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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찾는 아시아의 대표적 여행지인 홍콩은 한편으로는 중국 현대사를 상징하는 곳이다. 홍콩은 작은 포구였지만, 1840년 일어난 제1차 아편전쟁 후 전쟁에 패한 당시 중국을 지배하던 청나라가 난징조약을 통해 영국에 홍콩을 넘겨주면서 영국령이 됐다. 이후 제2차 아편전쟁 후 그 영역이 더 확대한 홍콩은 국제 무역항으로 발전을 거듭했다. 

2차례 아편전쟁 패배 후 사실상 반 식민지 상태가 된 중국은 서구 열강들의 이권 침탈의 각축장이 됐다. 여기에는 러시아와 일본도 가세했다. 홍콩은 이런 중국의 현대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었다. 대신 홍콩은 영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유 무역항이 됐다. 그 속에서 서구문물이 빠르게 유입되고 홍콩은 기존 중국과 다른 서구의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하나의 특별 자치구였다. 

그런 특수한 환경 속에서 홍콩에는 서구 문화의 한 단면인 영화도 유입됐다. 이는 홍콩 영화산업이 아시아 그 어느 곳보다 빠르게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1917년에는 자체 제작한 영화로 등장하기도 했다. 홍콩의 영화는 1937년 일제의 침략으로 시작한 중. 일 전쟁 이후 더 급속히 발전했다. 홍콩은 영국에 의해 중립지대가 됐고 전쟁의 위험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이 됐다. 

이에 다수의 중국인들이 홍콩으로 피난을 왔고 그 안에는 영화인들도 포함됐다. 인력의 유입은 영화산업 발전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됐다. 홍콩의 영화는 중. 일 전쟁의 승전 후 발발한 국공 내전과 중국의 공산화를 거치면서도 외풍에 영향받지 않은 지역으로 남았다.

 

 

 




중국 속 영국, 홍콩의 특수성이 불러온 영화산업 발전 


중국의 공산화는 홍콩으로 더 많은 인구 유입을 불러왔고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상 표현의 자유, 인근 동남아시아 지역의 화교 등 외부 자본의 유입 등 우수한 제작 여건이 결합되며 자체 시장의 크기를 키웠고 이는 홍콩의 영화산업을 더 발전시키는 토대가 됐다. 그 속에서 홍콩에는 다수 영화 제작사들이 설립됐다. 

1958년 홍콩의 영화 산업화에 있어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할리우드 대형 영화사와 유사한 형태의 영화 제작사 쇼브라더스가 설립됐기 때문이었다. 쇼브라더스는 할리우드의 제작, 배급, 상영 시스템을 그대로 적용했다. 그 안에서 다수의 영화가 제작되고 상영됐다.

이런 대형 제작사의 설립은 홍콩 영화 전성기를 이끄는 기반이 됐다. 쇼브라더스는 1960년 배우 아카데미를 설립해 자체적인 배우 육성 시스템을 만들었고 지금의 연예 기획사와 유사한 메니지먼트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는 불공정 계약의 어두운 단면이 있었지만, 전속 배우 체제를 통해 보다 낮은 개런티에 배우들을 영화에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통해 홍콩에서는 다수의 영화가 제작되어 상영되며 큰 양적 성장을 이뤘다. 

홍콩 영화는 1970년대 들어 또 하나의 대형 영화제작사 골든 하베스트가 설립되고 메이저 영화사들의 경쟁 체제가 만들어지면서 발전에 가속을 더했다. 그 속에서 홍콩 영화의 시그니처 장르인 무협 액션 영화가 등장했고 홍콩을 넘어 아시아와 전 세계로 홍콩 영화가 확산됐다. 

 

 

 




홍콩 영화의 전설 이소룡


이런 홍콩 영화의 세계화에서 있어 중요한 역할을 이는 브루스 리, 이소룡이었다. 기존의 무협영화를 더 현대적으로 해석한 그가 주인공인 액션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그의 영화는 권선징악을 바탕으로 한 히어로물의 형식을 보이면서 화려한 액션에 시대의식까지 담겨있었다. 그는 신생 영화제작사 골든 하베스타의 간판 배우이자 홍콩을 대표하는 액션배우가 됐다. 영화 흥행과 함께 그는 할리우드에서도 주목받는 배우가 됐다.

이소룡의 등장은 홍콩 영화가 세계적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 큰 힘이 됐다. 본격적인 스타 마케팅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소룡은 할리우드와 함께 제작한 용쟁호투의 대흥행에 이어 또 다른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 돌연사하면서 영화팬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약물 과다 복용이 원인이었다는 발표가 있었지만, 32살의 젊은 스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여러 의혹을 낳기도 했다. 역설적으로 그의 요절은 그를 액션 영화의 전설이 되도록 했다. 

이렇게 이소룡이 세상을 떠났지만, 홍콩 영화의 발전은 그 흐름을 계속 이어갔다. 이소룡에 이어 등장한 또 한 명의 스타 성룡의 등장이 이를 촉진했다. 성룡은 순탄하지 않았던 유소년기를 보냈고 스턴트맨 등 오랜 무명 생활을 했지만, 자신만의 코믹 액션 장르를 개척하며 홍콩 영화 최고 스타로 올라섰다. 

1979년 그가 주연한 영화 취권은 성룡표 코믹 액션 영화의 시작이었다. 이소룡의 비장하고 장중한 액션 대신 재미를 더한 액션은 대중들에게는 색다르게 다가왔고 흥행에도 성공했다. 취권은 홍콩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큰 흥행에 성공했다. 

이렇게 시작된 성룡의 시대는 몸을 사리지 않는 과감한 액션과 함께 다수의 흥행작으로 절정에 달했다. 그가 주연한 폴리스 스토리는 현대적 액션물로 계속 그 속편이 흥행에 성공했다. 성룡은 스턴트맨 없이 위험한 장면을 모두 연기했고 이는 성룡 영화의 시그니처가 됐다. 성룡은 전 세계적인 스타가 됐고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그가 활발히 활동하던 시절 성룡은 우리나라 방송에 다수 출연하기도 했다. 그의 영화는 명절 특선 영화의 단골 작품이었다. 

 

 

 




성룡 그리고 다수의 스타들 


홍콩 영화는 이후 성룡에 이어 주윤발과 장국영, 양조위, 왕조현, 유덕화 등 다수의 스타들이 등장하면서 인기에 가속도를 더했다. 홍콩 영화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공존하는 홍콩의 환경 속에서 다른 영화에 볼 수 없는 독특함이 있었고 자유로운 제작 여건으로 인해 여타 아시아 국가에 존재하는 검열도 없었다. 이는 영화의 창작성과 독창성을 더할 수 있었다. 

홍콩 영화를 그들만의 영화 장르를 계속 개척하며 흥행작을 연달아 만들어냈다. 1980년대 후반 발표된 영화 영웅본색은 홍콩 영화를 대표하는 누아르 장르의 문을 열었다. 이 영화를 통해 주윤발과 장국영이 한국 영화팬들에게도 주목받는 배우가 됐다.  비장감 넘치는 총기 액션신과 조직에서의 의리, 남자들의 우정 등을 담은 누아르는 우리나라에서도 지금도 다양하게 패러니 되거나 영화적 소재로 활용될 정도로 그 파급력이 컸다. 이 배우들은 한국에서도 높은 인기를 얻으며 각종 방송에 출연하고 다수의 CF에도 출연하는 등 스타도 대접받았다. 

누아르 외에도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서극 감독이 시도한 새로운 무협 장르도 주목받았다. 그 속에서 와이어 액션이나 할리우드의 특수 효과가 더해지며 무협 장르의 스케일이 커지고 완성도를 더할 수 있었다. 이런 새로운 무협 영화를 통해 왕조현이 홍콩의 대표하는 여성 스타가 됐고 임청하는 동방불패라는 영화를 통해 여성 액션 스타로 등장했다. 

그리고 홍콩 무협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황비홍이다. 황비홍은 그 버전을 달리하면서 다양하게 리메이크 됐고 대부분 흥행에 성공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황비홍의 판권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할 정도였고 거액의 선금이 오가기도 했다. 이 영화를 통해 이연걸이라는 또 다른 액션 스타가 등장했다. 

이렇게 홍콩 영화는 동.서양의 문화가 공존하는 특수한 환경과 이로 인한 독특한 정서를 바탕으로 대중 스타들이 인기를 견인하고 그들만의 장르 정립, 거대 자본의 유입 등 여러 긍정 요소가 결합하면서 아시아 최고의 영화 시장을 형성했다. 그와 함께 다수의 배우들과 감독들이 할리우드로 진출하며 홍콩 영화의 위상을 더 높였다. 이를 통해 홍콩하면 영화라는 공식이 성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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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영화의 최전성기와 함께 찾아온 위기 


하지만 홍콩 영화는 화려함 속에서 대내외적 위험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 홍콩 영화는 1990년대 최 정점의 인과 급격한 내림세를 함께 경험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일대의 대표적 조직폭력 조직인 삼합회의 영향력 확대는 홍콩 영화 몰락의 중요한 계기가 됐다.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는 영화산업에는 각종 자본이 몰려들었고 그중 삼합회도 포함되어 있었다. 삼합회는 그들의 범죄 수익을 영화산업에 투자하면서 합법적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고 이는 일종의 돈세탁 수단이었다.

삼합회는 영화 제작에도 적극 개입하며 당대 인기 배우들의 협박하며 그들이 투자한 영화에 강제적으로 출연시키는 일도 있었다. 홍콩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 유덕화는 원치 않은 다작을 해야 했고 그 외 다른 스타들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삼합회는 그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배우를 직접 납치 폭행하거나 심지어 배우의 측근을 살해하는 일도 저질렀다. 이런 공포스러운 상황은 많은 배우들과 제작자들의 홍콩 탈출을 불러왔고 영화산업을 위축시키는 요인이 됐다. 

 

 

 



더 큰 악재는 1997년 7월, 홍콩의 중국 반환이었다. 중국은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반환받으면서 일국 양제, 기존 홍콩의 정치, 경제 시스템을 존중하겠다고 했지만, 공산단 일당 독재체제의 중국에서 홍콩의 자유민주주가 제대로 구현되긴 애초 힘들었다.

변화한 사회 환경에서 영화산업은 기존에 없었던 정부의 간섭과 검열을 피할 수 없었고 자유로운 제작 환경은 사라지고 말았다. 홍콩의 영화산업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1997년 장국영과 양조위가 아르헨티나를 배경으로 동성 커플로 등장하는 영화 해피투게더는 당시 홍콩의 상황을 상징하는 영화였다. 

여기에 더해 1990년 후반 한국의 IMF 외환위기를 초래한 아시아 경제 위기 속에 홍콩의 영화산업도 큰 타격을 입었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아시아 시장에 본격 진출하면서 영화산업은 더 위축됐다. 이 속에서 작품의 창의성은 더 떨어지고 기존 영화 장르를 답습하는 모습을 보이며 홍콩 영화산업은 정체되고 퇴보됐다. 설상가상 인력 유출까지 심화되며 홍콩 영화는 침체기로 접어들고 말았다.

그 사이 한국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 문화를 주도하면서 그 위치가 역전되고 말았다. 당분간은 홍콩 영화의 재도약은 힘들어 보인다. 이런 홍콩 영화의 역사는 영화를 포함한 문화, 예술이 그 시대와 사회상과 결코 동떨어질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자유로운 창작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영화를 포함한 문화, 예술이 발전할 수 없다는 점도 알 수 있다. 홍콩 영화의 역사는 이 점에서 우리에게도 큰 교훈이 될 수 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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