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 12 군사 반란을 배경으로 한 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 관객 달성을 위해 순항하고 있는 가운데 임진왜란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또 하나의 영화가 흥행을 위해 순항하고 있다.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3대 대첩을 시리즈로 한 영화 '명량', '한산, 용의 출현'에 이어 그 완결 편이 되는 '노량, 죽음의 바다'가 그 영화다.
'노량 죽음의 바다'는 이미 역사의 기록에 이순신 장군의 최후 전투이자 1592년 일본의 조선에 대한 대규모 침공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의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모두가 알 듯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철군하는 일본군과 바다에서 최후의 대결을 펼쳤고 대승을 거뒀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아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자제했던 근접전을 감행했고 육박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7년 동안 조선의 유린했던 일본군을 한 명이라 더 섬멸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 전투에서 마지막까지 분전했던 이순신은 안타깝게도 적의 흉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그가 유언으로 남긴 '아직 전투가 한창이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유언은 그의 영웅적인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임진왜란 승리의 주역 이순신
실제 이순신의 생애는 임진왜란과 맞물리며 매우 극적이었다. 다른 이들보다 늦은 나이에 무과 시험을 통해 무관이 된 이순신은 강직하고 청렴한 성품으로 지금도 조직에서 출세하기 위한 중요한 요건인 정치질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당시 조선은 동인과 서인으로 구분되는 붕당 정치가 자리를 잡고 각 붕당 간 대립이 극심했다. 출세를 위해서는 정치적 상황에 따른 처신이 필요했고 자신이 속한 붕당의 정치적 입지도 중요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군인의 직분에만 충실했다. 당연히 진급은 늦어질 수밖에 없었고 한직을 전전해야 했다.
이런 이순신의 진면목을 알아본 이는 임진왜란 전후로 조선을 이끌었던 명 재상 류성룡이었다. 그의 천거에 의해 이순신은 직급을 크게 뛰어넘는 진급을 했고 전라 좌수영을 지위하는 수군 장군이 됐다. 이 결정은 결과적으로 조선이 임진왜란 초반의 위기를 극복하고 전세를 역전하는 중요한 요인이 됐다.
당시 조선 조정은 일본의 긴 분열기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등장 이후 일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고 전쟁의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긴 평화시기를 보내면서 조선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됐고 각종 국가 시스템에도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런 조선에서 전쟁 대비를 위한 국방력 강화 정책을 추진하기 힘들었다. 민심의 동요와 조정에 대한 반감이 커지는 상황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조선은 능력 있는 장수들을 발탁해 중요 지역에 발령하는 등의 방법으로 나름 대비를 했다. 이순신은 그 과정에서 발탁한 인사였다.
이순신은 전라 좌수영의 지휘관이 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모두 동원해 함선을 건조하고 일본군에게는 낯선 돌격선인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 전쟁에 대비했다. 공교롭게도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얼마 전 완성되어 실전에 배치될 수 있었다.
이순신의 이러한 대비는 임진왜란 발발 후 빛을 발했다. 조선은 대비를 했다고 했지만, 일본의 20만 대군의 대규모 상륙과 전면전까지는 예측하지 못했다. 토요토미는 100여 년의 분열기를 통일한 이후 커진 무사 계급들의 불만을 대외로 돌리고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겠다는 야심 실현 등을 위해 조선 침략을 단행했다. 그의 침략 명분은 명나라로 향하기 위해 길을 내어 달라는 것이었고 명나라와 사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조선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토요토미의 야욕을 과소 평가한 조선
일본은 일찍부터 나고야에 전진 기지를 만들어 전쟁을 준비했고 1592년 대규모 부대를 부산에 상륙시키며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은 대규모 전쟁에 대응할 군 체제를 완비하지 못했다. 또한, 일본군이 신 무기 조총에 대해서도 사전 정보가 부족했다. 일본군은 긴 내전을 통해 실전 경험이 풍부했고 신 무기 조총을 더했다. 일본군은 부산을 개전 후 하루 만에 점령하고 조선의 수도 한양으로 빠르게 진격했다.
이에 맞선 조선은 당시 최고 장수인 신립을 앞세워 대응했지만, 그가 이끄는 조선의 주력군이 지금 충주 지역인 탄금대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일본군의 북진을 제어할 수 없었다. 주력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일본군에 맞설 병력이 없었고 무엇보다 일본군의 기세에 완전히 밀렸다. 이에 당시 조선의 왕 선조는 자신을 추격하는 일본군을 피해 개성, 평양, 명나라와의 접경 도시 의주까지 몽진길에 올라야 했다. 일본군은 한 달도 안 되어 수도 한양을 점령했고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점령하며 파죽지세의 모습을 보였다.
이대로라면 나라의 존립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조선에 새로운 돌파구가 열렸다. 전란 중 급히 세자로 임명된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며 무너진 행정 체제를 복구하고 항전을 지위하며 새로운 컨트롤 타워가 됐다. 그 사이 일본군이 점령한 후방에서는 백성들이 자체적으로 의병을 조직해 대항했다.
일본군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개전 후 빠르게 수도 한양을 점령해 조선의 왕인 선조를 잡아 항복을 받으려 했지만, 선조가 몽진길에 오르며 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후방에서 의병이라는 새로운 변수를 만났다. 여기에 바다에서 강력한 적이 등장했다.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의 해군은 바다에서 연전연승을 거뒀다. 이순신과 의병의 활약은 일본이 기대했던 전쟁을 장기전 양상으로 이끌었고 조선에는 반격을 위한 계기가 됐다. 일본군은 애초 육군의 빠른 진격에 이어 수군이 보조를 맞추며 합류해 함께 진격하는 수륙병진 작전을 기본 전략으로 했다. 수군까지 그들의 계획대로 진격할 수 있었다면 한양 점령은 훨씬 더 빨라질 수 있었다. 선조의 몽진도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본군의 전략 무력화 한 이순신 수군 그리고 의병
하지만 이순신의 수군에 막힌 일본 수군은 북진을 할 수 없었다. 도리어 해상의 재해권을 완전히 내주며 해상 보급에도 차질이 생겼다. 육지에서는 의병들이 곳곳에서 일어나 그들의 후방을 교란하고 전방 보급을 어렵게 했다. 이순신의 수군과 일본의 수군이 전면전으로 맞선 한산도 대첩은 조선 수군이 남해 바다를 완전히 장악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일본은 이순신의 수군과 대결을 회피했다. 이와 함께 의병들의 활약이 더해지며 조선은 최대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킬 수 있었고 이는 향후 전쟁을 유리하게 이끄는 발판이 됐다.
한숨 돌린 조선은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며 육전에서의 반격을 본격화했다. 명나라는 애초 전쟁에 미온적으로 대응했다. 과거의 군사적 강성함을 잃은 탓도 있었고 당시 명나라 황제 만력제가 무능하고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서 국력이 쇠퇴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심지어 명나라는 조선과 일본이 공모해 명나라는 공격하려 한다는 오해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명나라는 일본군의 위협이 자신들에 미칠 수 있음을 인지하고 군대를 파견했다.
이에 전쟁은 조선과 명나라, 일본이 대결하는 국제전 양상으로 전개됐다. 명나라 군은 일본군에 없던 신식 대포를 앞세워 평양성 탈환을 이끄는 등 기세를 올렸지만,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후 진격을 늦추기 시작했다. 이후 명나라는 전투보다는 일본과의 정전 협상에 주력했다. 일본 역시 장기전으로 이어지는 전쟁이 부담이 커졌고 매서운 조선의 추위에 대비하지 못하면서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었다.
명나라와 일본이 협상에 들어가면서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로 철수해 성을 쌓고 근거지를 구축했다. 침략군을 공격할 수 없는 상황은 조선을 분노하게 할 수 있었지만, 사대를 하고 있는 명나라 원군을 요청한 조선으로서는 양국의 협상을 지켜볼 뿐이었다. 조선은 협상에서 배제됐다.
그 사이 양국은 조선의 영토를 일부 일본에 내주는 할지론 등 조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 등을 협의하면서 협상을 지속했다. 하지만 양측의 입장 차가 매우 컸고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일본의 실력자 토요토미의 야심이 여전한 상황에서 협상 진척이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최악의 약탈전, 정유재란
결국, 양측의 협상은 결렬됐고 1597년 일본은 조선을 재침공했다. 정유재란의 시작이었다. 정유재란 전 조선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잇따른 승전으로 조선 삼도 수군통제사에 올랐던 이순신이 그에 대한 모함과 일본의 공작, 정치적 이유 등으로 실각하고 원균이 새롭게 삼도 수군통제사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원균은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 기록한 일기인 난중일기에서도 강하게 비판을 했던 인물로 조선 수군을 총괄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본의 역공작에 넘어가 일본군을 본진 공격을 지시한 조선 조정의 명령을 거부했던 이순신을 강하게 비판하며 삼도 수군통제사 자리에 올랐지만, 이순신이 왜 조정의 명령을 거부했는지를 인지했다. 그는 조정의 명령을 이행하지도 그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선조의 그에 대한 견제와 시기 등의 이유로 실각한 상황으로 원균이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고 중심을 잡았다면 현상 유지는 충분히 가능했다.
이순신이 한산도 대첩 승리 후 한산도에 수군 본영을 설치한 건 공세를 지속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호남을 지키고 일본의 수륙 병진 작전을 막기 위한 전진 기지의 의미도 있었다. 즉, 원균은 수성전만 잘 했어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원균은 결국, 무리한 출정을 강행했고 대부분의 수군 전력을 모두 동원해 부산으로 향했다. 무리한 출정은 결국 칠천량에서의 대패로 이어졌다. 이 칠천량 해전의 대패로 조선 수군은 완전히 궤멸됐고 일본 수군은 자유롭게 남해바다를 활보할 수 있게 됐다. 이 전투에서 원균은 전사했다.
이는 일본군이 재 침략을 본격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일본군은 조선의 마지막 보루였던 호남을 자유롭게 공격할 수 있었고 요충지 점령에 성공했다. 이를 통해 일본군은 후방 보급을 원활하게 할 수 있었다. 개전 초기 이순신에 저지됐던 수륙병진 작전의 실행도 가능해졌다. 조선에는 큰 위기였다.
시련을 이겨내고 돌아온 이순신의 승전, 명량해전
이에 조선 조정은 파직 후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삼도 수군통제사로 재 기용했다. 하지만 이순신의 수군은 고작 12척의 함선이 전부였고 전투 경험이 풍부했던 수군들도 상당수 사라진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재건과 함께 당장의 전투에 대비해야 했다.
조선 조정은 이순신에서 수군을 포기하고 육전에 힘을 보태라는 명령을 하기도 했지만, 이순신은 이에 반대하며 결사 항전을 주장했다. 이순신의 항전 의지는 명량 해전의 기적 같은 승리로 이어졌고 일본군의 수륙 병진 전략은 다시 한번 좌절됐다. 이를 통해 조선은 다시 한번 반격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조선은 임진왜란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사이 전시 체제를 정비하고 군사력을 증강했다. 이는 육전에서 일본군에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
이순신의 분전과 한층 강해진 조선군의 활약 속에 일본군은 전세는 점점 조선에 유리하게 전개됐다.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로 밀려났고 그들의 성에서 농성전을 전개하는 처지가 됐다. 공수가 뒤바뀐 상황에서 일본의 실력자 토요토미가 사망했고 그의 유언에 따라 일본군은 급히 철군을 단행했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 일본군은 임진왜란 초기와 달리 정유재란에서는 무차별적인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며 조선을 초토화했다. 임진왜란 초기 토요토미는 조선과 명나라의 영토를 제후들에게 나눠 통치하게 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고 점령지에서 약탈을 자제하는 측면도 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조선 백성들에게 식량을 나눠주고 회유하는 모습도 있었다.
이후 조선의 강력한 저항과 이순신의 존재 등으로 조선을 굴복시킬 수 없음을 인지한 토요토미는 탐욕을 충족하는 전쟁으로 전쟁을 변화시켰고 이는 조선에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로 이어졌다. 당연히 조선 백성들의 일본군에 대한 원한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에 최후의 일격 날린 노량해진, 이순신의 전사
이순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순신은 철군하는 일본군의 길목을 막고 그들의 섬멸을 노렸다. 이미 전쟁이 사실상 끝난 상황에서 계속적인 전투는 조선 조정과 명나라에도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정유재란 직후 조선과 명나라가 연합한 수군이 조직된 상황에서 계속된 전투로 명나라 군이 피해가 커진다면 외교적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고 오히려 전투에 소극적이었던 명나라 장군들을 설득해 동참을 이끌었다.
더는 철군을 미룰 수 없었던 일본군은 조선 수군의 앞뒤를 일시에 공략하는 전략으로 맞섰다. 500여척이 일본군의 배가 조선 수군을 양쪽에서 압박해 왔다. 노량해전의 시작이었다. 조선 수군은 늘 그랬던 것처럼 압도적인 화력과 승리 의지로 일본군의 배를 격침시켜나갔다. 결국,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남기고 소수만이 철군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비록 이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노량해전은 임진왜란의 승리를 확인하는 전투였다. 이순신이라는 존재가 그들에게 확실히 각인되는 전투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이순신의 전사와 관련해 이미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 직을 잃고 심한 고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던 이순신이 전쟁 종료 후, 다시 숙청당할 수 있는 상황을 고려해 스스로 목숨을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일부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순신은 갑옷을 벗고 전투에 임하는 것으로 묘사해 이런 주장에 힘을 싣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이순신의 존재에 큰 위기감을 가진 선조가 그를 암살했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이순신이 전사를 가장해 잠적해 초야에서 여생을 보냈다는 주장도 있다. 모두 확인되지 않는 추정이지만, 수많은 전투에서도 강건했던 그가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녹아있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이순신의 전사와 관련한 또 다른 주장
실제 임진왜란 후 큰 공적이 있었던 의병장들이 상당 수 숙청을 당하기도 했고 이순신이 장군이 상당한 민심을 얻고 있었다는 점에서 선조가 드를 잠재적 정적으로 여겼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순신 역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고초를 겪었던 만큼 개인적으로 선조와 조선 조정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순신이 고초를 겪었을 당시 그의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라 할 수 있는 류성룡조차 그를 비판했다. 그의 구명에 나선 대신들은 청렴의 대명사이자 뛰어난 재상이었던 이원익과 정탁 등 일부에 불과했다. 이런 정치 상황에 이순신은 강한 반감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마지막까지 한 명의 적이라도 더 섬멸하려 했던 장군이었고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다. 그의 전사에 대해 이런저런 의혹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의 영웅적인 생애를 폄하거나 하는 등의 결과로 이어지는 건 경계할 필요가 있다. 분명한 건 이순신은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고 마지막까지 참 군인이었다.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는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분투한 영웅의 이야기다. 이전 이순신 시리즈 영화보다 보다 화려하고 실감나는 전투신으로 채워져 있다는 평도 있다. 그 것만으로도 큰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순신이라는 영웅을 제대로 품지 못한 당시 조선 조정의 암울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도 함께 할 수 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우리는 각종 이해관계 속에 그에 근거한 선동과 잘못된 정보들로 인해 진짜 영웅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라지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 영화는 통쾌한 승리의 역사이전에 그 과정에서 현대적 관점으로 그 시대 영웅의 고뇌를 두루 살피며 볼 필요가 있다.
본 게시글은 EBS 스토리 기자단 18기 활동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사진 : 영화 홈페이지, EBS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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