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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나라에서 그 인기가 크게 시들해졌지만, 복싱, 권투라고도 불리는 종목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을 스포츠로 주목받는 격투기 중 하나다. 우리나라와 달리 세계 최고의 스포츠 산업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미국을 중심으로 복싱은 큰 흥행을 보장하는 스포츠로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여전히 복싱 스타들은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고 누군가에는 소중한 기회의 장이 되는 게 복싱이다. 

세계 복싱의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선수 중 한 명이 무하마드 알리다. 본명은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 주니어, 그는 프로 복싱의 최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며 복싱의 인기를 주도했던 말 그대로 전설적인 선수였다. 하지만 그가 복싱계의 전설이 됐던 단지 복싱만을 잘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삶은 그 누구보다 극적이었고 복싱 사회운동가로 인권 운동가로서도 큰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성공한 복서이자 사회 운동가였던 무하마드 알리, 그의 삶은 EBS의 역사 프로그램 '인물 사담회' 13회에서 살필 수 있다.

무하마드 알리의 선수 생애 중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1974년 10월 30일 열린 조지 포먼과의 WBC, WBA 세계 헤비급 챔피언전이었다. 그 경기에서 도전자로 나선 알리는 전성기를 지난 32살의 노장 선수였고 상당 기간 경기 공백도 있었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었다. 

알리는 1960년 로마 올림픽 복싱 금메달리스트로 아마추어 복싱에서는 적수가 없었다. 그는 올림픽 금메달 이후 프로로 전향했고 이후에도 성공 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그에게는 넘지 못할 벽이 있었다. 그는 흑인이었고 여전히 미국 사회에서 만연되어 있던 인종차별의 굴레 속에 갇혀 살아야 했다. 그는 흑인이었지만,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정규 교육을 받았다. 또한, 미국을 대표해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내기도 했다. 

 

 

한국 방문 당시 사진

 



그런 알리였지만, 흑인들이 받는 불이익을 그도 피할 수 없었다. 링컨의 노예 해방으로 미국의 흑인들은 자유인이 됐지만, 백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에서 여전한 비주류였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흑인들은 열등 국민의 취급을 받았고 국민으로서의 기본권도 제한됐다. 1960년대까지도 미국에는 공공시설이나 식당, 버스 등 교통시설에 있어 흑인과 백인의 분리 정책이 유지되는 주가 많았다. 알리가 태어나고 나고 자란 켄터키 주는 강력한 흑인 차별 정책을 시행하는 곳이었다. 

알리는 그곳에서 자라면서 흑인들에 차별을 몸소 경험하고 그 부당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복싱 선수가 된 건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실력으로 최고가 될 수 있는 기회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복싱은 오로지 자신의 실력으로만 결과를 만들 수 있는 종목이었다. 물론, 백인들에 대한 노골적인 편차 판정이 있었지만, 그건 상대를 KO로 눕히거나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이면 극복할 수 있었다. 

알리는 바로 그런 선수였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중량급 선수로는 이례적으로 매우 빠른 스피드를 가진 선수였다. 그는 수비적인 아웃복싱과 공격적인 인파이터 전략을 두루 구사할 수 있는 전천후 선수였다. 그는 프로로 전향 한 이후 연승을 달렸고 빠르게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그는 통산 61전 56승을 기록했고 승리 중에는 37번의 KO 승이 있었다. 알리는 화려한 전적과 함께 총 수차례 챔피언에 올랐고 19번의 타이틀을 방어했다. 

알리는 선수로서의 능력과 함께 당시 스포츠 선수에게는 쉽게 볼 수 없었던 화려한 언변과 자기표현으로 주목받았다. 그는 경기를 앞두고 말로서 상대에게 도발하는 가 하면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밝혔다. 이런 알리의 모습은 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 주기도 했지만, 그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높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알리의 남다른 캐릭터는 그의 뛰어난 실력과 함께 그를 최고 인기 스포츠 스타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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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알리는 스포츠 스타로 머물기를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마음에 품고 있었던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미디어를 통해 쏟아냈다. 그는 인종차별이라는 미국 사회의 거대한 부조리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이는 백인들이 주도하는 주류 사회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당연히 언론이나 미디어에서 그에 대해 부정적 기사들이 쏟아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프로 선수에게 이는 큰 불이익이 될 수 있었지만, 알리는 멈추지 않았다. 

알리는 더 나아가 급진주의 흑인 인권운동 세력에 가담하며 더 적극적으로 인종차별 철폐 운동에 함께 했다. 흑인 인권 운동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주도하는 온건파와 말콤 엑스 등 흑백 분리 정책에 맞서 흑인들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급진주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급진주의 세력들의 사상은 과격하고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오랜 세월 억압받았던 흑인들에 큰 지지를 받았다. 이미 사회 저명인사가 된 알리에게는 흑인 급진주의 세력과의 연계가 부담이 될 수 있었지만, 알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알리 관련 한국 신문 기사

 



알리는 이를 통해 인종차별 철폐의 메시지를 더 분명히 전달하려 했다. 이런 사회 저항운동 참여와 함께 알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했다. 그는 이슬람교에 귀의하면서 그의 이름도 그에 맞게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했다. 이는 자신이 백인 중심의 미국 사회 속 차별받는 흑인이 아닌 주체성을 가진 인격체임을 상징하는 일이었다. 

알리의 주류 사회와의 대립은 반전 운동으로 연결됐다. 알리는 베트남 전쟁 참전을 위한 징집에 불응했다. 이는 당시 미국 사회를 휘감고 있었던 애국주의에 크게 배치되는 일이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쟁에 참전해 전사하거나 다치는 상황에서 알리의 징집 거부는 무책임하고 비겁한 행위로 비칠 수 있었다. 당연히 알리는 대중들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 알리는 1967년 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에 따라 그가 가지고 있었던 챔피언 자격은 물론이고 복싱 선수의 자격까지 박탈됐다. 알리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알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대법원까지 이어지는 4년 가까운 법정 투쟁을 이어갔다. 그는 자신의 징집 거부를 양심적 병역거부로 주장했고 강력히 자신을 변론했다. 그 결과 연방 대법원은 1971년 알리의 무죄를 선고하며 알리는 자신의 박탈됐던 권리를 되찾았다. 

그의 수년간의 법정 투쟁은 베트남 전쟁의 장기화와 함께 조성된 미국 내 반전 여론 확대와 함께 새롭게 재조명됐다. 이렇게 법정 투쟁에서 성공했던 알리였지만, 그 기간 알리는 선수로서 전성기를 흘려버리고 말았다. 알리는 다시 재기를 위해 현역 복귀를 선언했지만, 30살을 넘긴 그의 나이는 큰 부담이었다. 긴 경기 공백은 그의 장점인 빠른 스피드를 무디게 했고 세월은 그의 파워를 떨어뜨렸다. 그의 재기가 성공할 거라는 예상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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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알리가 1974년 빼앗겼던 헤비급 타이틀을 되찾기 위해 도전자로 링에 섰다. 알리는 승리를 자신하며 특유의 독설과 화려한 언변을 언론을 통해 과시했지만, 승리 가능성은 그의 상대 조지 포먼이 훨씬 높았다. 조지 포먼은 20대의 절정에 이른 기량의 선수였고 엄청난 펀치력을 자랑하는 선수였다. 알리가 상대하기에는 버거운 상대로 보였다. 

하지만 알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전술로 포먼을 상대하며 경기를 대등하게 이끌었다. 알리는 수세에 몰리는 듯하면서 로프를 이용해 포먼의 강펀치를 흘리며 방어했다. 포먼은 알리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경기를 했지만, 정타를 적중시키지 못했다. 그렇게 알리는 초반 고비를 넘기고 경기를 장기전으로 이끌었다. 초반 KO 승으로 대부분 경기를 승리했던 포먼은 라운드를 거듭할수록 힘이 떨어지는 게 분명히 보였다. 7라운드 이후에는 움직임이 크게 둔화되어 있었다. 속된 말로 때리다 지쳤다는 말이 딱 맞는 상황이었다.

알리는 수세에 몰린 듯하면서도 체력을 안배하며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8라운드에서 알리는 포먼의 수비가 느슨해진 틈을 파고들어 강펀치를 작렬했고 포먼은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했다. 알리의 KO 승, 이 승리는 알리가 그의 챔피언 자리를 빼앗아 간 미국 사회의 흑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에 대한 승리이기도 했다. 이 경기는 이례적으로 지금의 콩고 공화국, 아프리카에서 열렸다. 경기 시간도 미국의 중계 시간에 맞추기 위해 현지 시각 새벽에 열렸다. 모든 흑인들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아프리카에서 화려하게 챔피언으로 복귀한 알리의 승리는 그 자체로도 상징성이 컸다. 

이후 알리는 헤비급에서 오랜 세월 챔피언으로 군림하며 자신의 커리어를 이어갔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를 그도 영원히 지탱할 수 없었다. 알리는 자신의 한계를 분명하게 느낀 1981년 현역 선수 은퇴를 선언하며 링을 떠났다. 챔피언의 자리에서는 내려왔지만, 은퇴 이후에도 사회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며 사회 운동가로서 명성을 쌓았다. 흑인 인권운동은 물론이고 어려운 이들을 위한 자선활동, 국제기구를 통한 세계 평화를 위한 활동에서 적극 나섰다. 알리의 활동은 그 공을 인정받았고 알리는 다수의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미국에서 철저히 비주류의 삶을 살았던 그의 삶이 은퇴 후 비로소 인정받은 셈이다. 

 

방송 링크

https://www.ebs.co.kr/tv/show?prodId=440673&lectId=60366934 

 

인물사담회 - 13회 싸워야 한다면 무하마드 알리처럼

권투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고 평가받는 무하마드 알리. 권투선수로서의 그의 모습과 함께, 차별받는 이들을 위해 쉽지 않은 길을 걸으며,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던 그의 일생을 되짚어...

www.ebs.co.kr:443

 



알리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1976년 알리는 친분이 있었던 재미 교포였던 북미 태권도의 대부 이준구의 주선으로 서울을 방문했다. 그의 방문은 당시 국민들 사이에 큰 화제가 됐다. 그가 공항 도착 후 시내까지 이어진 카퍼레이드에서 수백만 명의 환영 인파가 몰려 그의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알리는 이후 각종 행사는 물론이고 방송 출연까지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한국을 떠났다. 

이렇게 화려한 선수 생활과 사회 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았던 알리지만, 1984년 발병 사실이 확인된 파킨슨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큰 고통을 받았다.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고 서서히 마비되는 이 병으로 인해 알리는 행동은 물론이고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됐지만, 이에 좌절하거나 자신의 투병을 숨기기 위해 은둔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끊임없이 사회 활동을 이어갔다.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서 있기조차 힘든 몸을 이끌고 성화 점화자로 나섰다. 떨리는 손에도 온 힘을 다해 성화봉을 잡고 성화를 점화시키는 장면은 올림픽 개회식을 지켜본 모든 이들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런 자신의 불행에 좌절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모습은 편견과 부조리에 맞서 싸운 그의 삶의 연장이었고 이는 그가 더 위대한 복서로 기억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6년 그가 긴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을 때는 그의 장례식에 복싱계 유명인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찾아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했다. 그는 평소에도 그의 장례식이 화합의 장이 되기를 소망했고 실제 그 꿈을 이루며 영면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알리의 삶은 끊임없는 투쟁으로 채워졌다. 그의 사생활과 관련해 그를 비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는 훨씬 편하고 더 큰 부와 명예가 있는 삶을 포기하고 그의 신념을 따랐다. 그 과정에서 큰 고난도 있었고 불치의 병으로 고통받았지만, 그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하게 싸운 복서였다. 이런 알리의 삶은 진정한 챔피언의 삶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 위기백과,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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