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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에서 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최악의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이 전쟁은 가장 발전한 문명과 기술이 집약된 상태에서 치러진 마지막 세계대전이었고 그 기술은 더 많은 살상과 피해를 불러왔다. 또한, 그전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이 대부분 유럽에 국한됐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중심이 된 추축국들이 전쟁을 일으키면서 유럽은 물론이고 아시아, 아프리카까지 전장이 넓어지면서 그 피해도 더 광범위했다. 

이런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나치가 지배하고 있었던 독일, 그 독일의 최고 권력자 히틀러였다. 그는 전체주의를 기반으로 인종주의에 기초한 극단적 민족주의, 극우 노선을 입각한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나치당의 지도자로 1933년 정권을 장악한 이후 나치즘에 입각한 통치를 했다. 극단적 민족주의를 기초로 한 나치 독일은 급기야 침략자로 변화했고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전쟁의 결과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이 참혹했다. 

이 사실만으로도 히틀러는 최악의 독재자로 지금도 인식되고 있다. 전쟁 과정에서 자행된 유대인을 포함해 사회 소수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을 포함한 각종 전쟁 범죄는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고 중. 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또 다른 전범국 일본과 함께 전 세계를 지옥으로 몰고 갔다. 그 전쟁범죄의 상처는 지금도 아물지 않고 있다. 

이런 지옥을 만든 악마, 히틀러 옆에는 지옥의 설계자로도 불리는 브레인이자 선전 선동의 대가였던 괴벨스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히틀러의 최측근으로 히틀러가 정치인으로 성공하고 최고 권력자가 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 그 과정에서 괴벨스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선전, 선동가의 능력을 보였고 이후 나치 정권의 문화, 예술, 언론 전반의 총책임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괴벨스는 나치 독일의 패망 직전 스스로 생을 마감한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가족과 함께 극단적 선택을 하며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은 히틀러를 통해 빛났고 그의 함께 마감됐다. 그만큼 괴벨스는 히틀러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을 보였고 사실상 그를 신으로 추앙했다. 일반적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그의 생애를 살피면 외 그런 선택을 했는지 조금은 이해를 할 수 있다. 

 

 

괴벨스

 




신체 장애 그리고 열등감 속 유년 시절 


괴벨스는 1897년 독일 서부의 도시 뭔헨글라트바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촌에서 도시로 상경한 노동자였고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일반직 현장 근로자에서 관리자로 승진한 안정된 사무 근로자였다. 이에 그는 유년 시절 가난을 벗어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건강하지 않았고 골수염 후유증으로 오른쪽 다리가 굽는 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다. 

이는 그에게는 평생 자신에 대한 열등감과 큰 콤플렉스가 됐다. 당시만 해도 장애를 가진 이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장애는 신의 형벌로 여겨졌고 그는 학창 시절 장애로 인해 소외된 삶을 살았다. 이는 그의 사회성 형성에 있어 악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자신을 경원시하는 사회에 대한 불만도 쌓여갔을 수도 있다. 

그는 몸은 불편했지만, 학업에는 매우 특출한 능력을 보였다. 그는 청년 시절 명문대에 입학했고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엘리트였다. 하지만 이런 뛰어난 지적 성취에도 괴벨스가 독일 사회에서 원하는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신체장애의 문제도 있었지만, 당시 독일 사회가 매우 혼란스럽고 경제적으로 힘든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청년 괴벨스가 사회인으로 첫 발을 내디뎠던 시기,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막대한 전후 배상금을 부담해야 했다. 이는 독일 경제에 큰 부담이 됐다. 당시 독일은 제정 시대를 끝내고 민주 공화정 국가인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선 상황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민주주의 국가였지만, 경제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장기적으로 경제 체질을 개선하는 등의 조치가 필요했지만, 급한 불인 전후 배상금 문제가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화폐 발행 확대로 이를 해결하려 했다. 단기적으로는 해결책이 될 수 있었지만, 이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 독일의 통화가치는 급락했고 살인적인 물가 상승이 이어졌다. 경제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이 상황에 대처해야 할 정치권은 제대로 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상황에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독일은 문화, 예술의 큰 부흥기를 함께 보내고 있었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독일에서는 매우 진취적이고 과감한 문화, 예술 사조가 힘을 얻었다. 독일 미술계는 인상주의나 표현주의 등 새로운 사조를 가장 빠르게 받아들였고 추상화가 발전했다. 영화 역시 파격적인 형식의 작품들이 등장했다. 

 

 

 

 

히틀러




극심한 경제 불황 속 성장한 나치당과 히틀러


당시 독일은 극심한 경제 불황과 문화, 예술 중흥기가 공존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있었다. 물론, 일반 국민들에게는 큰 고통이었다. 정부와 정치 시스템 전반에 대한 불신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변화에 대한 욕구 역시 크게 증가했다. 그 속에서 여러 정치 세력들이 등장했다. 이 중에는 극단적인 정책으로 내세우는 정치 세력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었다. 나치당은 국가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극단적 민족주의를 주장했다. 그러면서 나치당은 대중들에게 그 존재감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특정 대상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선전과 선동, 프로파간다를 적극 활동했다. 증오와 혐오에는 특별한 이유나 근거도 없었다. 사회적 불만이 큰 대중들을 상대로 나치당은 외부에서 그 원인을 찾도록 했다. 

그 중요한 대상은 당시 독일에서 광범위하게 지지세를 얻고 있었던 공산당과 소수 민족인 유대인들이었다. 이는 당시 대중들의 가장 큰 지지를 받고 있었던 공산당에 대한 견제의 의미고 있었고 소수 민족인 유대인들이 증오, 혐오를 불러일으키기 용이하기도 했다. 나치당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국가 경제의 어려움이 유대인들에게 있음을 지속 설파했다.

이런 나치당은 주장은 서서히 대중들의 관심을 얻었고 지지세를 확산했다. 이를 바탕으로 나치당은 1923년 히틀러를 중심으로 독일 남부 도시 뮌헨을 장악하기 위한 폭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 폭동은 실패했고 히틀러를 포함한 나치당 지도부가 체포됐다. 사실상 내란을 선동하고 일으킨 그들에게 상당한 중형이 예상됐다. 

히틀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재판정에서 연설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알렸다. 히틀러의 재판은 전국적으로 화제가 됐고 정치인 히틀러의 인지도도 크게 높아졌다. 결국, 히틀러는 크게 감형됐고 얼마 안 가 가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됐다. 이런 히틀러의 모습에 괴벨스 역시 매료됐다. 그는 히틀러를 통해 국가의 변화와 발전을 이룰 수 있는 확신을 했다.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 괴벨스의 만남


괴벨스는 나치당에 입당해 지역 당원이 됐고 뛰어난 연설가로 활약했다. 당내에서도 그의 인지도가 커졌다. 이런 괴벨스의 연설 능력은 지적 능력과 함께 연극배우로도 활동했던 이력이 큰 도움이 됐다. 괴벨스는 사회에 불만이 큰 인물이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의 자유로운 문화, 예술, 창작의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를 발전시켰다. 

1925년 가석방된 히틀러는 나치당 재건에 나섰고 괴벨스를 중용했다. 괴벨스는 나치당에서 보기 드문 박사학위를 가진 엘리트이기도 했다. 히틀러는 괴벨스를 일종의 책사로 여겼다. 괴벨스 역시 히틀러를 통해 그가 원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 사회적 평등에 대한 관심이 컸다. 어쩌면 공산당의 주장이 그에 더 부합했지만, 괴벨스는 히틀러에 대한 확신이 더 컸다. 그를 사실상의 메시아로 여겼다.

이런 확신은 히틀러를 신격화하고 절대적으로 존재로 만드는 일에 더 열중하게 했다. 나치즘은 한 정당의 정책을 넘어 종교화됐다. 이런 괴벨스의 무한한 충성심을 강한 권력 의지를 가진 히틀러가 마다할 리 없었다. 두 사람의 결함은 나치당을 더욱더 극우화의 길로 이끌었다. 극단적 민족주의는 유대인에 대한 혐오를 더 부추기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또한, 공산당에 대한 거짓 선동과 이를 통해 악마화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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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벨스는 베를린 시당 위원장으로 활약할 당시 이런 나치당의 이념과 정책을 보다 발전한 광고기법을 활용해 대중들에게 알렸다. 지금도 활용되는 티저 광고기법을 이용했고 새로운 형식의 신문을 제작해 배포했다. 그 내용은 주로 유대인과 공산당에 대한 혐오와 선동이었다.

이는 힘든 삶을 살고 있었던 대중들을 파고들었다. 지금의 삶이 누군가에 의해 발생했다는 말은 사람들을 솔깃하게 했다. 나치당은 점점 그 세를 확대했다. 1929년부터 시작한 세계 경제 대공황은 가뜩이나 힘든 독일 경제를 더 어렵게 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나치당의 지지세를 더 크게 하는 계기가 됐다. 지금의 경제적 어려움이 유대인들에게 있다는 주장은 다수 독일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 주장의 근거는 중요하지 않았다. 반복적인 선전과 선동에 독일인들은 점점 빠져들었다. 

그렇게 중앙 정치에서도 인지도를 높여가던 나치당은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히틀러를 후보로 출마시키기로 했다. 하지만 히틀러의 지지세는 아직 대통령 당선에 이를 수준은 아니었다. 승산 없는 선거에 히틀러 역시 출마를 망설였다. 괴벨스는 이런 히틀러는 설득에 출마를 하도록 했다.

 

 

 




히틀러를 최고 권력자로 이끈 괴벨스


괴벨스는 대선의 결과와 상관없이 그를 전국적으로 알릴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괴벨스는 선거운동 기간 기존의 신문 발행은 물론이고 선전 영화제작과 상영 등 이전에 없었던 선거 운동 전략으로 주목받았다. 히틀러를 주인공으로 한 선전 영화는 선거 기간 내내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됐다. 비록, 히틀러는 선거에서 낙선했지만, 그의 정치적 입지는 한층 더 확대됐다. 나치당의 지지도 덩달아 높아졌다.

이를 기반으로 나치당은 1933년 의회 선거에서 원내 1당 자리에 올랐다. 히틀러는 총리로 임명되면서 권력에 한층 더 가까워졌다. 그 여세를 몰아 나치당은 대통령을 압박해 그들에 유리한 법안을 통과시키고 히틀러가 권력을 이양 받도록 했다. 나치 1당 독재의 시작이었다. 

독일의 권력을 장악한 나치당은 그들이 추구하는 정책을 거침없이 시행했다. 괴벨스는 나치당의 선전부장에서 정부의 대중계몽선전국가부의 장관이 됐다. 괴벨스의 자리는 독일의 문화, 예술, 언론 부분을 총괄하는 막강한 권한이 있었다.

괴벨스는 이를 활용해 언론을 통제 장악했고 나치 장권에 유리한 보도를 하도록 했다. 언론은 나치 정권의 선전도구로 전락했다. 문화, 예술계에 대한 통제도 강화했다. 그 일환으로 고전주의 외 진보적 예술 작품들을 퇴폐문화로 규정하고 탄압했다. 나치 정권은 이른바 퇴폐미술전을 개최해 관련 작품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각인시켰다. 상당수 추상화나 인상주의 작품들은 해외로 매각되거나 소각되는 비운을 맞이했다.

이는 국민들은 나치당의 이념에 입각해 통제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용납되지 않았다. 정권에 대한 비판도 허용될 수 없었다. 획일화된 전체주의 사회로 독일은 변모해갔다. 괴벨스를 이에 더해 히틀러에 대한 우상화 작업도 강력히 시행했다.

 

 




나치 정권 시대 구현된 전체주의의 주역 괴벨스


이에도 미디어가 적극 활용됐다. 괴벨스는 당시 일반 서민들에게는 고가품인 라디오를 적극 보급했다. 그 라디오를 통해 히틀러와 나치당의 선전 방송이 지속 송출됐다. 주로 음악 방송이 흐르다 일정 시간이 되면 시보가 울리며 히틀러의 연설이 방송되는 패턴이 이어졌다. 이 신문물은 히틀러 우상화에 아주 유용했다.

이에 머물지 않고 괴벨스는 히틀러가 주인공인 다수의 선전 영화를 제작해 상영토록 했다. 그 선전 영화는 최첨단 기법이 모두 동원되고 최고 영화감독에 의해 제작됐다. 세계에서 가장 앞선 영화 기술 역량이 절대 권력자를 위해 활용되는 상황이 반복됐다. 

이와 함께 나치당은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 등 치적 사업과 스포츠 이벤트를 열었다. 지금도 독일을 상징하는 말이라 할 수 있는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 아우토반 건설의 시작은 그때부터였다. 아우토반은 그 자체로도 세계적인 관심을 이끌 수 있었고 독일 국민들에게는 큰 자부심이었다. 이동에 있어 시간의 제약을 크게 극복하고 균형 발전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당시는 정권에 대한 긍정 이미지를 고취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와 함께 나치 정권은 1936년 베를린 하계 올림픽을 개최했다. 이 올림픽은 사상 최대 규모로 열렸고 경기를 위한 인프라도 최고 수준이었다. 대규모 선수단을 수용할 선수촌도 만들어졌다. 또한, 근대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스 아테네에서 채화한 성화를 봉송해 점화하는 이벤트를 추가했다. 지금도 성화봉송은 올림픽에서 매우 중요한 행사다.

 

 

 


나치 정권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기록영화로 제작했다. 베를린 올림픽 기록영화는 그 스케일도 컸고 진보된 형식의 영화로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그 영화를 통해 손기정과 남승룡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활약 영상이 보존될 수 있었다. 베를린 올림픽은 더 나아가 스포츠 중계 시스템을 확립하고 경기 영상을 독일은 물론이고 해외에도 송출토록 했다. 베를린 올림픽은 올림픽 역사에서 매우 큰 전환점이었다. 

나치 정권은 베를린 올림픽을 체제 홍보의 수단으로 삼았다. 여러 긍정적인 요소들이 있었지만, 나치 정권에 이용된 베를린 올림픽이 남긴 큰 오점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치 정권은 권력 기반을 더 공고히 했다. 괴벨스는 히틀러의 최측근 인사로 그 정치적 입지가 더 단단해졌다. 그 속에서 괴벨스의 히틀러에 대한 광적인 숭배는 더 깊어졌다. 지속적인 우상화는 괴벨스는 물론이고 많은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를 지지하는 것을 넘어 숭배토록 했다. 

단적으로 괴벨스와 혼인한 여성 마그다는 괴벨스의 청혼에 부정적이었지만, 히틀러를 보다 가까운 곳에서 자주 볼 수 있다는 것에 이끌려 괴벨스와 혼인했다. 히틀러 숭배자들의 결합이었다. 괴벨스와 마그다는 많은 자녀를 낳는 것이 민족과 국가를 위한 일이라는 히틀러의 말대로 이미 마그다가 전 남편 사이에 얻은 아들 외에 6명의 자녀를 더 낳기도 했다. 히틀러는 이들 부부의 결혼식에 들러리가 되기도 했고 결혼 후 수시로 만남을 가지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히틀러와 괴벨스의 관계는 권력자와 그 추종자 그 이상의 관계가 됐다. 

 



제국 건설을 위한 무모한 야망


문제는 히틀러와 괴벨스가 독일의 권력을 차지는 것 이상의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히틀러는 제국을 꿈꾸고 있었고 이는 대외 침략으로 이어졌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독일의 부흥을 넘어 전 유럽 그 이상의 지배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분명한 망상이었지만, 괴벨스는 이런 히틀러의 망상 실현에도 큰 역할을 했다. 

괴벨스는 침략의 명분을 얻기 위해 일종의 가짜 뉴스를 적극 활용했다.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시 독일은 폴란드 군의 선제 도발을 그 이유로 들었다. 사실은 폴란드군으로 위장한 독일군이 일으킨 일이었다. 괴벨스는 이런 조작에 깊이 관여했다. 독일 언론을 통해 폴란드군의 도발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독일 국민들에게 전쟁에 대한 여론을 부추겼다. 

그렇게 시작한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은 앞선 군사력을 바탕으로 프랑스를 함락하고 빠르게 전 유럽을 장악했다. 히틀러의 꿈이 실현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영국이 이에 강력히 저항했고 프랑스를 포함해 점령지에서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우는 레지스탕스 운동이 일어나면서 전쟁이 길어졌다. 여기에 미국의 지속적인 연합국 지원도 있었다. 길어지는 전쟁은 나치 정권에 큰 부담이었다. 독일 내부에서도 반발이 일어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괴벨스는 다시 한번 유대인 탄압을 이용했다. 독일 내 팽배한 유대인 혐오 정서를 이용해 그들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했다. 전쟁의 원인을 유대인들에게 돌리고 여론을 환기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독일은 물론이고 유럽의 점령지 곳곳에 유대인 강제 수용소가 세워졌다.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그 수용소에서 강제 노력에 시달렸고 가스실 등에서 생을 마감했다. 

나치 독일에게 유대인은 박멸해야 할 해충이고 사라져야 할 악이었다. 또한, 집시들이나 사회 소수자들 역시 유대인과 함께 학살의 대상이 됐다. 나치 정권은 독일 민족의 우월함을 강조하는 인종주의를 전면에 내세웠고 이는 유대인을 포함해 타 민족,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과 학살을 정당화하도록 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선은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시작한 독. 소 전쟁의 전세가 급격히 기울고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독일의 패망 분위기가 점점 커졌다. 그럼에도 히틀러와 괴벨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괴벨스는 히틀러조차 망설이던 총력전을 강력히 주장해 관철시켰다. 이 과정에서도 그의 선전 선동 능력이 발휘됐다. 독일 국민들은 패배가 명확한 전쟁에서 남. 여. 노. 소할 것 없이 전쟁에 동원됐고 희생됐다.

마지막 발악과도 같았던 총력전 역시 전쟁의 양상을 바꾸지 못했다.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전쟁을 시작한 것 자체가 무리였다. 기울어져 가는 전쟁 상황 속에 연합군은 독일 영토를 빠르게 점령해 갔다. 수도 베를린 역시 연합군이 진출했다.

 

 




히틀러와 괴벨스의 비참한 최후


결국,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지하 벙커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히틀러는 유언을 통해 괴벨스를 총리로 임명했다. 하지만 히틀러의 분신으로 살았던 괴벨스로서는 더 이상의 삶은 의미가 없었다. 최악의 전쟁 범죄자인 괴벨스가 전후 단죄를 받는 건 명확했다. 괴벨스는 총리직에 단 하루만 머물렀다. 그는 그의 배우자와 함께 어린 자식들을 독살하고 함께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베를린이 연합군에 점령되고 나치 독일은 항복을 했다. 히틀러와 괴벨스의 잘못된 신념과 야욕으로 인해 시작한 전쟁의 끝이었다. 어쩌면 예고된 최후였다. 괴벨스는 히틀러를 그의 꿈을 실현해 줄 신적 존재로 여겼고 온 힘을 다해 충성했지만, 그의 조국을 파멸의 길로 이끌었다. 그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괴벨스의 삶은 과거의 일로만 볼 수 없다. 지금도 정치인들 중에는 그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특정 대상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는 선동을 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이런 프로파간다는 단기간에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사회적 분열과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하게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킨다. 사라져야 할 정치 행태지만, 여전히 우리는 국내외에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괴벨스가 주도한 나치 정권에서의 언론 장악과 문화, 예술의 정권을 위한 도구화는 얼마 전까지 우리도 경험했던 일이다. 최근에도 그런 행태를 볼 수 있다. 권력자들은 대중적으로 파급력이 큰 언론과 문화, 예술을 보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곤 한다.

 

 

 



모두의 파멸로 이어질 혐오를 부르는 선동 정치 


하지만 이는 자유 민주주의의 가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일이다. 자유와 평등,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다. 이를 부정하는 정권은 그 자체로 정당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특히, 문화와 예술의 발전은 자율성에 바탕을 둔 창작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다. 최근 한국 문화가 세계적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한 배경에는 민주주의 발전과 그로 인한 자유로운 창작 환경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점에서 괴벨스의 삶은 현대에도 큰 교훈을 삼아야 한다. 대중을 자신의 신념과 이념을 바탕으로 통제하려 하는 정권의 최후는 항상 비참했다. 이제 국민들의 의식 수준도 크게 높아졌고 언론과 문화, 예술을 접할 수 있는 통로도 다양해졌다. 힘으로 이를 재단하고 규제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세상이다.

그럼에도 많은 권력자들은 과거 전체주의적 사고를 쉽게 떨쳐내지 못한다. 이로 인한 폐해를 막기 위해서는 정치를 하는 이들의 선한 의지만을 믿지 말고 국민들이 항시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여론을 조성하는 등의 노력을 해야 한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잘못된 선전과 선동에 휘둘릴 수 있고 나라를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정치의 목적이 권력을 차지하는 것에 있지만, 그에 앞서 보다 나은 사회,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있다는 점을 정치인들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국민들의 방심 속에 제2, 제3의 히틀러와 괴벨스가 등장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그 결과는 파멸 그리고 또 다른 지옥이다. 

 

https://naver.me/5VmUFZ8X

 

[벌거벗은 세계사] 최악의 독재자 히틀러, 그의 조력자이자 최악의 선동가 괴벨스

[BY 지후니74] 인류 역사에서 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최악의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이 전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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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프로그램 / 위키백과,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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