 에디슨은 지식을 쌓고 지적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었다. 그 안에서 에디슨은 과학 서적과 실험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는 훗날 발명가가 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에디슨은 삶은 12세에 인생에 큰 변화를 맞이했다. 그 시가 에디슨은 가세가 크게 기울었고 그는 어린 나이에 가정의 생계를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돈을 벌기 위해 에디슨은 여러 일을 했고 기차의 판매원으로 일했다. 지금의 초등학교 학생이었던 에디슨에게 그 일은 매우 힘들고 고됐다. 또한, 일을 하는 과정에서 사고로 인해 한 쪽 귀의 청력을 상실하는 등의 장애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에디슨은 좌절하지 않고 기관차의 작동원리에 관심을 갖고 이를 연구하는 등 새로운 기회로 삼았다.
에디슨은 적극적인 사고와 진취적 사고는 어린 나이의 에디슨을 사업가의 길로 이끌었다. 15살이 된 1862년 신문을 제작하고 그가 일하는 기차에서 판매하는 사업을 했다. 에디슨의 신문에는 열차 시간표와 분실물, 물가정보 등을 실었다. 어린 나이에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사업이었지만, 그 사업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비록, 첫 번째 사업은 실패했지만, 에디슨은 기차역에서 기차 역장의 아들을 사고 위험에서 구하면서 새로운 기회를 잡았다. 그 일을 계기로 에디슨은 기차 역장의 배려로 가장 각광받는 직업인 전신 기사가 되기 위한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당시 전신기사는 남북전쟁과 서부 개척 시대의 시대적 상황 속에 그 수요가 크게 늘었고 기사에 대한 대우도 타 직업과 비교해 높았다.
에디슨으로서는 마침내 보다 안락한 삶을 살 수 있게 됐지만, 여러 현상과 과학, 사물에 대한 호기심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전신기사로 일하면서도 여러 실험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일을 소홀히 하게 했다. 결국, 에디슨은 전신기사 일에 정착하지 못했고 그 일을 그만뒀다.
에디슨은 20대 초반의 직장 생활을 접고 전문 발명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첫 발명품으로 자동 투표기를 개발했지만, 상용화되지 못했고 이후에도 발명을 지속했지만,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을 살았다. 에디슨은 변화가 필요했고 미국에서 가장 큰 도시 뉴욕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에디슨은 전신기사로 일했던 경험을 살려 주식시세를 발송하는 발명품을 개발했다. 이 발명품은 동시에 여러 메시지를 송수신 할 수 있는 전신기였다.
이 발명품은 에디슨을 성공한 발명가의 길로 이끌었다. 이 전신기로 에디슨은 백만장자 반열에 올랐고 발명가로서 인지도를 높일 수 있었다. 이후 에디슨은 더 발명에 박차를 가했고 수많은 발명품을 내놓았다. 1876년 발명공장을 만들고 발명품을 제품화하면서 수익을 창출하기 시작했다. 그 발명 공장에서는 기존 전화기의 품질을 발전시킨 전화기를 개발했고 음성을 녹음하고 재생할 수 있는 축음기도 내놓았다. 축음기는 매우 혁신적인 발명품이었고 문화, 예술의 흐름마저 바꿔 놓았다.
에디슨을 세계적인 발명가로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발명품은 단연 백열전구다. 에디슨의 백열전구는 기존 전구들의 단점을 극복하고 무엇보다 내구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이 전구는 일상에서 시간적 제약을 사라지게 했고 이는 인류 문명의 발전을 가속화했다. 또한, 전기의 사용폭을 한층 더 넓힐 수 있었다.
에디슨은 이에 더해 전기의 지속적 공급을 위해 뉴욕에 전기회사를 설립했다. 미국을 대표하는 거대 기업인 GE의 시작이었다. 미국의 전기회사는 1881년 파리 국제 전기 박람회 참가해 기술력을 과시하고 인정받았다. 또한, 그의 전기회사는 뉴욕을 벗어나 미국 전역으로 그 사업영역이 확산됐다. 전기사업은 돈이 되는 사업이었고 이는 거대 자본의 투자를 이끌었고 전기사업은 급속히 그 규모를 키웠다.
이런 에디슨의 전기회사에 대응하는 라이벌 회사 웨스팅하우스가 등장했다. 이 업체는 에디슨의 전기회사가 전기를 생산 공급하는 방식인 직류 전기 시스템을 개선한 교류 전기 시스템을 사용했다. 이 시스템을 활용하기 위한 변압기 개발에 성공하면서 교류 전기 시스템의 상용화가 가속화됐다. 교류 전기 시스템은 한때 에디슨의 전기회에서 일했던 또 다른 천재 발명가 테슬라가 고안한 방식으로 뛰어난 경제성과 대량 공급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특징이었다. 이는 보다 많은 이들이 전기를 보다 싼 가격에 사용할 수 있는 공공성이 뛰어난 방식이었다.
하지만 교류 전기 시스템의 시장 점유율 상승은 에디슨의 사업에는 큰 악재였다. 에디슨은 여전히 직류 전기 시스템을 유지했다. 에디슨은 자신의 높은 인지도와 영향력을 활용해 교류 전기 시스템의 안정성에 대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또한, 직류 전기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안전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를 숨기고 은폐했다. 이를 위해 언론 등을 활용한 가짜 뉴스 살포 등의 여론전도 했다.
교류 전기의 위험성을 부각하기 위해 1890년 사형수들의 사형집행을 위해 도입된 전기의자 제작에 있어 교류 전기 시스템을 사용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교류 전기 시스템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형성하고 전기사업에서 자신의 전기회사가 주도권을 잡을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웨스팅하우스는 교류 전기 시스템의 안전성을 지속적으로 홍보하고 이를 입증했고 교류 전기 시스템을 개발한 테슬라 역시 이의 보급을 위해 자신의 특허권을 포기하는 결단을 하면서 교류 전기 시스템의 대중화에 힘을 더했다. 이런 노력은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서 전기 시스템 관련 경합에서 웨스팅하우스가 승리하도록 했고 대중들에게 교류 전기 시스템의 우수성과 안전성을 입증하는 계기가 됐다. 테슬라는 이곳에서 직접 시연을 하는 등의 방법으로 안전성을 증명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결국, 교류 전기 시스템은 전류 전쟁이라 불리는 경쟁에서 승리했고 교류 전기 시스템은 지금도 보편적인 전류 공급 시스템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에디슨은 사업가로서 자신의 이익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함을 보여주고 말았다.
그는 발명과 사업에 몰두한 나머지 가정에 소홀한 아버지이나 배우자였다. 그는 가족들과 소통이 없었고 심지어 첫 번째 부인이 세상을 떠났을 당시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에디슨은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에게 에디슨은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도 아들들의 대학 진학에서는 그들의 뜻을 고려하지 않는 독선적인 모습을 보였다. 아들들이 성인이 된 이후 삶도 긍정적이지 않았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팔아 사기기를 치는 인사가 됐고 둘째 아들은 사업에 거듭 실패하며 에디슨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해 사는 처지가 됐다. 셋째 아들은 훗날 정치인으로 성공했지만, 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이 거의 없었다고 회고할 정도로 에디슨과 자식들의 관계는 소원하기만 했다. 이 또한, 에디슨의 생애에 있어 어두운 이면이었다.
에디슨에게는 발명과 사업이 모든 것이었다. 에디슨은 노년에도 발명을 이어갔다. 1891년에는 영화 카메라 개발을 통해 영화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끌었다. 이와 함께 기존 전기차의 성능을 크게 발전시킨 장거리 주행이 가능한 전기차 개발에도 성공했다. 에디슨의 전기차는 미국 최대 자동차 회사와의 협업으로 시제품이 출시되고 또 다른 자동차의 표준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솔린 차가 사용화되고 텍사스 지역에서 대형 유전이 발견되고 대량의 석유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효율성 면에서 가솔린 자동차가 확실한 우위에 섰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대량 생산 시스템을 갖춘 가솔린 자동차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민간에도 다수 보급되며 대중화됐다. 여기에 에디슨의 전기회사가 화재로 큰 피해를 입으면서 전기차 생산에 어려움이 더해졌다.
결국, 에디슨은 전기차는 상용화되지 못했다. 만약, 그때 전기차가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면 자동차 산업의 흐름을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다. 또한, 인류의 에너지 사용 패턴 역시 지금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었다. 즉, 최근 각광받고 있는 전기차는 새로운 게 아닌 이미 에디슨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의 재현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에디슨은 다방면에서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그가 위대한 발명가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에디슨은 여러 발명품은 우리의 삶을 보다 편리하게 보다 진보시키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 다만, 우리는 그동안 그의 밝은 면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발명가이기도 했지만, 이익을 추구하는 사업가였고 그 속에서 비인간적인 자본가의 면모도 보였다. 특히, 교류와 직류 전기 논쟁 당시 그의 모습은 아쉬움이 있다. 만약, 그때 직류 전기 시스템의 에디슨의 주장대로 표준이 됐다면 인류 진화에 역행하는 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디슨은 삶은 그 인물이 아무리 큰 업적을 남겼다 해도 그것만으로 그 인물을 평가하지 말고 그 어두운 이면을 함께 살피면서 또 다른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보다 균형 잡히고 객관적인 역사의 평가, 이는 역사를 배우는 데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
사진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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