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시작한 한국 프로야구는 사전 준비 없이 정권 차원에서 이를 계획하고 갑자기 리그를 시작한 탓에 프로라고 하기 부끄러운 경기력과 리그 운영으로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지역 연고제의 빠른 정착과 여가 선용의 수단이 마땅치 않았던 시대 상황 등이 맞물리며 흥행에 성공했고 최고 인기 스포츠로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프로야구 초창기 큰 문제였던 선수 부족과 그에 따른 경기력 문제를 일종 부분 해결해 준 이들이 재일 동포 선수들이었다. 1980년대 우리보다 앞선 야구 역사와 오래된 프로야구 리그를 운영하던 일본에서 활약했던 재일 동포 선수들은 큰 경쟁력이 있었고 프로야구 수준 향상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초창기 프로야구 구단에서 당시로는 선진 야구를 하는 일본 프로야구를 경험했던 ..
프로야구 초창기는 여러 예상치 못한 문제의 연속이었다. 준비 기간이 제대로 없는 상태에서 정권의 필요에 의해 시작된 탓도 있었고 프로야구에 대한 개념조차 희박했기 때문이었다. 리그 운영은 물론이고 선수단 운영 역시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기장을 포함해 각종 인프라가 부족했다. 선수들의 부상 관리나 재활도 부실했다. 특히, 투수들은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혹사당했다. 각 팀의 주력 투수들은 지금의 관점으로는 말로 안 되는 투구 이닝을 소화해야 했다. 그 속에서 1984 시즌 롯데 자이언츠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할 때 에이스였던 최동원은 7차전 승부에서 4번의 선발 등판과 1번의 구원 등판을 강행했고 홀로 4승 1패를 기록하며 롯데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당시는 영웅담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