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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군사반란을 배경으로 한 영화 '서울의 봄'이 흥행 기조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통상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한 영화들은 재미와는 거리가 있는 탓에 대중성을 갖추지 못한 작품들 많다. 흥행을 한 영화들은 역사의 흐름을 따라가기보다는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상상력이 더해진 스토리를 추가하거나 화려한 전쟁신이나 액션 등 볼거리를 더하며 관객들의 관심을 끌곤 했다.  

영화 '서울의 봄'은 아직 상당수 관련자들이 생존해 있음에도 과감히 12.12 군사반란을 영화에 담았고 군사반란이 있었던 1979년 12월 12일 밤부터 그다음 날 아침까지의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담았다. 다만,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실존 인물과 달리했고 영화적 상상력이 더해져있지만, 12.12. 군사반란의 내용을 잘 모르고 보는 이들에게는 다큐멘터리나 재현극을 보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서울의 봄'의 배경이 된 12.12 군사반란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군 사조직, 하나회가 일으킨 군사반란이고 그 결과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가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당시 그들은 군사반란은 성공했지만, 이후 12.12 군사반란은 이어진 1980년 5.17 쿠데타와 함께 신군부 세력의 정권 찬탈을 위한 범죄임이 대법원 판결들을 통해 명확히 규정됐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이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신군부에 저항한 광주시민들이 무참히 학살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비극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 그 군사반란 주역들 중 상당수가 여전히 생존해 있고 그 신군부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정치 세력들이 여전히 건재한 게 지금의 현실이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의 일원으로 자리하고 있고 군사반란으로 얻은 부와 명예를 누리며 그 자손 대대로 세습하고 있다. 그들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반란군 수괴 전두환의 추도식을 서울 한복판에서 보란 듯이 성대하게 열기도 했다. 



 





여전히 건재한 12.12. 군사반란 세력


어쩌면 그들에게 '서울의 봄' 신드롬은 역사에 대한 성찰을 불러오기보다는 스쳐가는 바람 정도로 여겨질 수 있있다. 그들은 속으로 이 영화의 흥행과 역사 재평가에 대한 비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편에서는 자칭 보수 단체라 하는 이들에 의해 학교에서 하려 했던 영화 단체 상영을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좌파 영화라는 색깔론을 덧칠하고 있기도 하다.

기존의 사회 질서를 지키는 것에 큰 가치를 두는 게 보수인데 영화 단체 상영을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이들의 행태는 헌정을 무너뜨리고 폭력으로 권력을 찬탈한 행위, 즉, 보수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일을 정당화한다는 것인지 답답함을 넘어 분노를 느끼게 한다. 

실제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이 영화에 일체 정치색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일부 각색한 것을 어떻게 정치적이라 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오히려 영화 단체 상영을 방해하는 행위 자체가 더 정치적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이런 방해 행위가 영화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을 더하는 반작용이 생길 수 있음을 그들은 알 필요가 있다. 

이 영화는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하나는 신군부 세력의 교활함과 폭력성, 사적 이익을 위한 권력욕에 대한 분노, 그런 신군부 세력을 제어하지 못한 당시 군 수뇌부의 무능에 대한 답답함과 아쉬움이다. 영화에서 신군부의 주축이 되는 하나회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가장 강력한 군 사조직으로 성장했고 강한 세력을 형성했다.

전두환의 영화 속 이름인 전두광을 중심으로 하나회는 철저히 선별된 인원들을 선발해 조직의 결속력을 강화했다. 나라에 충성해야 할 군인들이지만, 하나회는 그들 조직에 대한 충성이 우선이었다. 이 충성심과 결속력은 독재 권력의 비호와 함께 하나회를 군 내 최대 파벌로 만들었다. 그들은 군 요직을 장악했다. 

이런 하나회에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는 큰 위기가 될 수 있었지만, 오히려 기회가 됐다. 영화 속 하나회의 수장 전두광은 보안 사령관으로 군 내부 정보를 장악하고 있었고 대통령 시해 사건을 수사하는 합동수사본부의 수장이 되면서 국가 정보를 한 손에 움켜지게 된다. 그 자체로 전두광은 군을 넘어 나라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물이 됐다. 대통령 시해 후 계엄령이 선포되고 계엄 사령관이 임명되고 새 대통령이 선출되는 등 나라의 통치 시스템이 작동했지만, 전두광의 위세는 더 강해졌다. 

이를 견제하려 했던 당시 정승화 계엄사령관이자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의 영화 속 인물 정상호 대장은 전두광의 인사이동을 추진하고 수도 서울 방위를 위해 비 하나회 출신의 이태신 소장을 수도경비 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혹시 모른 하나회의 단체 행동 가능성에 우려하고 있었고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수도경비 사령부를 하나회에서 분리하려 했다. 

 

 




권력 찬탈하려는 자 전두광, 이를 막으려는 자 이태신의 대결


이때부터 영화는 권력 찬탈을 위해 폭주하는 전두광과 이를 막으려는 이태신의 대립 구도로 전개됐다. 이태신은 마지막까지 12.12 군사 반란군과 맞섰던 수도경비 사령관 장태완 소장의 극중 인물이었다. 장태완 소장은 6.25 한국전쟁과 월남전에서 참전했던 군인으로 정치와는 거리가 먼 천상 군인이었다. 그는 이전 부대 사단장으로 있을 때 강력한 훈련과 체력 단련을 통해 병사들을 단련했고 자신이 앞장섰던 일화로 유명하다. 또한, 당시에도 열악했던 부대의 급식 수준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등 병사들의 복지에도 관심을 가졌던 장군이었다. 

극 중에서 이태신은 매우 젠틀하면서도 결단력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불같은 성격을 보였던 장태완 소장과는 다소 다른 느낌인데 이는 불의에 끝까지 맞섰던 이들의 선함을 보다 강조하기 위함일 수도 있다. 또한, 전두광과 그 일당들과 강한 대비를 통해 그들의 악행을 보다 부각시키려는 장치일 수도 있었다. 

두 인물의 대립은 12.12 군사반란의 시작과 함께 더 극단적인 양상을 변한다. 대통령 시해 사건 연루 의혹 조사를 이유로 정상호 대장의 연행을 시도했던 신군부 세력은 이를 위한 대통령의 재가 절차부터 거치지 않고 정상호 대장을 강제 납치하게 된다. 전두광은 자신의 위세에 대통령이 쉽게 재가를 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대통령은 절차상 문제 등을 거론하며 재가를 거부한다. 

12.12 군사 반란 당시 대통령이었던 최규하의 극중 인물인 최한규는 전두광의 정상호 대장 체포안이 문제가 있음을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애처 중간 수사 발표에서 전두광은 정상호 대장의 연루 가능성이 없다는 언론 브리핑을 했다. 하지만 돌연 전두광은 자신의 군권 장악에 걸림돌이 되는 정상호 대장을 밀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수사를 이용했다. 최한규 대통령은 전두광의 정상호 대장 체포안의 숨은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 사이 정상호 대장은 강제 납치됐고 신군부 세력의 군권 확보를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된다. 그들은 군 통신망을 장악하고 수시로 도청을 하면서 군 수뇌부의 대응을 파악하고 있었고 하나회 인맥을 총동원해 각 부대장을 회유하며 그들 편에 서거나 최소한 그들의 군사반란을 묵인하도록 했다. 

하지만 하나회는 군 전체를 대변하는 조직이 아니었고 그 자체가 불법 조직이었다. 그들의 비밀리에 회합을 하고 점 조직처럼 운영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에 맞서 군 수뇌부와 행정부가 제대로 대응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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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를 알면서도 안타까움과 답답함이 함께 하는 전개 


이 지점이 영화는 물론이고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순간이다. 영화 속에서 군 수뇌부는 당장 사태 파악부터 제대로 하지 못했고 하나회의 의도를 과소평가했다. 그들의 조직적으로 군사 반란을 시도했음에도 우발적인 충돌 정도로 상황을 인지했다. 심지어 군 통신망을 하나회에 장악당하고 그들의 움직임이 하나회에 실시간으로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군사반란을 인지했다면 하나회의 행동이 군사반란임을 명백히 규정하고 각 부대에 그 사실을 전파하고 대응토록 하는 게 필요했지만, 군 수뇌부는 우왕좌왕했다. 최고 결정권자인 정상호 대장의 부재도 이유가 있었지만, 군을  통제할 수 있는 행정부 인사인 국방부장관의 부재도 결정적이었다. 당시 노재현 국방장관을 재현한 오국상 국방장관은 인근 정상호 대장의 납치 과정에서 총격전이 일어나는 상황을 인지하고 그대로 잠적했다. 

책임있는 인사라면 사태 파악을 위해 군 최고 수뇌부가 있는 육군 본부나 국방부로 향해야 했지만, 그는 자신의 역할보다는 안위만을 걱정했다. 그가 상황 발생 즉시 중심을 잡고 군사반란에 대한 단호한 대처를 했다면 상황은 하나회의 의도대로 진행될 수 없었다. 오국상 장관은 영화 내내 우유부단하고 비겁한 인물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반란군에 힘을 실어주는 일까지 하면서 악이 승리하는 데 일조한다. 

이렇게 신군부가 군권을 하나 둘 장악해 가는 시점에 이들에 저항한 이들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 이태신 수도경비 사령관과 함께 당시 정병주 특전 사령관을 재현한 공수혁 특전 사령관, 그리고 당시 육군본부 헌병감이었던 김진기 준장을 재현한 김준엽 준장이 그들이다.

 

 

 




이태신 그리고 장태완 


이들은 마지막까지 신군부와 맞서 싸웠다. 이태신은 자신이 가진 역량을 모두 사용했고 주변을 설득하며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자신의 휘하 부대장들이 하나회 멤버인 상황과 무능한 군 수뇌부, 그의 우군이 되어야 할 부대들이 하나 둘 하나회에 회유되는 상황에서 점점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그는 사령부 직할의 부대의 병사들과 100여 명과 4대의 전차, 아직 그의 지휘권에 있는 포병 부대와 함께 최후의 일전을 위해 나선다.

하지만 이미 중과 부족인 상황에 민간인들의 피해가 우려되는 위험 속에 무력 충돌을 결행할 수 없었다. 반란 성공을 위해 민간인들의 희생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신군부들이었다. 그들에 홀로 맞서는 건 애초 무모한 일이었다. 이태신은 그걸 알았지만, 군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그는 죽음까지 불사했지만, 부하들의 안위를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반란군과의 전투에서 패장이 되는 치욕을 홀로 감당해야 했다.

그 시각 신군부의 군사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특전 사령부 각 여단이 신군부에 가담한 상황에서 공수혁 특전 사령관은 신군부의 회유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신군부의 영향력 밖에 있는 특전여단을 서울 진입을 지시하기도 했다. 만약,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그 여단이 계획대로 신군부 지휘부를 먼저 타격했다면 그들의 군사 반란은 실패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군 수뇌부는 신군부와 상호 부대를 철수한다는 신사협정을 맺고 거의 유일한 우군을 철수시키는 최악을 결정을 했다. 그 특전사 여단과 기계화 사단이 군사 반란을 막기 위해 바로 투입되지 못한 건 결과적으로 군사 반란 성공에 또 다른 요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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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주 그리고 공수혁 


결국, 공수혁 특전 사령관은 친 신군부 세력인 그들 부하들에 의해 체포된다. 그는 마지막까지 총격전을 불사하며 저항했지만,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그와 함께 했던 공수혁 특전 사령관의 부관, 오진호 소령은 총격전 반란군의 총탕에  피격되어 전사하고 말았다. 그가 참군인의 표상으로 지금도 큰 존경을 받고 있는 김오랑 소령이다. 

이렇게 일선 부대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무능하기만 했던 군 수뇌부 내 반란군에 맞선 이가 있었다. 김진기 헌병감을 재현한 김준엽 헌병감 준장이 그 인물이다. 영화에서 김준엽 헌병감은 전두광의 체포를 시도하기도 했고 군 수뇌부의 미온적 태도에 맞서 단호한 대응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육군본부에서 가장 아래 계급인 준장의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었다. 그는 군 수뇌부가 버리고 떠난 육군본부 벙커를 마지막까지 지키며 분전했지만, 상황을 반전시킬 수 없었다. 육군본부 벙커가 신군부에 장악되는 과정에서 이를 막던 헌병대 정선엽 병장이 전사하는 일도 있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김진기 헌병감은 12.12 군사반란 당시 전두환의 체포 시도 외에 총리 공관에 사실상 연금 상태에 놓은 최규하 대통령의 구출을 시도하는 등 나름의 방법으로 신군부와 맞섰다. 

 

 

 




김준엽 그리고  김진기


이렇게 온 힘을 다해 신군부에 맞선 3인의 장군이었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 상황은 신군부의 의도대로 진행됐다. 그리고 신군부에 저항한 이들은 모두 그들에 의해 체포되는 비운을 맞이한다. 영화에서는 그들의 투옥되는 장면과 신군부가 군사반란에 성공해 연회를 열고 자축하는 장면이 함께 대비되면서 관객들을 한숨짓게 했다. 

실제 역사에서도 이들 3인의 삶은 험난함의 연속이었다. 이태신 수도경비 사령관, 장태완 소장은 신군부에 체포되어 장기간 고초를 겪었고 이후 강제 예편됐다. 이런 아들의 상황을 비관한 부친은 술로 세월을 보내다 얼마 안 가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역시 돌연 집을 나간 후 집안의 선산 인근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이런 비극 앞에 장태와 소장은 깊은 슬픔을 마음속에 묻어야 했다.

그는 언젠가는 신군부의 만행을 고발하고 단죄시키도록 하겠다는 일념으로 남은 생을 살았다. 이에 전두환의 제안한 공기업 사장 자리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그가 신군부의 회유에 넘어갔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의 신군부에 대한 마음은 변함이 없었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군사반란에 대한 법적 심판을 위한 고소 고발에 적극 나섰다.

또한, 정병주 전 특전 사령관과 지속 교류를 했고 신군부 단죄를 위한 의지를 다졌다고 전해진다. 훗날을 위해 몸을 단련하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는 이야기도 있다. 훗날, 장태완 소장은 신군부에 대한 법적 단죄가 이루어지는 과정에 법정 증인으로 출석해 증언을 하기도 해다. 이후 그는 정치인으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군 역사상 최초로 실시한 재향군인회 선거에서 연속 당선되며 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란군을 막지 못했다는 회환, 그로 인해 발생한 가족들의 비극은 그의 마음속 큰 응어리로 남았다. 마음 가득 슬픔을 안은 채 장태완은 2010년 7월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의 배우자 역시 얼마 안 지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며 가족들의 비극은 그가 세상을 떠나서도 이어지고 말았다. 비록 그 삶은 비극으로 가득했지만, 장태완은 참 군인의 표상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당시는 패장이었지만, 역사의 승자로 기억되고 있다.

 

 




군을 떠나서도 신군부와 싸운 3인


그와 뜻을 함께 했던 또 다른 인물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군사반란 직후 강제 예편됐지만, 천주교에 귀의하고 신군부에 반대하는 활동을 지속했다. 그는 그를 지키다 전사한 김오랑 소령의 명예 회복을 위한 노력도 함께 했고 1987년 6월 항쟁 때는 민주화를 염원하는 미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군사반란 세력들에 대한 소송을 추진하는 등 군사반란의 진실을 밝히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88년 10월 밤, 집으로 귀가하던 도중 실종됐고 다음 해 3월 한 군부대와 인접한 야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시신으로 발견됐다. 누구보다 삶에 강한 의지를 보였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기도 했던 그의 죽음은 여러 의혹이 있었지만, 끝내 그 실체가 명확하게 규명되지 못한 채 묻히고 말았다. 그는 12.12 군사반란 당시 그가 가장 아꼈던 직속 부하들에 배신을 당하는 아픔이 있었고 이후에는 그의 평생의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과 작별하고 말았다.

또 한 명의 인물인 김진기 전 헌병감은 군사반란 이후 체포되어 조사를 받는 등 고초를 겪었고 얼마 안 가 스스로 예편하고 군을 떠났다. 그는 군을 떠난 것은 물론이고 신군부 세력이 득세하는 세상과도 등을 지며 살았다. 그는 농사를 짓거나 양식업 등을 하며 인생 후반부를 보냈다.

그는 신군부 측의 회유도 거부했고 이후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 12.12 군사반란의 진상 규명에 나섰다. 그러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토지공사 이사장으로 영전하며 불의 맞선 데 따른 나름의 보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1993년 전두환과 신군부 인사들에 대한 내란죄 고발 등에 동참하며 신군부에 대한 단죄에 힘을 더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편에는 군사반란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불의에 저항한 이들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신군부 측의 회유가 있었지만, 그들은 신군부에 협조하지 않았고 마음 한편에 그들에 대한 단죄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군사반란을 막지 못했고 그들의 위세가 드높던 시절 숨죽이며 살아야 했지만, 역사의 증인으로서 그 소명을 버리지 않았다.

'서울의 봄'에서 이 세 인물의 모습이 보다 영웅적으로 그려진 건 불의에 저항한 이들에게 대한 경의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이들과 같이 불의에 순응하지 않는 이들이 있어 역사는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그들의 인생은 오랜 세월 겨울 속에 있었지만, 그들로 인해 민주주의 봄을 조금이나마 일찍 찾아오게 했다. '서울의 봄'은 진짜 정의를 위해 싸운 이들에 대한 헌시이기도 하다. 



사진 : 영화 서울의 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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