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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6월은 호국보훈의 달로 순국선열과 전몰자들을 추모한다. 특히, 6월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아픔을 남겼고 그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고 있는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달이기도 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최고 권력자 김일성 주도로 인민군의 전면적이 남침과 함께 시작한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휴전협정으로 그 진행이 중지됐고 그 상태는 반세기를 넘어 70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 

전쟁은 전 국토를 황폐화시켰고 남한과 북한 모두에 심각한 인명 재산 피해를 발생하게 했다. 분단의 고착화는 수많은 이산가족을 발생시켰고 대다수의 이산가족들은 그 아픔을 수십 년간 간직한 채 세상을 떠났다. 현재 남아있는 이산가족들도 대부분 고령으로 기다림을 지속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그 무엇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이산가족 문제지만, 남한과 북한이 강하게 대립하는 상황 속에서 이산가족 만남은 아주 제한적으로 소수만 이루어졌다.

이런 아픔과 함께 수천 년 이어진 단일 민족의 전통은 분단이라는 장애물로 일부가 단절되고 이질적인 정치 체제와 문화 속에 점차 민족적 동일성도 희미해지고 있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우리 민족이지만, 남북 분단과 대립의 상황은 서로를 적대시하게 했고 불신의 늪 속으로 서로를 빠져들게 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노력은 지속됐지만, 정치적 상황과 국제 정세 속에 확실한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

남북 분단은 전쟁의 위협이 진행형으로 만드는 일이기도 하지만, 경제적으로 그리고 대외 관계 속에서 우리 민족의 발전을 막는 중요한 장애물이 되고 있다. 남북의 평화 공존, 통일은 단순히 민족적 동질성 회복 문제 이전에 공동의 번영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 필요성에도 평화공존, 통일은 메아리 없는 구호, 이상주의로 치부되고 있다. 주변 강대국들 역시 남북의 화해 협력, 공존에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현실이다. 이 점에서 남북 분단을 고착화한 6.25 한국전쟁은 그 점에서 세계사적으로 분석하고 살필 필요가 있다. 

 

 

 




심화하는 냉전 체제 속 일어난 열전


6.25 한국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롭게 전 세계 질서를 재편한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이 중심이 된 냉전체제 속에서 발생한 열전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서로를 적대시하고 강하게 대립했지만, 직접적인 군사 충돌은 최대한 자제했다. 양국에는 막대한 핵무기를 상호 보유하고 있고 군사적 충돌은 필연적으로 지구의 파멸을 불러올 수 있다. 이는 서로에게 큰 부담이었다. 양 강대국의 대립은 국지전의 양상으로 표출됐다. 6.25 한국전쟁은 그 국지전이나 열전 중 가장 장 규모의 전쟁이었다. 

6.25 한국전쟁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남. 북의 분단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논의하는 강대국들에 의해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한반도 문제가 먼저 연합국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논의된 건 1943년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열린 회담에서였다. 그 회담에는 미국과 영국, 중국이 참가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장개석 정부와 함께 중일 전쟁에서 일제에 맞서 연합국 일원으로 전쟁을 수행 중이었다. 해외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외교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에 연합국들은 한국이 일제의 부당한 식민 지배를 받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고 전후 독립시킬 것을 확인했다.

회담 후 발표된 카이로 선언에서는 조선민이 일제에 의해 노예 상태에 있음을 인지하고 전후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자주독립시킨다는 문구가 들어갔다. 일제의 영역에 있었던 나라 중 그 이름이 명확히 거론되고 자주독립에 대해 언급된 건 한국이 유일했다. 일제 강점기 쉼 없이 전개한 독립운동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자주독립의 시점이 명확하지 않았고 이는 분단이라는 또 다른 비극의 전조였다. 

전쟁이 연합국 측의 승리로 완전히 기운 이후 열린 1945년 얄타 회담은 한반도의 분할과 신탁통치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회담이었다. 이 회담은 전후 독일 처리 문제와 관련해 독일의 분할과 전범재판 실시 등을 논의했다. 또한, 아시아 태평양 전선에서 강하게 저항하고 있는 일본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기 위한 소련의 대일 전쟁 참전도 함께 논의됐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에 대해서는 강대국들에 의한 신탁통치가 합의됐다. 그와 관련한 공식 문서는 없지만, 미국은 전후 소련의 세력 확장을 경계하고 있었고 이를 막을 안전판이 필요했다.  한반도 신탁통치 안은 미국의 주도로 논의됐다. 

이 회담 후 그 해 5월 나치 독일이 먼저 연합국에 항복을 했고 항복을 거부하던 일본도 2발의 핵폭탄이 투하된 이후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1945년 8월 15일의 일이다. 이렇게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 지배를 벗어나 광복을 맞이했지만, 우리 민족이 주체가 된 국가를 수립할 수 없었다. 

 

 

얄타회담멤버 - 위키백과

 




원치않았던 광복 후 분단 


예상보다 빠른 소련의 한반도 진출에 미국은 서둘로 가이드라인을 만들었고 위도 38도선을 중심으로 소련의 남하를 막으려 했다. 38도선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않았고 임의로 정해진 선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그어진 38도선은 결과적으로 긴 세월 남북을 갈라지게 하고 말았다.

이후 광복 정국은 강대국들에 의한 신탁통치와 관련한 찬탁과 반탁으로 국민들의 크게 대립하고 각 정치 세력들이 이합집산하는 혼돈의 시기를 거쳐야 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사들이 암살당해 세상을 떠나는 일도 있었다. 국내에서 활동했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여운형이 총탄에 세상을 떠났고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김구 역시 암살을 피하지 못했다. 

이후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이 남한과 북한에는 미국과 소련이 지원하는 정부가 들어섰다. 남한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가 확립되고 모든 국민이 참여하는 보통 선거에 의해 제헌 의회가 만들어지고 1948년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정부가 수립됐다. 북한에는 소련이 지원하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한반도는 미국의 민주주의 진영과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가 대립하는 구도가 형성됐다. 

이런 남북의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도 있었지만, 강대국들이 주도하는 냉전 체제 속에 빠져들어간 한반도의 분단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남북은 다른 정치 체제 속에 긴장과 대립의 관계가 형성됐고 체제 경쟁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경쟁이 보다 나은 정치, 국가 운영으로 이어졌다면 상호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었지만,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된 김일성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북한의 권력을 장악한 직후부터 남한을 무력으로 점령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의 지원을 받아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된 김일성은 집권 초기부터 소련과 밀월 관계를 유지했다. 김일성은 그 과정에서 소련에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요청했고 남침에 의한 무력 적화통일 계획의 승인을 요청했다. 하지만 소련은 이런 제안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소련은 미국에 대항하는 공산주의 맹주가 됐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치열한 전쟁이었던 독소전쟁을 치르면서 막대한 인명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수천만명의 인명이 전쟁 중 사망했고 상당수 청년 남성들이었다. 이는 경제 재건을 하는 데 있어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전후 소련은 국가 재건이 시급했다. 또한, 대외 팽창에 있어서도 유럽이 우선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부동항도 북한을 사실상 위성 국가로 두면서 일정 해결이 됐다. 다시 전쟁을 하는 데 소련은 부담이 컸다. 

또한, 미국은 세계대전에서 본토가 피해를 입지 않았고 막대한 공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경제적으로 절대 1강 국가가 됐고 큰 호황기를 누리고 있었다. 또한, 맨허튼 프로젝트를 통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고 이를 실전에 사용한 유일한 국가였다. 소련으로서는 유일한 핵보유국 미국과의 군사적 충돌을 하기 힘들었다. 

 

 





김일성의 야욕과 그런 야욕을 불러온 국제정세 



하지만 김일성의 남침 야욕은 집요했다. 국제 정세도 변화했다. 우선, 미국의 안보정책에 변화가 생겼다. 미국은 전후 유럽에 보다 더 비중을 두고 있었다. 유럽의 재건을 위해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했고 군사적 지원도 했다. 그 사이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 지역은 안보상 비중이 줄었다. 전후 군사비 지출을 줄이는 영향도 있었다.

그 사이 동아시아 정체도 급변했다. 내전 상태에 있었던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장개석의 국민당을 이기고 중국을 장악했다. 1949년 10월 중국에는 공산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섰다. 중국의 공산화는 김일성을 크게 고무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인 이와 관련해 공산주의 확신을 막기 위해 장개석 정부를 지원했지만, 길어지는 국공 내전에 점점 발을 빼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은 미국과 아시아를 모두 군사적으로 대응할 여력이 없었다. 여기에는 국민당 정부의 부정부패와 그로 인한 민심 이반도 크게 작용했다. 미국으로서는 장개석 정부에 대한 지원을 밑빠진 독에 물 붓기로 여길 수 있었다. 

이런 미국의 태도는 향후 한반도 전쟁시 미국이 적극적 개입이 없을 수도 있다는 판단을 김일성과 소련의 최고 권력자 스탈린리 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소련은 1949년 8월 핵무기 실험에 성공하며 미국에 이어 두 번째 핵무기 보유국이 됐다.

이는 미국에는 큰 충격이었다. 소련의 위협이 현실이 됐고 대중들에게 소련은 공포의 대상이 됐다. 이는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 혐오로 변했고 매카시즘 열풍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 이면에는 정치권이 이를 조장한 측면도 분명 있었다. 소련은 절대 강국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미국과의 관계에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변화한 국제 정세는 김일성의 나침 계획을 더 구체화하는 계기가 됐다. 또한, 미국이 아시아 태평양 안보 전략과 관련해 일본 중심으로 전력 강화를 분명히 했고, 1950년 1월에는 국무장관이 애치슨이 아시아 태평양 안보 라인을 구상하면서 한반도와 대만을 제외하는 애치슨 선언을 발표했다. 

이는 김일성과 스탈린이 상황을 더 오판하게 만들었다. 남침 시 미국의 군사개입이 없을 거라는 확신을 심어줬다. 실상은 중국 본토를 장악한 중국 공산당 정권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나름의 전략이었다. 한반도 역시 미국의 안보 정책에 포함된 곳이었다. 한반도가 공산화된다면 일본 역시 위협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북한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하고 소련의 위성 국가인 북한이 나침을 계획하고 이를 실행하는 어렵다는 판단도 있었다. 소련이 미국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북한의 남침을 용인할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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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정세 오판


하지만 미국의 판단과 달리 한반도 정세는 급속히 전쟁을 향해가고 있었다. 소련과 중국이 우호 동맹 조약을 체결하면서 관계를 강화했고 이는 향후 한반도 전쟁시 중국의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이 됐다. 이제 김일성은 남침을 실행하는 데 있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모두 받을 수 있게 됐다.

1950년 3월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해 남침 계획을 다시 한번 설명했다. 스탈린은 마침내 지원을 약속했다. 다만, 전제조건이 있었다. 미국의 전쟁 불개입과 중국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이는 미국과의 전면전 피하고 전쟁 지원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아울러 전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목적도 있었다.

추후 비밀 해제된 문서에게 스탈린은 중국 마오쩌둥에게 남침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면서 매우 애매모호한 표현을 사용했다. 그 역시 남침이 명분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다만, 성공한다면 동아시아 지역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 야망을 실현시킬 대리인이 김일성이었다. 

김일성은 김일성대로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현실화할 수 있는 기회였다. 또한, 남한 내 남로당 등 공산주의 세력들이 남침 시 봉기하면 전쟁을 미국이 개입하기 전 단기간에 끝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실제 북한군은 남한에는 없는 소련제 전차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조선족으로 구성된 팔로군이라는 정예군이 있었다. 군사력에서 남한과 북한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여기에 소련과 중국의 지원도 약속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급박한 정세를 읽지 못하고 북진 통일이라는 한가한 소리만 하고 있었다. 전쟁이 임박한 시점에도 남침의 징후를 알지 못했고 다수의 장병들이 농번기 일손 돕기를 위해 휴가를 떠나 있기도 했다. 치밀한 준비를 한 북한과 달리 남한은 대비가 부족했고 대북한 정보력 역시 부족했다. 

압도적 군사력을 앞세운 북한군은 개전 후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수라장이 된 서울을 떠나 소수의 수행원과 함께 급히 남쪽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대통령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남침 대응을 위한 컨트롤 타워가 제대로 작동될리 없었다.

심지어 피난민들과 후퇴하는 군인들로 가득한 한강 인도교를 사전 예고 없이 폭파해 막대한 인명 손실과 함께 피난가지 못한 서울 시민들과 군을 고립시키기도 했다. 이런 대응은 많은 서울 시민들을 적의 수중에 놓이게 했고 많은 저명인사들이 납북되는 사태로 이어졌다. 군의 전력도 상당 부분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김일성의 예상과 달리 전쟁은 단기전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그의 예상과 달리 미국이 매우 빠르게 군사 개입을 결정하고 군을 파병했다. 아울러 신속히 북한의 남침을 유엔에서 논의해 유엔군의 파병을 이끌어냈다. 6.25 한국 전쟁은 미국의 대외 전쟁 개입에 있어 유일하게 유엔의 지지를 얻은 전쟁이었다. 이는 침략자들에 대한 응전이라는 명분을 얻을 수 있게 했다. 

 

 

 




전세 뒤집은 유엔군 파병 


미국은 소련의 세력 확대를 저지해야 했고 동맹국과의 신뢰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만약, 북한의 남침에 미온적으로 대응한다면 자유 민주주의 진영의 맹주로서 그 위상이 흔들릴 수 있었다. 또한, 당시 미국 내 강력한 반공의 분위기도 군사적 대응을 하는 데 있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공산주의 침략에 단호히 맞서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유엔의 결정에 소련은 반대를 하지 않았고 안보리 표결에도 기권했다. 이는 그들의 전쟁 책임을 회피하려는 일이었다. 

미국과 유엔군의 참전은 전쟁 양상을 변화시켰다. 또한, 김일성의 예상과 달리 남한대 공산주의 세력들의 봉기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리산 일대 빨치산들의 활동이 있었지만, 전쟁에 큰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자유 민주주의 체제가 자리를 잡은 남한에서 공산주의는 이미 그 힘을 잃었다. 주요 인사들도 월북을 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침략자에 맞서야 한다는 국민적 공분과 여론이 강했다. 명분 없는 전쟁을 지지할 남한 국민들은 없었다. 

김일성은 초조했다. 가용 전력을 모두 동원해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을 돌파해 적화 통일을 완성하려 했지만, 유엔군이 충원된 상황에서 전선이 교착됐다. 그 사이 맥아더 장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전세를 일거에 뒤집을 대규모 상륙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이 인천상륙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낙동강 전선에 집중된 북한 주력군은 보급이 끊기도 고립됐다. 

유엔군과 국군은 빠르게 서울을 수복했고 낙동강 전선에서 방어에 주력하던 부대도 일제히 북진을 시작했다. 이후 유엔군과 국군은 빠르게 북한군에 점령당했던 영토를 수복했고 38도선을 넘어 북진했다. 북진은 속도를 더해 10월 19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했다. 김일성은 다급했다. 그는 중국의 참전을 강력히 요청했다. 

하지만 중국도 미국과 직접적인 군사충돌을 부담이었다. 하지만 소련이 지원을 약속하고 유엔군이 북한과 중국의 경계선까지 진출한 상황에 더는 참전을 미룰 수 없었다. 다만, 군사 개입에 있어 책임을 피하기 위해 병력은 의용군의 형식을 가지게 했다. 중국군은 중국 인민 지원군의 이름으로 참전했다. 소련 역시 군사적 지원에 나섰다. 군사 고문단이 북한군과 함께 하고 있었고 공군 지원을 주로 했다. 하지만 그들의 참전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소련군임을 철저히 숨기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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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참전 교착상태가 된 전쟁


중국군의 참전은 다시 전쟁 양상을 변화시켰다. 미국은 중국의 대규모 참전을 예상하지 못했다. 총사령관 맥아더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그 사실을 인지했을 때 중국군은 한반도 깊숙이 진출한 시점이었다. 중국은 빠른 기동력과 예상치 못한 전술로 유엔군을 압박했다. 

결국, 북진 통일을 눈앞에 둔 시점에 유엔군은 철수를 결정했다. 6.25 한국 전쟁에서 가장 큰 철수작전인 흥남철수가 있었고 서울을 다시 내주는 1.4 후퇴도 있었다. 하지만 다시 전열을 정비한 유엔군은 봄철 대공세를 통해 서울을 포함해 남한 지역의 영토를 수복했다. 

이후 전쟁은 38도선을 중심으로 공방전이 진행됐다. 전쟁은 이제 유엔군과 중국군의 대결이 됐다. 더 나은 위치를 선점하기 위한 고지선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전선이 고착되고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전쟁 주체들 역시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전세에 큰 변화 없이 희생자가 누적되고 막대한 전비가 투입되는 상황이 부담스러웠다. 미국에서도 반전 여론이 강하게 일어났다. 

양측의 이해관계 속에 1951년 7월부터 유엔군과 중국군 사이에 휴전 협상이 시작됐다. 웃으며 악수를 하고 휴전을 논의하는 한편에 다른 여러 고지에서는 치열한 공방전이 공존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지속됐다. 이와 관련해 남한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을 포함해 휴전을 반대하는 여론이 강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작전권이 유엔군에 넘어간 상화에 전쟁 수행의 주체가 아닌 남한의 목소리가 반영될리 없었다. 

지리하게 이어지던 휴전 협상은 미국에서 전쟁의 빠른 종전을 공약으로 당선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등장과 전쟁의 장기화를 조장하던 소련의 권력자 스탈린의 돌연사로 새 국면을 맞이했다. 이후 휴전 협상은 빠르게 전개됐고 협정 서명에 이르렀다. 단순한 위도상의 보이지 않은 선이었던 38선이 이중 삼중의 철책으로 막힌 절대적인 경계선이 되는 순간이었다. 

 

 

 




끝나지 않은 냉전과 대결이 계속되는 한반도


이렇게 전쟁은 종전됐지만, 전쟁을 완전히 끝낼 평화협정에는 이르지 못했다.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때문이었다. 이후 한반도는 냉전의 최 전선에서 언제든 폭발할지 모르는 긴장 상태로 빠져들었다. 남과 북은 서로를 적대와 혐오의 대상으로 여겼고 대립했다. 그 속에서 한반도는 군비 경쟁 속에 강력한 무력이 대치하는 장소가 됐다. 

이런 분단은 화해 협력의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지만, 여러 이유로 지속성을 가지지 못했다. 최근에는 다시 긴장관계가 심화되고 있다. 그 사이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소련이 붕괴되는 등 냉전체제도 해체됐지만, 한반도는 그 냉전의 잔재가 남은 유일한 장소가 됐다. 최근은 미국과 중국의 대립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그 세력들의 대립하는 최일선에 자리하게 됐다.  이는 한반도가 원치 않게 군사적 대결의 장소가 될 위험성을 높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좋은 해결책은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전쟁은 승패를 떠나 수많은 무고한 이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막대한 피해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피해의 대상자는 전쟁과 무관한 보통 사람들이다. 이에 정권을 잡은 이들은 평화 유지하는 큰 원칙을 지속 유지할 필요가 있다.

전쟁을 막을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치밀한 전략과 외교적 노력이다. 다시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휩싸여 우리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고 파멸로 이끄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국력과 위상이 커진만큼 이제는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에 6.25 한국 전쟁을 보다 넓은 시각으로 다시 살피는 건 중요하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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