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에서 가장 강렬하게 다가오는 캐릭터 중 하나는 바이킹이다. 뿔이 달린 투구로 대표되는 강인한 인상과 우월한 피지컬을 가진 전사들과 그들의 강력한 전투력이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이는 바이킹을 게임이나 각종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로 자주 활용하게 했고 대중들에게도 그 존재가 각인되도록 했다.
서구의 문화에서 바이킹은 그리스, 로마 신화와 함께 북유럽 신화로도 그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북유럽의 신화는 SF의 영화 등에서 캐릭터로 나오는 천둥의 신 토르부터 전쟁의 신인 오딘, 불의 신인 오키 등 수호신들이 등장한다. 또한, 확고한 내세관을 바탕으로 한 신의 영역이 존재한다. 이에 바이킹의 전사들은 전투 중 장렬히 전사한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고 전해진다. 이런 북유럽의 신화는 전 세계적으로 크게 흥행한 영화 '반지의 제왕'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이 점에서 바이킹의 문화는 현재에도 서구 문화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는 유럽의 중세 시대였던 8세기부터 11세기까지 이어진 바이킹의 적극적인 대외 진출과 정복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바이킹들은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한 침략자이자 약탈자였다.
하지만 바이킹들은 약탈자와 침략자를 넘어 북유럽을 포함해 유럽 곳곳에 나라를 세웠고 그 영역을 이슬람 지역과 심지어 북아메리카 지역까지 확장했다. 당연히 그들의 문화와 전통도 함께 퍼져나갔다. 이는 중세 유럽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이킹을 함께 알아야 하는 이유다.
북유럽 전사들의 본격적인 대외 진출
바이킹이 유럽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건 앞서 언급한 대로 8세기 무렵이다. 바이킹들은 덴마크와 노르웨이와 스웨덴까지 지금의 북유럽 일대를 중심으로 부족을 이루며 살았다. 그 지역은 지금도 그렇지만, 척박한 환경과 긴 겨울로 정착 생활을 하기 힘들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바이킹은 강해져야 했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자원은 항상 부족했다. 한정된 자원을 두고 치열한 경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 속에서 강한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들은 강해져야 했다. 이는 그들의 강인한 전사가 되도록 했다.
이렇게 강력한 전사 집단이 된 바이킹은 그들의 근거지인 스칸디나 반도 일대를 벗어나 유럽으로 진출했다. 환경적 요인으로 다져진 강력한 전투력에 많은 섬들이 있는 지역의 지리적 여건 속에서 발전한, 뛰어난 항해술과 조선술은 그들의 경쟁력이었다. 특히, 그들의 배는 매우 빠르고 전투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대외진출 초기 바이킹은 식량 등 자원 확보를 위한 약탈전에 나섰다. 그들의 주 타깃은 수도원 등 종교 시설이었다. 중세 유럽은 기독교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시대였고 교회의 절대적 권위는 거대한 권력이 됐다. 이는 기독교 교회에 돈이 몰리도록 했고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외적에 대한 방비도 상대적으로 허술했다.
이 중 지금의 영국 지역은 해안가에 많은 수도원과 교회가 있었다. 바닷길을 주로 이용하는 바이킹들에게 영국, 잉글랜드의 수도권과 교회는 매우 손쉬운 약탈 장소였다. 바이킹이 약탈전이 본격화되던 8세기 후반 많은 잉글랜드의 수도원이 바이킹에 의해 약탈되고 수도원과 인근 지역의 사람들이 학살됐다. 사로잡힌 이들은 노예 시장에서 팔려나갔다. 이런 바이킹을 잦은 약탈과 파괴행위는 잉글랜드에는 큰 고심거리였다.
약탈전에서 정복 전쟁으로
바이킹의 세력 확장은 이에 머물지 않고 영토의 확장과 정복전쟁 형태로 변화했다. 이 시점에 등장하는 바이킹의 왕이 라그나르 로드 브로크다. 그가 실존 인물이었지에 대한 논란은 아직 진행형이고 전설과 같은 존재지만, 그는 바이킹 왕국의 역사를 연 인물로 남아있다. 라그나르 왕은 바이킹의 정복 활동을 이끌었지만, 잉글랜드에서 생포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죽음은 큰 폭풍을 몰고 왔다.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대규모의 바이킹 정복군을 구성했고 잉글랜드에 대한 전면 침공에 나섰다. 865년 일어난 이 사건은 바이킹의 잉글랜드 대침공, 이교도 대군세로 불린다. 바이킹의 군대는 잉글랜드 전역을 휩쓸고 다니며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 당시 잉글랜드는 하나의 통합된 나라가 아닌 각 지역에 왕들이 통치하는 상태로 바이킹의 대침공에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반대 바이킹은 뛰어난 전투력과 무기 제조 기술 등을 바탕으로 잉글랜드 왕국들을 힘으로 압도했다. 바이킹들은 잉글랜드 지역을 점령하고 정착했고 바이킹 왕국을 세우며 잉글랜드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런 바이킹들에 대항해 잉글랜드 위섹스 왕국의 알프레드 국왕이 구원자로 등장했다. 그의 군대는 바이킹 군대를 차례로 섬멸했고 영토를 수복했다. 그리고 평화협정을 통해 전쟁을 종식했다.
이후 잉글랜드는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됐고 민족의식이 형성됐다. 그리고 지금 영국의 북쪽에는 바이킹들이 왕국을 세우고 잉글랜드 왕국과 바이킹이 공존하기 시작했다. 이른 영국 내 바이킹의 문화과 전통이 전파되는 계기가 됐다. 영어의 요일 이름은 바이킹의 신화 속 신들이 이름에서 유래됐다.
정착과 국가 형성
영국에서 바이킹과 잉글랜드의 공존과 교류의 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위섹스 왕국을 중심으로 잉글랜드의 반격이 본격화됐고 927년 바이킹들의 영국에서 축출됐다. 이후 잉글랜드 왕국의 역사가 시작됐다. 잉글랜드에서 밀려나긴 했지만, 바이킹들은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는 부족 체제에서 그들의 본거지나 새로운 정착지에서 나라를 세우고 국가적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덴마크 왕국과 노르웨이 왕국이 건국됐다. 또한, 바이킹의 대외 진출은 북극권으로 이어져 불모의 땅이었던 화산섬 아이슬란드 개척과 정착으로 이어졌다. 이에 그치지 않고 바이킹들은 그린란드를 거쳐 1000년 경에는 지금의 캐나다 북동부 해안에 진출에 정착촌을 건설했다. 이는 바이킹들이 콜럼버스보다 훨씬 일찍 아메리가 대륙에 진출한 유럽인이라 할 수 있다. 실제 관련 유적지와 유물이 캐나다에서 발견되며서 이는 정설이 됐다.
바이킹의 대외 진출은 동유럽과 남부 유럽 심지어 이슬람 지역까지 광범위하게 계속됐다. 동유럽으로 진출한 바이킹들은 약탈자의 면모보다는 상인으로의 면모를 보이며 지금의 튀르키예와 이라크 지역에서까지 활동하며 동. 서양 무역에서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슬람 왕조가 혼란이 빠진 시점에는 약탈자로 변모하기도 했다. 바이킹의 이슬람 지역에서 영향력은 몽골 제국의 정복활동이 활발히 진행되는 시점까지 지속했다.
이후 바이킹들은 13세기 경 지금 러시아의 원형이 되는 키예프 루스 왕국을 건설하며 유럽 역사의 한 줄기를 형성했다. 또한, 바이킹은 서유럽의 역사를 바꾸기도 했다.
중세 봉건제 틀 속으로 편입
중세 시대 바이킹들은 잉글랜드는 물론이고 유럽의 강국 프랑크 왕국에도 지속적인 침략을 했다. 특히, 유럽 남부 지역에 침략한 이들은 북쪽에서 온 자들이라는 의미의 노르드족 또는 노르만족으로 불렸다. 이들은 프랑크 왕국에 큰 위협이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프랑스의 원류인 서 프랑크의 왕 샤를 3세는 911년 노르만족 지도와 롤로와 협상해 그에 공작의 작위를 내리고 봉건제 시스템 틀안에 포함하도록 했다. 그들의 영지는 지금의 프랑스 북부 해안의 노르망디 지역이다. 그렇게 세워진 노르망디 공국은 국왕에 충성을 서약하고 다른 바이킹들의 침략을 막는 역할을 했다.
노르만족들은 그들의 본거지 스칸디나 지역보다 훨씬 온화하고 생활 여건이 나은 정착지에 사는 것이 그들 민족의 지속성을 유지하는 데 유리했다. 한 왕조의 귀족으로 편입되는 건 하나의 왕조로 정통성을 유지할 수 있는 명분이 될 수 있었다. 이후 노르망디 지역에는 많은 바이킹들이 이주했고 정착지로 자리를 잡았다. 유럽의 귀족에 포함된 노르만족들은 이후 유럽 타 왕국과의 혼인 등으로 그 입지를 더 단단히 할 수 있었다.
그 한편에서 덴마크 출신의 왕 크누크 왕은 1028년 경, 덴마크는 물론이고 잉글랜드와 노르웨이를 함께 관할하는 북해 제국을 건설하며 바이킹 시대의 최 전성기를 이끌었다. 북해 제국이 힘을 잃은 이후 잉글랜드에는 왕위 계승을 위한 내분이 발생했고 무력 충돌로 연결됐다.
현 영국 왕실의 시조이자 프랑스와 영국, 100년 전쟁의 원인 제공자
이 무력충돌은 왕위 계승 전쟁이 됐다. 이 전쟁은 사실상 바이킹의 후손들인 노르만족들의 전쟁이었다. 이미 잉글랜드의 왕실과 왕위 계승이 가능한 귀족들은 노르만족과 혼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의 승자는 잉글랜드인이 아닌 노르망디 공국의 왕 윌리엄 1세였다. 이를 통해 잉글랜드의 침략자였던 바이킹족이 잉글랜드 왕실을 계보를 이어가게 됐다. 이 왕조는 지금까지 현대 영국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윌리엄 1세의 즉위는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마저 변화시켰다. 1066년 윌리엄 1세는 노르망디 공국 영주의 즉위를 유지한 채 잉글랜드 국왕 자리에 올랐다. 한 나라의 국왕의 또 다른 나라의 왕에서 충성을 서약하는 영주가 되는 묘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는 잉글랜드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프랑스로서도 다른 나라의 왕이 자국 영토에 영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정상적이지 않았다.
이런 관계는 프랑스 내 잉글랜드 국왕 영지에 대한 경제적 이해관계와 프랑스 왕위 계승 등과 관련한 갈등이 겹쳐지며 100년 전쟁이 중요한 원인이 되고 말았다. 이 전쟁은 양국의 관계를 유럽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로 만들었고 양국에는 민족의식의 분명하게 자리하는 계기가 됐다. 이 또한 바이킹의 대외 진출이 있어 발생한 일이다.
이처럼 바이킹은 중세 유럽의 역사를 뒤흔드는 존재였다. 결과적으로 바이킹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잃었지만, 유럽 문화 곳곳에 바이킹의 전통과 문화적 유산이 남아있다. 또한, 그들의 후손들은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북유럽의 선진국을 만들며 번영을 누리고 있다.
북유럽인들은 그들이 바이킹의 후예라는 사실을 여전히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바이킹에는 약탈자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적극적인 대외 진출은 유럽의 변화를 촉진했다. 그들이 약탈자로만 머물렀다면, 자신의 위치에 안주해 있었지만, 역사의 변화를 이끌 수 없었다. 그 점에서 바이킹의 역사는 눈에 보이는 단면으로만 살필 수 없다.
사진 : 프로그램 / 위키백과,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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