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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만큼 극과 극의 양면성을 가진 물질은 이 세상에 없다. 원자력은 엄청난 효율의 발전소를 운영할 수 있게 하는 소중한 에너지원이지만, 인류 전체를 파멸로 이끄는 핵무기의 원료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류는 실제 그 원자폭탄의 위력을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향하던 1945년 8월 6일과 8일 두 발의 원자폭탄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투하됐고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 위력은 원자폭탄을 개발한 이들조차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 원자폭탄의 위력에 전범국 일본은 더 이상의 항전을 멈추고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원자폭탄은 결과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빠른 종식으로 이어졌다. 아울러 일제 강점기 속에 있던 우리 민족의 광복도 앞당겼다.

이렇게 원자폭탄은 인류가 평화를 찾게 한 수단이었지만, 이후 훨씬 더 위력이 크고 고차원의 핵무기로 발전했고 현재는 만여 개가 넘는 핵무기가 지구에 존재하고 있다. 이는 지속적인 핵전쟁 위협과 함께 이로 인한 인류 멸망의 가능성을 상존하게 하고 있다. 다행히 1945년 8월 원자폭탄 투하는 아직까지 인류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핵무기 사용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누군가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 핵무기 공격 버튼이 눌러진다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엄청난 파괴력을 지난 원자폭탄의 개발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원자폭탄 개발의 아버지라 불리는 한 인물, 오펜하이머가 등장한다. 오펜하이머는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미국이 진행한 원자폭탄 제조를 위한 비밀 프로젝트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진행에 있어 사실상의 총책임자였다. 그는 뛰어난 과학자였지만, 맨해튼 프로젝트에서는 수많은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을 총괄 관리하고 조직을 운영하는 관리자이나 리더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오펜하이머

 



그의 뛰어난 리더십은 결과적으로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었던 원자폭탄의 제조를 3년여 만에 완성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원자폭탄은 얼마 안 가 실전에 배치됐고 앞서 언급한 결과로 이어졌다. EBS의 인물 탐구 프로그램 '인물 사담회' 14회에서는 이 오펜하이머의 삶을 과학자나 리더가 아닌 인간적인 관점에서 살피는 시간을 가졌다. 

오펜하이머는 1904년 미국 뉴욕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9세기 후반 뉴욕으로 이민 와 자수성가한 성공한 유대인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화가였다. 오펜하이머는 경제적으로 풍족했고 유럽과 달리 사회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을 덜 받는 환경에서 자랐다. 

그는 물리학을 전공했고 미국 하버드 대학교를 거쳐 영국과, 독일에서 유학하며 학문적 깊이를 더했다. 여담으로 그는 영국에서 대학 생활이 순탄하지 않았다. 독일에 와서 그는 물리학자로 자신의 이론을 정립하고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가 유학하던 당시 독일에는 다수의 유명 물리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있었고 그 안에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도 있었다. 이런 환경은 오펜하이머에게는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독일 나치 정권 체제에 속하고 극우 파시즘 체제로 변모하면서 오펜하이머는 독일을 떠나 그가 태어난 미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과정에서 오펜하이머는 나치 정권의 극단적인 유대인 차별과 탄압을 체험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유대인인 그가 원자폭탄 제조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또 다른 계기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맨해튼 계획은 애초 나치 독일의 핵무기 개발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됐다. 나치 독일의 과학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분열하지 않는 최소 단위의 원자가 분열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를 잘 활용해 무기로 만든다면 이전에 없었던 엄청난 파괴력의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이는 독일에서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과학자들 사이에서 큰 이슈가 됐다. 

 

방송 링크

https://www.ebs.co.kr/tv/show?courseId=40046376&stepId=60049441&lectId=60370373 

 

인물사담회 - 14화 원자폭탄을 만든 오펜하이머, 창조자인가, 파괴자인가?

인류 최초로 원자폭탄을 개발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수장이었던 물리학자 오펜하이머. 그가 개발한 원자폭탄은 역사를 바꿨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국제사회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www.ebs.co.kr:443

 



만약,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이를 이용한 무기를 개발한다면 제2차 세계대전의 판도가 크게 변할 수 있었다. 이에 과학자들은 나치 독일보다 앞선 핵무기 개발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미국 정부에 이를 청원했다. 가장 존경받는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의 서명이 들어간 편지는 당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전달됐다. 마침 관련 첩보를 가지고 있었던 영국도 그 필요성을 미국에 역설하면서 미국은 정부 차원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시행한다. 

맨해튼 계획으로 명령된 이 프로젝트는 극비리에 전개됐다. 극 소수의 인원만 이 사실을 알았고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인력 상당수도 그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극비 프로젝트였지만, 나치 독일보다 먼저 개발을 완료해야 한다는 목표는 프로젝트의 조기 성공을 위한 막대한 자금과 인력 지원으로 이어졌다.

미국을 포함해 전 세계의 유명 과학자들이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다. 이들은 미국 서부 사막에 건설된 비밀 연구소에서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 채 연구에 매진했다. 한편으로는 원자폭탄 제조에 필요한 핵물질 농축을 위한 비밀 공장이 미국 전역에서 운영됐다. 미국은 맨해튼 계획의 빠른 성공을 위해 국가의 역량을 최대한 쏟아부었다. 

이에 맨해튼 계획 추진을 위한 의사결정은 그 어느 프로젝트보다 신중하면서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오펜하이머는 연구소의 총책임자로 유망 과학자들의 의견을 모으고 조율하며 결과를 도출해야 했다. 여기에 전시 상황 속에서 각종 예산권을 가지고 있는 군과의 관계로 원활하게 구축하고 유지해야 했다. 맨해튼 계획에서 오펜하이머는 CEO와 같은 존재였다. 한 편으로는 마지막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 맨해튼 계획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책임이 그에게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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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리더십은 맨해튼 계획을 긍정적으로 방향으로 이끌었다. 인류 역사상 처음 하는 일이었고 불확실성의 연속이었지만, 오펜하이머는 매우 단호하게 그러면서도 구성원을 역량을 다 이끌어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중요한 변수가 발생했다. 나치 독일이 패망하면서 맨해튼 계획의 중요한 목표인 나치 독일보다 빠른 핵무기 개발이라는 중요한 명분이 사라졌다. 미국은 맨해튼 계획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과 치열한 전쟁을 지속하고 있기도 했고 막대한 예산과 인력, 자원이 투입된 프로젝트를 아무런 결과 없이 종료하기도 어려웠다.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필요했다. 

결국, 맨해튼 계획은 1945년 7월 16일 인류 최초의 핵폭발 실험인 트리니티 실험의 성공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 결과는 매우 놀라웠다. 이 실험 후 미국은 다른 유행의 원자폭탄 2개를 개발했고 실전 배치했다. 그 원자폭탄은 얼마 안 가 실전에 배치됐고 일본의 두 도시에 투하됐다. 그렇게 투하된 원자폭탄은 해당 지역을 초토화시키는 한편, 수십만 명이 넘는 인명을 살상했다. 이에 놀란 일본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를 통해 오펜하이머는 과학자였지만,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미국이 항복하지 않은 일본을 굴복시키기 위해 일본 본토로 상륙했다면 원자폭탄에 의한 피해 그 이상의 인명피해는 불가피했다. 미국의 피해도 크게 늘어날 수 있었다. 결과론이지만, 원자폭탄은 더 큰 피해를 막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주도해 만든 원자폭탄, 핵무기의 파괴적 성격에 주목했다. 원자폭탄의 개발의 불가피성을 설파했던 그였지만, 그 폭탄으로 인해 전쟁과 무관한 무고한 생명이 다수 희생되는 상황에 괴로웠다. 훗날 오펜하이머가 '나는 이제 죽임이고,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라고 말한 건 핵무기의 위험성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트리니트 원자폭탄 폭발 시험 직후

 



이후 오펜하이머는 함께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과학자들과 함께 추가적인 핵무기 개발 반대와 함께 핵무기의 통제를 강화하는 방안을 수립할 것일 미국 정부에 청원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이미 핵무기의 파괴력을 확인했고 이 무기가 절대적인 힘의 우위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인식한 이후였다. 이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이 빠르게 종결됐지만, 이어진 미국과 소련 중심의 냉전 체제는 보다 강한 군사력, 이를 위한 무기의 필요성을 높였다. 미국은 절대 악인 소련에 대응할 강력한 무기가 필요했다. 

이에 미국은 일본에 투하던 원자폭탄을 크게 능가하는 수소폭탄 제조를 지속했다. 오펜하이머는 이에 강력한 반대했고 결국,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전쟁 영웅이었던 과학자의 몰락이었다. 그의 시련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미. 소 냉전 체제가 찾아오고 소련의 위협이 현실화되면서 미국 내 공산주의 대한 극단적 사고가 팽배해졌다.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매우 빠르게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면서 미국민들의 소련에 대한 두려움은 한층 더 커졌다. 이에 편승해 미국에서는 미국 내 공산주의자 색출 운동 매카시즘 열풍이 불었다. 이를 통해 다수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문화, 예술인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렸다. 물론 그중에는 소련을 위한 간첩 활동을 하던 이들도 있었고 심지어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인원 중에도 소련의 간첩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상당수는 공산주의와 무관한 이들이었다. 

이 매카시즘 열풍에 오펜하이머도 휩쓸렸다. 그는 그가 친분이 있던 인사들의 친 공산주의 성향이 문제가 되면서 공산주의자로 몰렸다. 그에 더 나아가 소련의 스파이라는 혐의까지 받아야 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애썼지만, 그의 비밀스러운 사생활마저 폭로되고 그동안의 삶마저 부정당하는 현실에 좌절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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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누구보다 미국에 충성했고 미국의 전쟁 승리를 위해 원자폭탄 제조를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이후에는 핵무기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이를 극복하고 평화적 사용을 주장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적을 이롭게 하는 스파이의 누명을 쓰고 은둔의 삶을 살아야 했다. 이로 인해 오펜하이머는 점점 대중들과 멀어졌다. 

오펜하이머가 모든 누명을 벗고 복권된 건 2022년이 돼서야 가능했다. 이를 계기로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그의 전기를 다룬 영화가 제작됐다. 배트맨 시리즈로 유명한 영화감독 크리스토퍼 논란이 12번째 장편영화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제조를 위한 맨해튼 계획을 중심으로 한 동명의 인물과 관련한 영화다. 그에 대한 미국 사회의 재평가가 이루어져 만들어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오펜하이머의 삶은 한 마디로 파란만장했다. 큰 영광의 순간도 있었고 아주 대조적인 좌절의 시간도 있었다. 역사적 평가 역시 극명하게 엇갈린다. 세계 대전 종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라는 긍정적 평가 외에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길을 만든 인물이라는 평가가 공존하다. 

특히, 영화 '오펜하이머'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미국적 시각으로 그를 영웅시화했다는 비판도 있다. 원자폭탄의 유일한 피해국임을 자처하는 일본에서는 부정적 여론이 상대적으로 더 크다. 물론, 이와 관련해서는 일본이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자행한 각종 파괴 행위와 학살 등 전쟁 범죄에 대한 반성과 사죄 없이 자신들의 피해만을 강조하는 자기중심적 사고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일본은 분명한 전범국이고 그들의 전쟁범죄 행위는 여전히 여러 나라에 큰 상처로 남아있다. 그들의 침략자의 길을 걷지 않았다면 원자폭탄의 피해자가 될 일도 없었다.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후 버섯구름

 



오펜하이머 역시 원자폭탄의 비극적 결과에 마음이 아프지만,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가도 같은 결정을 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는 원자폭탄의 개발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그 이후의 인류의 미래를 걱정했다. 그는 과학의 진화로 인한 결과를 되돌릴 수 없고 그 파괴성을 극복하고자 했다. 

오펜하이머의 삶은 과학 기술의 발전이 가지는 양면성을 상징하고 있다. 인류에 큰 번영을 가져다 준 과학기술이지만, 그 기술의 활용에 따라 과학기술은 우리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다. 이미 오펜하이머가 주도해 만든 원자폭탄은 언제는 인류를 멸망에 이르게 할 수 있는 핵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최근 일상 깊숙이 자리 잡아가는 인공지능 역시 그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줄을 잇고 있다. 

중요한 건 인간의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이 만든 결과물이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도 인간의 몫이다. 인간이 과학기술을 선한 마음으로 활용한다면 과학기술은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위험성이 있다 해도 충분히 통제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 과학기술이 누군가의 이익과 힘의 우위를 위해 활용된다면 그 피해는 우리 모두가 짊어져야 한다. 오펜하이머의 삶을 입체적으로 살피는 건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일이 될 수 있다. 



사진 : 프로그램 / 위키백과,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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