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년여의 코로나 팬데믹을 기간을 보내며 사람들은 최 일선에서 코로나와 싸우는 의료진들의 노고에 큰 감명을 받았고 성원을 보냈다. 아울러 그들이 얼마나 우리 사회에서 소중한 존재인지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특히, 환자들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하는 간호사들에 대한 인식도 새롭게 할 수 있었다.
과거 간호사는 간호원이라 불리며 의사의 보조자 정도의 의미가 있었다. 병원에서 다양한 일을 하고 필수 요원임에도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최근 간호사의 업무 영역은 점점 확대되고 있고 전문성을 강화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의료 현상에서 간호사들은 격무에 시달리고 있고 환자들과 가장 접점에서 일하는 탓에 각종 민원에 시달리고 있다. 심지어 각종 폭력에 노출되기도 한다. 아직까지 간호사에 대해 대중들이 가지는 잘못된 편견도 간호사들을 힘들게 하는 요소들이다.
간호사라는 직업에 대한 가치를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지만, 과거 간호사는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일해야 했다. 지금 우리가 보편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의료체계가 먼저 만들어진 서양에서도 간호사는 하층 여성들이 하는 일로 여겨졌다.
이런 간호사에 대한 인식을 크게 바꾸고 전문직으로 발전하는 길을 연 인물이 있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여성 위인 중 한 명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그 인물이다. 나이팅게일은 나이팅게일은 간호사를 전문직으로 영역으로 발전시키고 간호학의 이론을 정립했다. 헌신적인 활동으로 '백의의 천사', '광명의 천사'라는 말로 찬사를 받았이 말은 간호사를 상징하는 말이 됐다. 그만큼 간호사라는 직업의 영역에서 나이팅게일은 매우 상징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간호사라는 말로만 그를 특징할 수 없는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한 천재성을 가진 인물이었고 의료 체계를 변화시킨 혁신가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나이팅게일은 뛰어난 통계학자였고 학자였고 저술가이자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다. 간호사 나이팅게일은 그의 한 단면일 뿐이었다.
EBS의 역사 인물 탐사 프로그램 '인물 사담회' 10회에서는 그동안 잘 부각되지 않았던 나이팅게일의 면모를 살피는 시간을 가졌다.
나이팅게일은 1820년 영국의 매우 부유한 상류층 집안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상류층 그 이상의 재력을 가진 집안이었고 지금으로 말하면 나이팅게일은 금수저 그 이상의 존재였다. 나이팅게일의 출생지는 이탈리아 피렌체였다. 당시 영국의 귀족들은 그들의 문화, 예술적 소양을 키우기 위해 유럽 각지를 길게는 수년간 여행하는 게 보통이었다. 나이팅게일은 그의 부모가 이탈리아 여행 중 태어났다. 플로렌스는 이탈리아 피렌체를 뜻한다. 탄생부터 나이팅게일은 보통 사람과 다른 환경이었다.
이런 부유한 환경에서 나이팅게일은 정규 교육의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당시 영국을 포함해 유럽 국가들에서 여성 인권은 크게 제한되어 있었다. 여성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직업도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부유한 집안의 여성들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당시 여성들은 좋은 집안의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는 게 최상의 삶이었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의 부모님은 이런 사회 분위기와 달리 나이팅게일과 그의 언니까지 두 명의 딸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가정교사를 두기도 했고 자신들이 직접 딸들을 가리키기도 했다. 이는 훗날 나이팅게일이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
방송 링크
https://www.ebs.co.kr/tv/show?prodId=440673&lectId=60360208#none
분명 남과 다른 풍족한 환경과 부족함이 없는 교육까지 받았지만, 나이팅게일의 사회활동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 유럽은 급속한 산업화, 도시화를 거치며 발전했지만, 여성들의 삶은 가정에 머물러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나이팅게일을 답답하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현실에 순응하고 풍족한 삶에 만족해 살았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나이팅게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이팅게일은 국. 내외 여러 곳을 여행하고 찾을 수 있는 여건을 활용해 자신만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 사회의 여러 면을 두루 살폈다. 그런 그에게 상류층이 아닌 하층민들의 삶이 눈에 들어왔다. 사회는 발전하고 있었지만, 도시와 농촌에서 사는 일반 평민들의 삶은 가난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특히,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든 이들의 삶은 더 비참했다. 빈민들의 거주하는 지역은 매우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환경이었고 각종 질병과 범죄로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었다.
당시 상류층 사람들은 이런 빈민들의 삶을 흥미로 여겼고 빈민촌 방문을 일종의 관광으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그들의 삶을 보면서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환자들의 죽어가는 병원의 모습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는 그가 간호사의 삶을 살도록 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간호사는 하층민 여성들이 하는 직업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사회적 인식도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최 상류층 집안의 여성이 이 일을 하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나이팅게일 역시 집안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나이팅게일은 이를 이겨냈고 자신의 꿈을 위해 세상 밖으로 나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일에 충실하기 위해 오랜 연인과의 결혼마저 포기했다.
간호사 나이팅게일의 삶은 이렇게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의지와 어려운 이들에 대한 측은지심이 더해져 시작됐다. 독일 등지에서 간호사 교육을 받은 나이팅게일은 1853년 런던 여성 병원의 간호부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런 나이팅게일의 삶을 뒤흔드는 일이 얼마 안 가 발생했다. 1853년 영국과 러시아가 대결한 크림전쟁이 중요한 계기가 됐다. 크림전쟁은 전쟁사에서 처음으로 종군 기자가 파견되어 전쟁의 상황을 수시로 알리고 대중들이 그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전쟁의 참상과 영국군의 어려운 상황들이 빠르게 알려졌다.
특히, 치열한 전투 과정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함에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비참한 야전병원의 상황은 영국에서 큰 이슈가 됐다. 이에 정부와 군에 대한 대중들의 비난 여론이 강하게 일어났다. 영국 정부로서는 부상자들의 치료에 대한 지원을 모색했고 야전 병원에 간호사들을 파견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 책임자로 나이팅게일이 임명됐다.
나이팅게일은 당시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고 간호사로서 경험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집안의 배경 등이 고려됐다. 물론, 나이팅게일의 의지가 있어 가능했다. 여성이 전쟁지역에 가는 것도 위험한 일이었고 야전 병원의 상황도 최악이었다. 자칫 나이팅게일이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 파견에 동의했고 성공회 수녀 38명도 그와 함께 했다.
그렇게 도착한 야전병원의 상황은 최악 그 이상이었다. 수많은 부상자들이 치료를 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었고 병원의 위생상태도 열악했다. 치료에 필요한 물품이나 보급품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나마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그 사이 부상자들의 사망률도 급속히 올라갔다. 나이팅게일과 간호사들이 헌신적인 활동을 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위기 상황에서 나이팅게일의 다재다능한 능력이 빛을 발했다. 나이팅게일은 열악한 병원 환경 개선을 강력히 실시했다. 지속적인 청소와 소독 등으로 병원의 위생 상황을 개선했고 환자 치료 시스템도 변화시켰다. 또한, 뿌리 깊은 관료주의와 복지부동의 행정 시스템과 정면으로 맞서며 개선을 시도했다.
하지만 나이 어린 여성이 이를 감당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오랜 세월 관행을 굳어진 잘못된 시스템이 바로 개선되기는 어려웠다. 이에 나이팅게일은 강하게 담당자들과 맞섰고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병원의 상황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영국 정부와 언론 등에 보내는 등 정치력 발휘와 여론전을 전개했다. 이를 통해 나이팅게일은 부상자들이 뒤섞여 죽을 날만 기다리던 야전병원을 생명을 구하는 병원으로 면모 시켰다.
이전에 없었던 큰 혁신이었다. 나이팅게일의 강한 의지와 능력이 더해진 결과였다. 이 과정에서 나이팅게일은 통계학자로서의 면모를 발휘했다. 그는 병원의 여러 상황들을 매우 객관적이고 정확한 통계로 분석하고 이를 수치화했고 설득의 자료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지금의 프레젠테이션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통계 그래프를 작성해 이해도를 높였다. 당시에는 데이터를 취합하고 분석할 컴퓨터가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두뇌와 끈기로 이뤄낸 결과였다. 이는 나이팅게일의 남다른 수학적 연산 능력이 바탕이 됐다.
이런 노력은 분명한 결실을 맺었다. 야전 병원의 사망률이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구했다. 이런 노력과 결과는 향후 야전병원의 운영에 있어 중요한 본보기가 됐다. 나이팅게일의 혁신은 이를 입증할 결과와 함께 큰 성공과 연결됐다.
나이팅게일의 헌신과 성공은 영국 사회에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가 야전병원에서 밤마다 바쁜 시간을 쪼개 환자들의 상태를 살피고 위로하는 장면은 'The Lady with the Lamp'로 표현됐고 이 말은 '광명의 천사', '백의의 천사'까지 간호사를 상징하는 말의 어원이 됐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있었던 부상자들에게 나이팅게일의 존재는 신 그 이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간호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고 그 일에 대한 사회적 평판을 높이게 했다. 관련 교육 기관이 더 발전하고 양질의 간호사들을 교육하고 배출할 수 있게 됐다. 나이팅게일은 간호학의 발전을 선도하는 인물이 됐고 그의 이름을 딴 나이팅게일상은 이 분야에서 최고 권위의 상이 됐다. 지금도 간호사가 되기 전 간호사들은 나이팅게일 선서를 하고 있다. 그만큼 나이팅게일이 남긴 업적은 대단했다. 이는 의료시스템 전반의 수준을 높이는 일이었다.
또한, 통계학자로서의 역량은 그를 1858년 영국 유일의 여성 유일의 통계 학회 회원으로 선출되도록 했다. 이후에도 나이팅게일은 사회 저명인사로 여러 분야에서 활약했고 1910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영국 사회 전반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혹자는 나이팅게일의 남다른 배경이 있지 않았다면 그가 위인의 반열에 오를 수 없었고 반론을 할 수도 그것이 일정 그의 성공에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그런 헌신적인 삶을 살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사회적 위치에 있었다. 그런 안락함을 스스로 버렸다는 점은 크게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또한, 여성의 사회 참여가 극도로 제한한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이끌었다는 점은 여권신장의 측면에서도 평가를 받아야 한다. 나이팅게일이 영국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던 그 시절에도 세게 여성들은 국민으로서 중요한 권리인 참정권을 보장받지 못했다.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은 나이팅게일 사후 한참이 지난 1918년 그것도 30살 이상 여성에게 처음으로 주어졌다. 이런 사회에서 혁신가로 성과를 냈다는 점은 큰 의미가 있었다. 무엇보다. 사회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나이팅게일은 성별을 떠나 성공한 혁신가로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사회를 위해 발휘했다는 점도 존경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크림전쟁에 함깨 한 38명의 수녀들 처럼 그의 혁신에 함께 한 또 다른 여성들도 있었다는 점이다.
사진 : 프로그램 / 위키백과,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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