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1년 우리 고고학계를 흥분시키는 일대 사건이 발생했다. 고대 삼국시대의 한 축이었던 백제의 역사를 눈앞에서 살필 수 있는 고분이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그 고분의 주인공은 백제 제25대 왕 무령왕이었다. 무령왕릉은 우리 역사에서 고분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진 몇 안 되는 왕이고 이는 그동안 잘못 알려진 백제의 역사를 바로잡는 계기가 됐다. 무령왕릉의 발굴은 백제사 연구에 있어 큰 획을 그은 가치가 큰 일이었다.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무령왕릉과 관련한 역사적 의의, 당시 시대적 상황 등을 살펴봤다. 무령왕릉의 발견과 발굴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고분의 발견은 공주 송산리 일대 백제 고분군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한 인부에 의해 우연히 이루어졌다. 일설에 의하면 무령왕릉이 발견되기 얼마..

668년 중국과 맞섰던 동아시아의 강국 고구려가 멸망했다. 고구려는 중국 통일 왕조였던 수나라와 당나라와의 계속된 전쟁에서 승리하며 굳건함을 보였지만, 그 전쟁으로 국력은 나날이 쇠퇴했다. 여기에 신라와 당나라가 군사 동맹을 체결하며 고구려는 남쪽과 북쪽에서 동시에 적을 상대해야 했다. 신라를 견제하는 역할을 했던 백제가 660년 나. 당 연합군에 멸망하면서 고구려는 외교적 고립에 빠졌다. 또한 절대 권력자가 연개소문의 사망 이후 권력층의 내분이 겹쳤다. 고구려의 내분은 나. 당 연합군에 큰 호재였다. 결국, 고구려는 그 운명을 다하고 말았다. 고구려의 멸망으로 고구려가 장악했던 만주, 요동지역은 힘의 공백이 발생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대동강 이남으로 그들의 영토를 한정했다. 당나라는 옛 백제지역과..

1987년 1월 한 젊은 대학생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 조사를 받던 도중 목숨을 잃었다. 그의 이름을 박종철, 그의 죽음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운동권에 소속된 학생이었고 경찰 조사 과정에서 자신과 함께 하는 선배의 소재를 추궁당했다. 그는 참고인 신분으로 경찰 조사를 받았지만, 조사 과정에서 전기고문과 물고문이 이어졌다. 박종철은 경찰이 원하는 답을 하지 않았고 가혹한 고문이 이어졌다. 결국, 박종철은 물고문 도중 질식사로 그의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허망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박종철의 죽음은 이어진 6월 민주 항쟁과 6.29 선언과 함께 대통령 직선제 개헌까지 민주화 여정에 있어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당시까지 절대 무너질 것 같았던 전두환의 철권통치가 막을 내리는 데 있어 박종철 고..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97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정부가 주관하는 기념식이 열리고 있는 우리 현대사의 민주주의 발전과 연결되는 중요한 사건이다.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이 사건은 발생 당시부터 오랜 세월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했다. 광주사태라는 말이 더 일반적이었다. 당시 광주지역에서 폭동이 발생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유혈 충돌이 있었다는 정도가 알려진 사건의 주요 내용이었다. 하지만 민주화가 촉진되고 군사정권이 그 막을 내린 이후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 당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 세력에 저항한 국민적 저항운동으로 재평가되었다. 또한, 유혈 충돌의 내용 역시 광주지역에 진입했던 계엄군에 의한 무차별적인 무력진압..

1979년 12월 12일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물줄기를 바꾸는 사건이 발생했다. 10.26 사태 이후 비상계엄 체제에서 계엄사령관과 육군 참모총장 자리에 있었던 정승화 대장이 보안 사령관 전두환 소장에 의해 체포됐기 때문이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군내 하극상이었고 국방부 장관과 대통령이 재가를 득하지 않은 군사 반란이었다. 이 과정에서 전방을 지켜야 한 군대가 서울 중요 시설에 진출했다. 12월 12일 밤과 다음날 새벽 사이에 발생한 이 사간은 국민들은 혼란스럽게 했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민주주의의 복원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고 신군부 세력이 권력 중심에 서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12. 12 군사 반란에 대해 세심하게 다뤘다. 12. 12 군사 반란은 이를 주도하고 이를..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찾아가던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293회에서 현대사의 중요한 장소인 명동성당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 한번 되짚었다. 명동성당은 1898년 건축된 명동성당은 당시로는 보기 드문 서양식 건축물로 전형적인 고딕 양식을 보여준다. 명동성당인 이후 우리나라 천주교를 대표하는 곳으로 지금까지 자리하고 있다. 명동성당이 건축된 부지는 과거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오고 그 교리를 연구하고 공부하던 천주교 신자의 집이 있었던 장소로 다른 나라와 달라와 일반 평신도에 의해 천주교가 전파된 우리나라만의 특징을 담은 공간이이고 했다. 이후 천주교는 수차례 박해를 겪으면서도 그 교세를 키웠고 조선 후기 조선과 프랑스의 수교가 이루어지고 선교활동이 합법적으로 보장되며 이 땅에서 새로운 도약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