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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급속한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후 위기와 관련해 자주 거론되는 지역이 지구의 양 극단에 자리한 남극과 북극이다. 이 지역은 지구에서 가장 추운 곳이지만, 지구 온난화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고 있기도 하다. 실제 극지의 빙하가 급속히 녹으면서 이는 기후 위기를 더 촉진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대부분 바다로 이루어진 북극의 빙하는 앞으로 이대로 지구 온도가 올라가면 그 존재가 사라질 위기다. 육지로 이루어진 남극의 빙하는 상대적으로 그 위험을 덜 받고 있지만, 거대 빙하의 붕괴와 빙하의 면적이 줄어드는 현상은 진행형이다. 특히, 남극 빙하의 소멸은 지구 기후에 더 큰 위협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남극은 기후 위기의 최 전선에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남극은 이 외에도 지구에서 개발되지 않은 미지의 땅이기도 하고 기회의 땅이기도 하다. 거대한 얼음층으로 덮여 있는 남극은 그 면적이 미국의 1.4배에 이르고 광대한 땅 곳곳에는 풍부한 광물 자원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오랜 세월 인간의 인위적인 손길이 닿지 않았던 탓에 자연환경이 원시 그대로 보전되고 있다.

이는 지구의 기원을 연구하는 데 있어 남극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남극은 자원이라는 실익 외에도 학술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아직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점에서 모든 국가들이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남극은 1959년 다수의 국가들이 참여한 남극 조약에 따라 특정 국가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고 인류 공동 번영을 위한 터전으로 함께 이용할 것을 합의하긴 했지만, 이 조약은 2048년에 만료된다. 

 

 

 



남극에는 선진국을 포함해 개발도상국까지 다수의 국가들이 기지를 조성하고 각종 연구와 탐험을 지속하고 있다. 이는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남극을 두고 벌어질 주도권 경쟁을 대비하는 측면이 강하다. 그에 대비해 남극에 더해 더 많이 알고 각종 성과를 토대로 남극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 가치가 시간이 흐를수록 높아지고 있는 남극에는 치열한 탐험 경쟁의 역사가 있다. 1911년부터 1912년 사이 있었던 노르웨이의 탐험가 아문센과 영국의 탐험가 스콧이 이끄는 양국 탐험대의 남극점 도달을 위한 경쟁이다. 두 탐험대는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하기 위해 자국의 명예를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 경쟁에서 앞선 아문센 탐험대는 최초의 남극점 도달자라는 명예를 얻었지만, 그들에 뒤처진 스콧 탐험대는 귀환 도중 대원 전원이 사망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남극의 탐험 역사는 18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극 탐험에서 가장 앞선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대항해 시대를 이끈 포르투갈, 스페인에 비해 뒤늦게 해양 진출을 했지만, 막강한 해군력을 앞세워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이겨냈고 바다를 이용한 대외 진출을 주도했다. 18세기 영국은 세계 도처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해가 지지 않은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런 영국의 대외 진출은 이미 알려진 대륙을 벗어나 제7의 대륙이라 할 수 있는 남극으로 향했다. 

영국 해군 함대가 남극권에 위치한 섬을 찾았고 1775년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이 남극의 해안을 탐험했다. 그속에서 영국 탐험대는 거대한 빙벽과 빙하로 가득한 남극의 해안에서 고전하며 남극 대륙 상륙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영국 탐험대는 남극이 거대한 얼음층으로 뒤덮은 땅임을 알 수 있었다. 이후에도 영국은 지속적으로 남극에 탐험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남극 대륙 상륙에는 번번이 실패했다. 남극의 거대한 빙벽은 배가 닿기 어려웠다. 

그 사이 남극의 존재가 세계 각국에 알려졌고 식민지 확보 경쟁을 하던 서구 열강들은 북극에 이어 앞다투어 남극 탐사에 나섰다. 하지만 남극은 혹독한 추위와 거대한 얼음층 등으로 인해 쉽게 닿을 수 없는 땅으로 오랜 세월 남았다. 

 

 

로버트 스콧

 



남극에 대한 본격적인 탐사가 이루어진 건 20세기 들어서였다. 1901년 영국은 국가 차원에서 대규모 남극 탐사대를 파견했다. 그 탐사대의 책임자는 영국 해군 장교 로버트 스콧이었다. 그는 탐험대를 이끌고 인류 최초로 남극 대륙에 상륙했다. 본격적인 남극 탐사 역사의 시작이었다. 

스콧 탐험대는 곧바로 남극점을 향한 탐사를 시작했다. 당시 극지를 포함한 오지 탐험은 국가의 영역을 넓히고 학술적인 의미도 있었지만, 그 나라의 국력을 드높이려는 목적도 있었다. 특히, 가장 먼저 남극점을 도달하는 건 세계 최강국이었던 영국에는 큰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남극에 대한 사전 지식이 부족했다. 스콧 탐험대는 남극의 강추위와 열악한 환경에 대해 준비하지 못했다. 남극점에 도달하기 위해 알아야 할 루트도 없었고 무엇보다 남극의 지형도 알 수 없었다. 사전 지식이 없는 남극점 탐사는 무모한 도전이었다. 결국, 스콧 탐사대는 남극점 탐사를 중도에 멈추고 돌아와야 했다. 

남극점 도달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스콧 탐사대는 남극 상륙 후 다양한 연구 활동과 탐사를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남극의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는 향후 남극 탐사에 큰 도움이 됐다. 

큰 성과를 가지고 1904년 영국으로 돌아온 스콧은 남극 탐험의 영웅으로 영국에서 큰 환영을 받았다. 미지의 대륙이었던 남극에 영국 국기를 가장 먼저 꽂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상징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향후 그가 추진하는 남극대륙 재 탐사에 있어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기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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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은 남극점 최초 도달이라는 꿈을 실현하기 위한 탐사를 준비했다. 마침 1909년 미국 탐험대가 세계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하면서 스콧의 남극점 탐사에 대한 의지는 한층 더 강해졌다. 다만, 그 탐사를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다. 긴 항해를 견딜 수 있는 최신의 배가 있어야 했고 수년간의 탐사를 위한 대량의 물자들을 준비해야 했다. 영국 정부의 지원만으로 이를 충당하기 어려웠다. 

이에 스콧 탐험대는 기업광고 유치 등으로 이를 해결했다. 지금은 보편화된 오지 탐험을 위해 스폰서를 구하고 기업들은 마케팅 효과 등을 고려해 비용을 지원하는 형식의 자금 조달이 최초로 이루어졌다. 스콧 탐험대는 탐험 기간 비용을 지원한 기업들을 위한 홍보 포스터를 촬영하는 등 일종의 광고를 하기도 했다. 

스콧 탐험대는 국민적인 기대와 성원, 자금 확보, 1차 탐험을 통해 얻은 정보를 토대로 한 철저한 준비를 마치고 1910년 남극점 탐사를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당연히 그의 탐사는 영국을 비롯한 세계 언론들의 큰 주목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극점 도착을 위한 탐험에 다른 탐험대가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스콧 탐험대가 대대적인 지원을 받으며 남극 탐험을 준비하는 사이 노르웨이 탐험가 아문센은 조용히 남극 탐사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1905년 북극항로를 새롭게 개척하는 등 극지 탐험을 통해 명성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나라 노르웨이 당시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한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었다.

지금은 북유럽의 부국으로 자리하고 있지만, 20세기 초반 노르웨이는 국력에서는 영국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당연히 탐험을 위한 준비과정이 수월하지 않았다. 대규모 탐험대를 조직한 영국 스콧 탐험대와 비교해 아문센의 탐험대는 크게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세계 최강국인 영국 탐험대와의 경쟁구도가 알려진다면 상당한 견제를 받을 수도 있었다. 

이에 아문센은 남극 대륙 탐사를 준비하면서 그 사실을 극소수에게만 알리며 보안을 유지했다. 심지어 함께 탐험에 나선 대원들에게도 북극 탐사로 알렸고 남극을 향한 항해가 한참 이루어진 후에야 사실을 밝혔다. 

 

 

아문센

 



이렇게 뒤늦게 아문센 탐험대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세계 각국은 남극점 도달을 놓고 벌이는 스콧의 영국 탐험대와 아문센의 노르웨이 탐험대의 경쟁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는 말 그대로 누구도 닿지 못한 미지의 장소를 향한 도전이었고 이전에 없었던 대결이었기 때문이었다. 

긴 항해를 거쳐 양극 탐험대는 1911년 1월 4일의 차이를 두고 영국 스콧 탐험대와 노르웨이 아문센 탐험대가 남극 대륙에 상륙했다. 양국 탐험대는 상륙 지점에 캠프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남극점 도달 경쟁에 돌입했다. 초기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지만, 준비 과정에서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됐고 양국 탐험대에는 긴장감이 생겼다. 하지만 도착 후 즉시 남극점 도전을 할 수 없었다. 남극에서 3월부터 10월까지는 극한의 날씨가 계속되는 겨울로 밤이 계속되기 때문이었다. 지형에 대한 사전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의욕만으로 탐사를 시작할 수는 없었다. 

탐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양국은 큰 대조를 보였다. 아문센 탐험대는 북극 탐험 과정에서 원주민들로부터 습득한 노하우를 활용한 개 썰매를 중요한 이동 수단으로 삼았지만, 스콧 탐험대는 조랑말과 탐험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모터 썰매를 이동 수단으로 삼았다. 스콧 탐험대는 1차 탐험 때 개 썰매를 이용했지만, 운영 미숙으로 오히려 더 힘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이에 그들에게 보다 익숙한 조랑말을 이용한 썰매를 고안했다. 여기에 남극의 열악한 환경을 극복할 수단으로 모터 썰매를 추가했다. 준비에 있어서는 영국 탐험대가 더 앞선 듯 보였다. 

하지만 아문센 탐험대는 탐사에 특화된 대원들로 구성되고 있었고 개 썰매 운영에 능숙했다. 이는 향후 탐사에 아문센 탐험대가 우위를 점하는 요인이 됐다. 또한, 아문센 탐험대는 남극점으로 향하는 최단거리 루트를 고려한 일정을 계획했고 이를 실행했다. 스콧 탐험대는 1차 탐험 때 개척했던 루트를 이용했지만, 이는 익숙함이라는 장점에도 아문센 탐험대보다 많은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1911년 10월 19일 준비를 마친 아문센 탐험대는 남극점 도달을 위한 여정을 위한 첫 지점은 거대 얼음 지대 돌파를 시작했다. 스콧 탐험대는 그보다 늦은 11월 1일 캠프를 출발했다. 출발 시점에서도 아문센 탐험대가 앞섰다. 아문센 탐험대는 얼음 지대를 지나 높은 산맥 지대를 통과하며 순조롭게 남극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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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탐험대 상황은 달랐다. 야심 차게 준비했던 모터 썰매가 고장 나면서 활용할 수 없었고 조랑말들 역시 남극의 강추위에는 취약했다. 여기에 거대한 눈 폭풍이 그들의 이동을 어렵게 했다. 스콧 탐험대는 이동에 비효율적인 조랑말들 도살하고 대원들이 짐을 직접 운반하며 이동했다. 출발이 느렸던 스콧 탐험대는 진행 속도 역시 느려졌다. 그 사이 아문센 탐험대는 최고 난코스인 산맥 지대를 넘어 남극점이 있는 고원지대로 진입했다. 

하지만 이를 알리 없었던 스콧 탐험대는 그들이 경쟁에서 앞서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개척했던 루트를 이용하고 있었고 그 루트에서 아문센 탐험대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스콧 탐험대는 아문센 탐험대다 최단 거리 루트를 이용해 남극점으로 향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안타까운 상황이었지만, 앞서가고 있다는 확신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 스콧 탐험대를 지탱하는 힘이기도 했다. 

앞선 출발, 거리상 이점, 날씨의 도움까지 받은 아문센 탐험대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남극점으로 향했고 1911년 12월 14일 남극점 도달에 성공했다. 아문센 탐험대는 남극점 도달 증명을 위해 수차례 검증을 했고 스콧 탐험대의 도착을 일정 기간 기다리는 여유도 가졌다. 아문센 탐험대는 노르웨이 국기가 펄럭이는 텐트를 남극점에 설치하고 베이스캠프 복귀를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그 여정 또한 순조로웠다. 

이렇게 아문센은 남극점 최초 도달자라는 영예와 함께 세계적인 탐험가로서 그 명성을 떨치게 됐다. 

아문센 탐험대가 떠난 이후 한 달여가 지난 시점인 1912년 1월 16일 스콧 탐험대가 마침내 남극점에 도달했다. 악전고투 끝에 이룬 성과였지만, 그들을 맞이한 건 노르웨이 국기가 펄럭이는 텐트였다. 스콧 탐험대로서는 엄청난 상실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스콧 탐험대는 세계 최초로 남극 대륙에 상륙한 탐험대라는 영예와 함께 최초의 남극점 도달 탐험대의 영예를 더하려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스콧 탐험대는 실망감을 안고 머물 수 없었다. 그들은 남극의 겨울이 찾아오기 전 귀환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스콧 탐험대는 생존을 위한 여정을 시작해야 했다. 남극점 도달 여정도 힘들었지만, 귀환 여정도 힘겹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귀환을 대비해 루트 곳곳에 묻어둔 식량과 난방 연료 등의 물자를 찾지 못해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려야 했다. 귀환 과정에서 거대한 크레바스에 빠져 죽음의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대원들이 부상을 입었다. 날씨 역시 그들 편이 아니었다. 

 

 

 



스콧 탐험대는 힘겨운 걸음을 계속 이어갔지만, 극한의 상황을 더는 견디지 못했다. 스콧 탐험대는 베이스캠프를 불과 250킬로 미터 정도 남겨둔 지점에서 그들의 텐트에서 사망했다. 그들의 유해는 그들을 찾아 나선 구조대에 의해 사망 후 8개월이 지난 시점에서야 발견됐다. 남극 탐사 영웅의 비참한 최후였다. 

하지만 스콧은 죽음의 순간까지 그들의 여정을 기록한 탐험 일기를 남겼다. 이는 그들의 여정을 기록한 것이기도 하지만, 남극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되는 기록이었다. 아울러 스콧 탐험대는 다수의 과학자들이 함께했고 그들의 연구는 남극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향후 연구에 큰 도움이 됐다.

스콧은 남극점 도달 경쟁에서는 패자였지만, 남극 탐험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영웅이었다. 지금의 남극 연구는 스콧과 같은 탐험가들의 헌신과 의지를 통해 축적한 기록과 정보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물론, 남극 탐험의 초창기 목적이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의 산물이라는 비판도 가능하지만, 탐험가들의 노력은 결코 폄하할 수 없다.

다만, 그런 수많은 희생 속에 그 존재가 알려지고 인류의 미래를 밝게 할 땅이 된 남극이지만, 그 남극이 각국의 이해관계 속에 이권 다툼이 장이 되고 강대국들만을 위한 땅이 되는 건 경계해야 한다. 남극은 어느 누구의 땅도 아니고 인류 모두의 땅이기 때문이다.

또한, 남극의 생계 환경을 파괴하는 지구온난화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모두가 긴장해야 할 시점이다. 파괴된 남극은 인류 미래 자원의 보고 이전에 인류의 파멸을 상징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앞으로 남극을 두고 벌이는 경쟁은 인류 공동 번영을 위한 방향이 돼야 한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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