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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 또는 삼국지연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삼국지라 부르는 중국의 고대 소설은 원나라 말기와 명나라 초기 살았던 나관중이 집필한 소설로 알려져 있다. 나관중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치열하고 길었던 대결과 전쟁의 역사로 할 수 있는 위나라, 촉나라, 오나라가 경쟁했던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작품을 집필했다. 

이 시대는 후한 말기 극심한 혼란기에 등장한 수많은 영웅들의 이야기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중국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했던 삼국과 각 나라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삼국지연의에는 수많은 인문들이 등장하고  방대한 서사와 함께 총 2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국지연의는 방대한 양에도 각 인물들의 입체적인 묘사와 시대 상황과의 조화, 흥미로운 내용 전개로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읽히고 있는 스테드 셀러다. 이에 삼국지연의는 수호전, 서유기 등과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고전 소설로 긴 세월 자리하고 있다. 어떤 삼국지연의를 서양의 대표적 영웅 서사시인 일리아드와 비교하기도 한다. 

이런 삼국지연의는 작자적 상상력이 상당 부분 반영된 소설이지만,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 근거는 삼국을 통일하게 중국을 지배한 서진 왕조의 관리 진수가 집필한 정사 삼국지다. 그는 삼국이 경쟁하던 시기 유비가 건국한 촉한의 관리였지만, 촉한이 멸망한 이후 서진의 관리가 됐다.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서진 왕조의 기록을 관리하는 일을 했고 문서 담당 관리로 일했다. 그 속에서 삼국과 관련한 기록들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고 그 안에는 역사기록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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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삼국지에 가려진 정사 삼국지 


진서는 삼국에서 기술한 각국의 역사서를 기초로 100여 년의 삼국 경쟁의 시대를 정리했고 삼국지를 완성했다. 이 삼국지는 총 6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한 시대 대표적 역사가였던 사마천부터 시작한 기전체 양식을 따랐다. 기전체는 연대순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편년체와 달리 인물들을 중심으로 기술한다.  진서 역시 그에 따라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인문들을 중심으로 기술했다. 중요 인물만 해도 540여 명에 이른다.

이 소설의 바탕이 되는 건 길었던 삼국의 경쟁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왕조인 서진의 관리 진수가 집필한 정사 삼국지다. 진수의 삼국지는 서진이 건국한 직후 집필이 시작되어 그가 세상을 떠나는 해인 297년까지 작업이 이어진다. 이후 시대가 흐르면서 진서의 삼국지가 전해지고 다시 미반영된 기록이 추가되는 등의 과정을 거쳐 송나라 때 이르러 현대에 전해지는 삼국지의 원형이 만들어진다. 

시대 흐름에 따라 변화가 있었지만, 진서의 삼국지가 그 원형임은 달라지지 않았다. 특히, 진서의 삼국지는 기록이 간결하고 서사가 명확해 역사사에서 가장 중요한 신뢰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기초한 삼국지연의는 집필의 의도가 삼국지를 알리는 것에 있었다. 그만큼 진수의 삼국지는 후대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 삼국지는 진수의 삼국지가 아닌 나관중의 삼국지가 더 익숙하다. 소설이 주는 재미와 서사가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앞서 언급한 대로 작가의 상상력이 상당 부분 반영되어 실제 역사와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유비가 한나라 황실의 일원이었다는 소설의 내용은 진수의 삼국지에는 없는 내용이다. 후한의 국정을 장악하고 폭정을 일삼던 동탁에 맞서 일어난 군벌 연합군의 전투에서 관우가 조조가 따라준 술잔의 술이 식기 전에 적장의 목을 베어 왔다는 에피소드 역시 허구다. 실제 동탁과의 전투에서 군벌들의 구심점이 된 인물은 원소였다. 당시 관우가 목을 베었다는 적장 화웅을 상대한 이도 관우가 아닌 손견이었다.

 

 




소설과 크게 다른 역사 


이 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정사 삼국지와 삼국지연의는 차이를 보인다. 정사 삼국지는 삼국이 통일한 직후 기술된 역사로 보다 사실에 근거한 내용이다. 또한, 서진이 위나라를 그 전신으로 한다는 점에서 정사 삼국지에서는 위나라의 비중이 매우 크다. 위나라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유비의 촉나라, 손권의 오나라의 내용을 열전으로 엮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 관우, 장비가 가장 비중 있게 등장하고 유비의 촉나라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유비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제갈량이 주인공이 된다. 위나라를 세운 조조는 일종의 악역이나 간웅으로 등장하고 오나라의 손권 등도 소설에서는 긍정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삼국지연의의 독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유비와 제갈량에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시 시대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런 진서의 정사 삼국지와 관련해 삼국의 연구에 저명한 학자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다. EBS 위대한 수업에서는 중국 역사 문화 학자인 팡베이천 교수의 강의를 10회에 걸쳐 방영한다. 그는 대중들이 삼국지연의를 중심으로 당시 중국 역사를 보는 것에서 벗어나 보다 정확한 역사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아울러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정사 삼국지의 내용과 역사적 가치도 함께 알 수 있게 한다.

삼국지의 주 내용이 되는 삼국시대의 시작은 후한 말기인 184년 일어난 황건적의 난을 기점으로 한다. 당시 후한의 조정은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린 환관들이 국정을 농단하면서 국가 운영 시스템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속에서 일반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갔다. 이 시기 태평도라는 신흥 종교가 민중들의 지지를 얻었고 그들을 중심으로 중앙 정부에 대응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난다. 황건적의 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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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년 황건적으로 난으로 시작한 삼국시대 


이 황건적의 난을 당시 중앙 정부는 진압할 힘이 없었다. 중앙군의 부족함은 지방정부가 메워야 했다. 이에 황건적 토벌을 위한 지역의 군벌들이 군대를 일으켰다. 군벌들은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우지만, 그들은 점점 중앙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으로 발전했다. 이에 중앙집권체제는 무너지고 후한은 급속히 분열기로 접어들었다. 이후 군벌들 간 무력 충돌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후한은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 혼란기에 후한 조정에서는 국정을 농단하는 십상시로 불리는 환관 세력들의 척결을 시도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 목적을 위해 강한 군사력을 가진 군벌 동탁과 손을 잡게 된다. 동탁은 환관 세력들을 척결하는 데 힘을 보태지만, 이미 딴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국정을 장악하고 기존 황제를 폐위하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했다.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다. 황제의 신병을 확보한 동탁은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 전권을 장악했다. 

동탁은 국정을 잘 이끌어 혼란한 나라를 수습하기보다는 개인적 사욕을 채우기를 우선했고 독재자의 길을 걸었다. 이에 지역의 군벌들은 반발해 연합군을 조직했고 동탁에 대항했다. 결국, 동탁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며 몰락했지만, 황제의 권위는 더 추락하고 중앙 정부가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이후 후한은 빈 껍데기만 남고 지역의 군벌들이 약육강식의 대결을 하는 과거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혼란기가 시작됐다. 이런 치열한 경쟁 시기를 뚫고 세 명의 영웅이 등장했다. 그들은 각자 나라를 세우고 경쟁했다. 조조의 위나라는 220년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로부터 조조의 아들 조비가 양위를 받으면서 건국됐다. 221년에는 우유비가 적벽대전 이후 익주를 장악한 이후 촉한을 건국했다. 229년에는 장강의 하류, 강남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손권이 오나라를 건국했다. 

이들 세 나라는 모두 각자를 황제의 나라로 칭했다. 세 명의 황제는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할 수 없었다. 이들은 서로 대결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경쟁했다. 이들의 경쟁은 263년 유비와 제갈량 사후 그 세력을 급속히 위축된 촉한이 위나라에 멸망했다.

 

 




삼국의 멸망 


위나라는 265년 위나라의 실력자 사마의의 아들 사마염이 위나라 황제에 선양을 받는 형식으로 서진을 건국하며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후 서진에 맞서던 오나라가 280년 멸망하면서 삼국시대 역사가 막을 내렸다. 184년부터 시작해 100년이 넘는 세월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삼국지연의의 중심을 이루던 인물인 유비, 조조, 손권, 제갈량 중 누구도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했다. 그들을 이어가는 후대에 각 나라는 멸망했다. 다소 허무한 결말이다. 

하지만 이런 각 나라의 흥망성쇠 속에서 많은 교훈을 얻게 된다. 강성하던 나라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고 힘든 여건에서 이를 극복하고 강한 나라로 발전하는 과정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도 한다. 소설이 아니라 해도 정사 삼국지의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를 가질만한 이야기가 삼국지다. 

또한, 정사 삼국지를 통해 당시 시대상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삼국지연의의 중심인 촉한이 사실은 삼국 중 가장 국력이 미약했음을 알 수 있다. 영토 면에서 조조의 위나라는 당시 중국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화북지역을 장악하고 있었고 서역과의 무역로를 포함에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인구 역시 400~500만여 만 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에 비해 촉한은 지금 중국의 쓰찬 지역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고 그 영토가 가장 작았다. 인구 역시 100만 명이  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쓰찬 지역은 고온 지대로 방어에는 유리함이 있었지만, 당시 중국의 변방으로 영토 확장에 제한이 있었다. 이는 촉한에는 매우 불리한 환경이었다.

장강 하류를 장악한 오나라는 촉한에 비해 큰 영토였지만, 위나라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인구 역시 200여만 명 수준이었다. 영토와 인구의 차이는 삼국 경쟁의 중요한 요소였던 군사력 차이를 만들었다. 위나라는 40에서 50만 명 수준의 병력 동원이 가능했지만, 촉한은 10만여 명 오나라는 20에서 30만 명 수준의 병력 동원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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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해야 할 전쟁의 비극


참고로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삼국을 다 합쳐도 그 인구가 크게 감소했다는 점이다. 후한의 역사서 등을 종합하면 후한의 인구는 5천여만 명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삼국시대 총 인구 규모는 천만여 명으로 크게 감소한다. 오랜 전쟁과 자연재해와 전염병이 겹치며 인구가 크게 감소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기록이 유실되고 국가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인구 관리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측면도 있다. 

이는 전쟁이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 국가 시스템의 붕괴가 일반 국민들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하면 위나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가장 하이라이트 장면이라 할 수 있는 적벽대전은 조조의 남하에 유비와 손권이 힘을 합쳐 대응하는 것이 주내용이다. 이는 삼국시대에도 이런 구도가 지속됐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과정에서 형주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촉한과 오나라가 크게 대립하고 전면전을 펼치기도 했지만, 중요한 대결의 구도는 남하는 위나라에 촉한과 오나라가 맞서는 구도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대립하던 시기 고구려의 남하가 본격화하는 시점에 백제와 신라와 동맹을 맺고 함께 대응했던 구도와 유사하다.

이런 구도 속에서 촉한은 가장 답답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대외 확장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구도의 지속은 촉한이 고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유비 사후 촉한의 국정을 총괄한 제갈량이 국경을 넘어 남쪽 지역 정벌에 나서고 끊임없이 위나라 정벌을 위한 시도를 한 건 삼국통일의 명분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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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성공하지 못한 북벌에 담긴 의미 


제갈량의 북벌은 가장 열세인 국력에 있는 나라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국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국력의 차이를 극복하긴 힘들었다. 제갈량을 매우 적극적으로 북벌에 나섰지만, 기대했던 성과를 얻지 못했다. 촉한의 북벌은 제갈량이 전쟁 중 세상을 떠나면서 동력을 잃었다.

그의 후계가 강유가 북벌을 지속했지만, 성과가 크지 않았고 결국, 촉한은 유비를 이은 황제 유선의 무능과 군사적 실패가 겹치며 패망을 길을 걷고 말았다. 소설 삼국지연의 독자들에게 촉한의 멸망은 가장 큰 안타까움이었지만, 당시 삼국의 국력 등을 고려하면 정해진 일이라 할 수 있다. 

오나라는 손권이 수성의 달인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삼국 중 가장 긴 세월 나라를 유지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가장 개발이 늦었던 장강 하류, 강남 지역을 개척하며 중국의 영역을 확대하기도 했다. 강남 지역은 이후 막대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경제적 요충지가 됐다. 지금도 이 지역은 중국 경제의 중심이다. 하

지만 오나라 역시 수성만으로 나라를 장기간 존속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들 역시 촉한을 멸망시킨 후 더 강해진 서진에 멸망당하는 비운으로 피하지 못했다. 이렇게 치열한 삼국의 경쟁을 끝낸 서진이지만, 그 역사는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서진은 북방 민족들의 침략과 지도층의 권력 투쟁으로 인한 내분이 겹치며 316년 멸망하며 단명하고 말았다.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왕조의 허무한 결말이었다. 진수가 정사 삼국지를 집필할 정도로 서진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기록 보존하는 노력을 했지만, 국가의 지속을 위한 교훈을 얻지 못했다.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라는 점은 서진의 집권층은 알지 못했다. 

삼국지는 역사의 화려함 이면에 담긴 여러 장면을 통해 그런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고 그에 근거한 소설 삼국지연의 역시 다르지 않다. 이 점에서 실제 역사와 소설을 균형 있고 살피고 각 인물들을 입체적으로 분석하는 건 과거는 물론이고 지금의 현상들을 살피는 안목을 높이는 일이 될 수 있다. 


본 게시글은 EBS 스토리 기자단 18기 활동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사진 : EBS,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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