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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세계사에서 오랜 세월 선도적인 역할을 했던 나라다. 대항해 시대 후발주자였지만, 선발주자인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며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만들었다. 영국의 해외 식민지는 거의 전 대륙에 걸쳐 있었고 이는 영국을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영국은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산업혁명의 시작점이고 가장 먼저 산업화와 도시화를 이룬 나라였다. 이에 영국은 19세기 세계 최강국의 반열에 올랐고 세계 질서를 주도했다. 그들의 식민지 개척과 지배가 폭력적이고 불평등한 착취 구조 속에 이루어진 건 맞지만, 영국은 식민지의 막대한 자원을 바탕으로 나라의 부를 축적하고 부강한 나라가 됐다.

한편으로는 혁명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의회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 경제적 부와 선진 정치 시스템, 발전된 기술은 영국을 강대국 반열에 올려놓았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까지 국제 질서를 주도하는 강대국이었다. 또한, 냉전 시대 미국과 함께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에 맞서 자유 민주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나라이기도 했다. 

 

 

 




영국병의 치유자 대처 


하지만 영국은 1960년대 들어 쇠락의 길을 걸었다. '영국병'이라 불리는 국가적 무기력증이 나라 전반에 만연했고 고비용 저효율의 국가 시스템이 고착화됐다. 이에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하는 등 장기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고 인플레이션이 심화하면서 삶의 질도 악화됐다. 그 사이 영국 국민들의 근로 의욕도 점점 낮아졌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지나친 복지 우선 정책과 그로 인한 국가 재정 부담 가중, 과도한 산업의 국유화로 인한 생산성 저하와 비능률, 일부 대형 노조의 권력화로 인한 잦은 파업 등 과도한 노동권의 남용 등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했다. 변화가 필요한 영국이었지만, 복지 시스템 전반을 개혁하고 산업의 틀을 변화시키는 일은 국민적 반발을 불러올 수 있는 일이었고 쉽게 결행하기 힘들었다. 

이런 영국에 큰 변화를 몰고 온 인물이 영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인 대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총리 처칠과 더불어 영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정치인이다. 그는 앞서 언급한 영국병을 극복하고 영국의 정체된 성장 동력을 되살리는 등 경제적 큰 성과를 만들었고 실추된 영국의 국제적 위상을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대처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영국에서 보수당의 집권을 이끌며 총리로서 장기 집권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대처는 반대 여론을 강한 추진력으로 극복하고 정책을 추진하는 강한 정치인의 모습을 보였고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대처리즘으로 불리는 신자유주의의 입각한 정책들이 사회적 불평등을 더 심화시키고 제조업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등의 역효과로 장기적으로 영국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마녀 등 비판을 함께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지금도 대처에 대한 영국과 해외의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최근 한때 전 세계 경제의 중요한 흐름이었던 신자유주의의 한계점이 노출되고 관련한 사회적 문제가 심화되면서 신자유의 노선을 주창하고 이끌었던 인물인 대처에 대한 평가가 더 엇갈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엇갈리는 평가는 그가 그만큼 영국은 물론이고 세계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점을 방증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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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면서부터 정치인의 DNA 가졌던 인물 


대처는 1925년 영국 잉글랜드 중부 링컨셔 지역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오랜 세월 지역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했고 시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대처는 아버지의 선거 운동을 도왔고 그 과정에 자연스럽게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정치인의 꿈을 꾸게 됐다.

그는 수많은 영국 정치인들이 거쳐간 명문대 옥스포드 대학에 진학해 대학 내 정치 모임에 적극 참여하면서 정치인으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대처는 진보당인 노동당에 대해 우호적인 학교 내 분위기와 달리 보수당 정치 모임에 가입해 활동했다. 보수당 정치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대학 졸업 후 대처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보수당에 정신 입당해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했다. 그러던 그에게 보수당 의회 총선거 후보 공천의 기회가 찾아왔다. 24살에 때 일이었다. 그가 속한 보수당은 대처를 보수당이 약세를 보이는 지역에 전략 공천했다. 당선 가능성이 희박한 지역이었지만, 대처는 매우 열성적으로 선거 운동을 했다.

그 지역은 노동자들이 유권자의 다수를 이루는 곳으로 노동당이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이는 곳이었고 대처는 여성 정치인에 비 우호적인 차별적 분위기도 함께 극복해야 했다. 하지만 대처는 선거에 패하긴 했지만, 젊고 역동적인 여성 정치인의 이미지를 앞세워 선전했고 보수당에서 주목받는 신인 정치인이 됐다. 

이후 대처는 재력이 풍부한 사업가와 결혼했고 대처의 배우자는 그의 든든한 후원자로 평생을 함께 하게 된다. 이와 함께 대처는 아이를 출산한 이후 변호사 자격증을 획득하며 자신의 역량을 더 키웠다. 이런 대처는 보수당에 없었던 정치인으로 대중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을 것으로 보인다. 

 

 

 




여성 정치인에 대한 편견 뚫은 인물


마침내 1959년 의회 선거에서 대처는 34살의 나이에 당선되어 당당히 하원 의원이 됐다. 대처는 TV가 보급되고 미디어가 선거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시대 변화 속에서 그의 긍정적 이미지가 더 빠르게 대중들에게 알려질 수 있었고 전국구 정치인으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이후 대처는 보수당에서 요직을 역임했고 보수당이 집권했던 시기 장관까지 역임하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더 키워나갔다. 특히, 대처는 교육부 장관 재직 시 교육예산 삭감과 관련해 교육 환경 개선을 위한 예산의 효율적인 사용을 명분으로 초등학교 우유 무상급식을 폐지하는 조치를 했다. 이는 당시 대중들의 상당한 비판을 불러왔지만, 대처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는 그를 강력한 보수 정치인으로 자리 잡게 하도록 했다. 보수당 내에서 그의 정치적 입지는 한층 더 높아질 수 있었다. 

1970년대 들어 영국의 경제는 쇠퇴를 거듭했다. 미국이 절대 강국이 되는 상황에서 영국은 국제 질서에서 주도권을 잃었고 경제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영국의 제조업은 경쟁력을 잃었고 그 사이 일본 등 신흥 경제 강국이 급부상했다. 이 시기 영국은 앞서 언급했던 영국병이 심화되며 국가 전체에 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 시점에 기존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커졌고 새로운 정치, 새로운 인물에 대한 열망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대처는 여성이라는 특별함에 강력한 리더십을 갖춘 정치인의 이미지를 구축하며 대중들의 관심받았다. 

 

 

 




신자유주의 정책 강력히 추진한 대처 정권 


대처는 50세 나이에 남성들이 주도하는 보수당 당 대표 경선에 나서 승리하면서 최초의 여성 당 대표가 됐고 1979년 의회 총 선거에서는 보수당의 승리를 이끌며 영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 자리에 올랐다. 대처는 선거 캠페인 기간 집권 노동당의 경제 실정을 강하게 비판하고 소련에 강하게 맞서는 강력한 반공주의를 내세웠다. 또한, 성공한 정치인이자 가정주부로서의 이미지를 함께 보여주며 남녀 유권자 모두의 마음을 얻은 전략을 사용했다. 

그렇게 총리직에 오른 대처는 영국병 치유를 명분으로 신자유주의에 근거한 강력한 사회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대처는 영국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노조에 대한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특히, 영국 산업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석탄산업 탄광 노조와의 강대 강 대결은 사회적으로 큰 이슈였다. 

대처는 산업구조 개편과 에너지 생산 등의 구조 개편과 관련해 비효율적이고 정부 지원에 의존해 유지되는 석탄산업의 구조조정을 단행하려 했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광산 중 상당수를 폐쇄하고 대량 실업도 불가피했다. 하지만, 석탄산업은 영국이 세계 최강국이 되도록 하는 계기가 된 산업혁명 시기부터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긴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많은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광산노조의 규모 역시 매우 컸다. 석탄산업의 구조조정은 필연적으로 노조와의 충돌을 불가피하게 했다. 

광산노조는 이에 반발해 파업에 돌입했고 강력히 저항했다. 대처도 물러서지 않았다. 장기간의 파업으로 영국 산업 전반에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지만, 대처는 파업에 대비해 석탄 화력발전의 비중을 줄이는 전력 생산 체계 개편과 석탄의 비축량 확보 등으로 대응했다. 또한, 장기간의 파업에 따른 노조에 대한 여론 악화를  십분 활용했다. 공권력을 동원한 강경 진압도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광산노조의 파업을 종료됐고 석탄산업의 구조조정도 계획대로 이루어졌다.

이는 대처가 주도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상징하는 일이었다. 이후 대처 정권은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강력히 추진했다. 이에 중요 기간산업들도 민간 기업에 넘어갔다. 대대적인 민영화는 정부 조직의 구조조정과 맥을 함께 했다. 신자유주의 가 지향하는 민간의 무한 경쟁과 작고 강한 정부를 대처는 강력히 추진했다.

그 결과 국영기업의 매각으로 인한 수익은 국가 부채를 줄이고 재정건전성을 확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대량 실업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민영화는 각종 요금의 인상을 불러왔다. 전기, 수도요금의 인상은 서민들에게는 더 큰 타격이었다. 이에 대처에 대한 반대 여론도 함께 상승했다.

 

 

 




대처 장기집권 발판이 된 포클랜드 전쟁 


이런 대처에 중요한 전환점이 마련됐다. 1982년 아르헨티나 인근 대서양의 영국령이었던 섬 포클랜드의 지배권을 둘러싼 포클랜드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처 정권을 정부 조직의 슬림화와 함께 국방비 지출도 또한 삭감했다. 대신 친미 노선을 강화하면서 국가 안보의 공백을 메우는 외교정책을 시행했다. 그 사이 먼 대서양의 섬 포클랜드의 방비는 약해질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군부정권은 그 팀을 파고들었고 군대를 파견해 포클랜드를 점령했다. 

이와 관련해 영국에서는 외교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대처는 과감히 영국군을 포클랜드에 파병해 군사적을 대응했고 양국의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했고 이는 대처의 인기를 다시 치솟게 했다. 이 전쟁의 승리는 영국민들의 떨어진 자존감을 회복하게 했다. 이는 대처가 장기집권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포클랜드 전쟁 후 1983년 의회 총선거에서 보수당이 대승을 거뒀고 대처는 총리 연임에 성공했다. 이를 발판으로 대처는 더 강력히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했다. 대처 정권은 복지 축소를 강력히 단행했다. 특히, 공공임대 주택의 매각을 강력히 시행했다. 이를 통해 정부의 수익을 확충했다. 하지만 이는 다수의 임대주택 거주자들을 더 궁핍하게 했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빈부 격차를 더 심화시키는 일이 됐다. 

하지만 그 한편에서 국영기업의 민영화 과정에서 국민주를 적극 매각해 영국 금융업의 발전을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 대처 집권기 영국은 금융업이 크게 발전했다. 한편으로 산업의 구조조정과 정부 조직 슬림화 등을 통해 재정이 확충되고 경제성장을 이루고 인플레이션을 감소시키는 등의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빈부 격차와 사회 양극화 심화라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이에 대처 정권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엇갈리기 시작했다. 대처는 대중문화에서 중요한 풍자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대처는 자신의 정책 기조를 절대 바꾸지 않았다. 이에 대해 영국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2세도 대처의 정책에 대해 이례적으로 비판을 하는 등 대립관계를 형성할 정도였다. 

 

 

 




대처에 대한 엇갈린 평가


이런 대처의 시대는 1987년 3연임에 성공한 이후 점점 내림세를 보였다. 대처는 당시 활발히 진행 중인 유럽연합의 확대에 부정적이었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주창하는 자유무역에는 배치되는 반하는 일이었다. 또한, 대외 정책에서 전 세계적으로 큰 비난을 받고 있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에 대해서 미온적인 대처로 비난을 받았다. 아울러 자신의 아들과 관련한 스캔들도 대처에게는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결정적으로 그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 일은 과감히 추진한 조세정책에 있었다. 대처는 국가 재정 확충을 위해 인두세를 도입했다. 이는 소득수준을 고려하지 않는 인구 수에 비례한 징수를 근간으로 했다.  이는 조세의 형평성을 무시한 것으로 그에 대한 반대 여론을 더 극대화했다.

결국, 1990년 대처는 보수당 내에서도 그에 대한 반발이 확산됐고 보수당 당수와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장기집권의 끝은 이렇게 허무했다. 이후 대처는 정계에서 은퇴했고 강연 등을 하며 살다 2013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과 관련해 영국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여론과 그의 집권에 정책에 대한 비판 여론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만큼 그는 그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인물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대처 집권기 추진됐던 신자유주의 정책은 이후 상당수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국가에서 적용됐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보수정권 집권기 우리나라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강력히 추진됐다. 이와 관련해 여러 부작용이 발생하고 사회적 갈등도 커지고 있다.

이에 찬사를 받았던 신자유주의에 대한 회의론이 커지고 있다. 대처가 신자유주의의 마녀로 비판받는 건 신자유주의에 대한 평가와도 함께 한다. 대처는 앞으로도 논란의 정치인으로 계속 남을 것으로 보인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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