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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기존에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와 함께 새로운 독립운동가의 일면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독립운동사를 자주 다루면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독립운동사 중 가장 가슴을 뛰게 하는 건 무장 독립투쟁, 독립전쟁과 관련한 내용이다. 일제의 조선 침탈이 본격화되고 을사늑약과 일제의 조선에 대한 강제 병합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우리 민족은 강하게 저항했다. 한편에서는 우리의 실력을 키우기 위한 애국계몽운동이 있었고 국채보상 운동과 같은 경제적 자립을 위한 노력도 있었다. 각종 비밀 결사 조직이 만들어져 조직적인 저항 운동을 하기도 했다. 또 한편에서는 무력을 통해 일제에 대항했다. 전국 각지의 의병들이 일어났고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 해산되는 시점에 국내 의병운동을 절정을 이뤘다. 의병 세력들이 힘을 합쳐 서울 진공작전을 펼칠 정도로 그 세력이 커졌다. 

하지만 일본 군대는 당시 동아시아 최강의 군대였다. 조직화 된 일본군과 그들의 앞선 화력을 의병들이 당해내긴 어려웠다. 일본군은 국내 의병들에 대한 강력한 토벌 작전을 펼쳤고 의병들의 세력을 크게 약화됐다. 험준한 산악 지형을 바탕으로 유격전을 전개하며 저항했지만, 군대유지에 필요한 물자 보급이나 인원 충원이 점점 어려워졌다. 이에 국내 독립운동 기지 건설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다. 일제의 간섭을 받지 않고 힘을 키울 수 있는 만주나 연해주 등지로 나가려는 독립운동가들이 늘어났다. 그 세력을 규합해 하나의 군대를 만들어 대결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는 만주 일대에 독립군 단체 창설로 이어졌고 본격적인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다.이 독립 전쟁은 이후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까지 이어졌고 대한민국 군대의 효시가 됐다. 

이런 독립전쟁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이 신흥무관학교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중국 간도 지방에 설립된 독립군 양성기관이었다. 1920년 폐교할 때까지 2,000명이 넘는 독립군을 배출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이후 독립군의 장교로 활약하거나 독립전쟁의 주축이 됐다.

 

이석영 초상

 



이들을 중심으로 각지의 독립군이 조직되고 일본군에 대한 무장투쟁을 이어갈 수 있었다. 1920년 독립전쟁의 가장 빛나는 승리라 할 수 있는 청산리 전투 승리에 있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큰 공헌을 했다. 그때 중심이 된 군대인 서로군정서를 이끌었던 김좌진 장군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무장 독립단체인 의열단의 지도자 김원봉에 의열단 출신이었다. 이 외에도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신흥무관학교를 거쳤다. 그만큼 신흥무관학교는 우리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장소였다. 

이 신흥무관학교와 관련해 꼭 기억해야 할 인물들이 있다.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의 6형제와 그들의 가족 50여 명이다. 이들은 그들의 재산을 모두 쏟아부어 아무 연고도 없는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도록 지원했고 독립운동가 양성에 온 힘을 다했다. 그들 스스로도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자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립전쟁의 기반이 이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들은 조선 선조 중기 유명한 문인이자 정치가였던 이항복의 후손들이었고 대대로 높은 관직을 역임한 명문가의 자손들이었다. 그와 함께 조선 최고의 부를 가진 만석꾼의 집안이기도 했다. 부와 명예, 사회적 지위를 모두 가진 집안이었다. 그대로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살았다면 대대로 부와 명예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여느 친일파들처럼 일제에 협력했다면 그 부는 훨씬 더 커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 6형제는 나라의 위기를 그대로 바라보지 않았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나라의 독립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중심에는 이석영이 있었다. 6형제 중 둘째인 이석영은 형제 중 가장 큰 부자였다. 그의 남양주 일대의 토지는 그의 땅을 모두 거쳐서야 수도 한양에 이르를 수 있다는 말을 정도로 드넓었다. 그 외에서 전국 각지에 땅이 있었고 많은 쌀을 수확했다. 이들 외 나머지 형제들도 큰 부자였다. 이들 6형제의 집은 지금의 명동 성당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의 부동산 등 재산을 지금으로 추산하면 1조원 이상이라는 평가다 있을 정도다. 

이들 6형제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처분해 현금화했다. 토지는 물론이고 가보로 내려오는 서적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재산 처분은 신속하고 은밀히 진행됐다. 그 때문에 실제 가치보다 낮게 매매를 하기도 했다. 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은 그런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게 했다. 이렇게 마련된 자금을 가지고 6형제와 그 가족들은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향했다. 그들은 아무 연고도 없는 만주에 정착했다. 마치 첩보영화의 한 장면 같은 망명길이었다. 물론, 이런 시도에는 조선 최고의 부자라 할 수 있는 이석영의 협조가 절대적이었다.

이석영은 이항복의 10대 손으로 1855년 이유승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그는 개화파 문신이자 대부호인 이유원에 입양됐고 그의 사후 그의 재산을 모두 물려받았다. 지금으로 얘기하면 재벌 2세 금수저 증 금수저였다. 이석영은 학문에도 재능이 있어 21세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벼슬길에 큰 뜻을 두지 않고 정치와 거리를 뒀다. 대신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뛰어든 동생 이회영의 후원자로 그를 뒷받침했다. 이회영과 그와 뜻을 함께 하는 독립운동가들은 이석영의 집에서 자주 모임을 갖고 각종 사안들을 논의했다. 이석영은 이회영을 강하게  신뢰했고 그를 지원했다. 그러면서 절대 스스로 앞에 나서지 않았다. 

6형제와 함께 서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한 이후에도 교장직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걸 꺼려 하고 후원자로 남았다. 이런 그의 처신이 그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업적을 세상에 알리는 데 어려움을 주는 이유였다. 이석영은 일찍이 개화사상을 받아들였고 이를 실천했다.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 제직하던 당시 한때 그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교육생이 그에게 하인과 같은 예를 표하자 독립군은 절대 무릎을 꿇지 않는다 하며 그를 격려한 일화는 그의 인품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석영 6형제 망명길 상상화

 


이렇게 이석영을 중심으로 6형제의 재정 지원 속에 설립된 신흥무관학교는 설립 초기 신흥강습소로 간판을 달았다.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예의주시하던 일제의 감시를 피해야 하기도 했고 이방인들에 강한 경계심을 보이는 현지 중국인들과 지역 군벌들의 양해도 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학원의 형태였지만,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사학교의 성격이 강했다. 이를 뒷받침 하기 위해 이석영 6형제와 독립운동가들의 지역의 결사조직인 경학사를 만들었다. 일종의 차기 기구인 경학사에서는 농업과 교육을 장려하고 조선인들의 단결을 도모했다. 농업을 장려하고 그 생산물을 통해 이익을 창출해 독립운동에 활용토록 했다. 교육을 장려해 인재 육성도 도모했다. 국내 독립전쟁이 실패하면서 대두된 해외 독립운동 기자를 구현했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역의 농업 생산은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고 신흥무관학교의 운영은 점점 재정적인 어려움에 직면했다. 이석영이 가지고 온 자금이 없었다면 유지되기 힘들었다. 신흥무관학교의 입교생들은 인근 농장에서 일하고 교육을 받았고 군사훈련을 병행했다. 그들의 상황은 열악했다. 그들에게 제공되는 식사는 매우 부족했다. 열악한 재정상황에서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석영은 이런 현실에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다. 한 번은 생도들을 위해 돼지고기를 식사시간에 제공했는데 고기를 먹은 생도들이 모두 복통을 일으켰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당시 신흥무관학교의 어려운 상황은 그대로 보여주는 마음 아픈 일화다. 

이렇게 힘든 환경이었지만, 그나마도 이석영 6형제의 헌신이 있어 신흥무관학교가 유지될 수 있었다. 이석영 6형제는 물론이고 그 가족들의 고충도 컸다. 조선에서는 명문가 집안의 귀부인으로 살았을 여성들은 생도들의 빨래와 식사 등 살림살이와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독립을 위한 강한 열망과 의지는 이석영 6형제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로 마찬가지였다. 

신흥무관학교의 규모는 날로 커졌다. 1919년 3. 1운동 전후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많은 젊은이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수많은 이들이 신흥무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독립운동가들이 늘어나는 건 반가운 일이었지만, 학교의 살림을 나날이 힘들어졌다. 급기야 조선을 떠날 때 가지고 온 자신을 모두 탕진했다. 여기에 일제의 지속적인 방해가 겹치면서 학교 운영을 지속하기 어려웠다. 일제는 지역의 마적들을 회유해 독립운동가들을 공격하게 하기도 했다. 실제 이석영은 지역의 말적떼들의 습격을 받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런 어려 문제들이 겹친 끝에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되고 말았다. 

하지만 신흥무관학교를 거친 이들은 독립전쟁의 주축이 됐고 곳곳에서 큰 성과를 만들었다. 대신 이석영 6형제의 삶은 큰 고난 속으로 빠져들었다. 일제 만주 침략이 본격화되고 자산마저 모두 탕진한 상황에서 이석영 6형제는 중국 곳곳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다. 이석영은 무장 독립투쟁을 지속하고자 하는 이회영을 따라 중국 각지를 떠돌았고 팔순의 나이에 상해 빈민가에서 어렵게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이미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가진 것 없는 이석영의 삶은 비참했고 이따금씩 조카들이 보내온 돈으로 근근이 버텨야 했다. 조선 최고 부호였던 이석영은 인생의 말련에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했다. 

 

이회영

 


그런 이석영은 그의 마지막 거처에서 가장 아끼는 동생이었던 이회영과 재회했다. 이회영은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된 이후에도 국. 내외를 오가며 무장 독립투쟁을 이어갔다. 그 역시 60살은 넘은 노구였지만,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 뜨거웠다. 두 형제는 서로를 격려하며 헤어졌다. 그 만남은 그것이 마지막 마지막이었다. 이회영은 무정부주의 성향의 아나키스트적 행태의 파괴, 암살 등 강력한 무장독립투쟁을 지속했다. 이런 그의 성향은 같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우려를 낳기도 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1932년 이회영은 한인 교포의 밀고로 일제에 체포되어 뤼순 감독에 수감됐고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평생을 독립은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의 쓸쓸한 최후였다. 그렇게 그의 삶인 저물었지만, 그의 독립운동의 열정과 기록은 뤼순 감옥 해외 애국지사 간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뤼순 감독에는 이회영을 포함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역사가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신채호의 기념관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뤼순 감옥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이회영이 사망하고 얼마 후인 1934년 이석영 역시 상해의 빈민가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사인인 아사였다. 말련에 그는 경제적 지원을 전혀 받지 못했고 굶는 일이 보통이었다. 팔순을 넘긴 이석영은 고통 속에 최후를 맞이했다. 이후 그의 시신은 독립운동가들의 성금으로 장례가 치러지고 외국인 묘지에 묻혔지만, 이후 묘지가 개발되면서 그의 묘지가 사라졌다. 그의 유골은 수습되지 못하고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또한, 그의 독립운동의 기록조차 알려지지 않으면서 잊힌 독립운동가가 되고 말았다. 최근에서야 그의 독립운동의 행적이 알려지면서 뒤늦게 건국훈장을 추서 받는 등 예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망명길에 올랐던 6형제 대부분도 이국에서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키며 큰 역할을 했던 다섯째 이시영만이 살아서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시영은 이후 대한민국 정부 최초의 부통령에 올랐다. 이후에는 이승만이 독재의 길을 걷자 그에 반해하며 부통령 직을 버리고 이승만에 맞서는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그는 6.25 한국전쟁이 진행 중인 1953년 4월 17일 당시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 역시 평생을 독립운동가로 온 힘을 다했고 해방 이후 조국에서도 불의에 저항하는 정치인으로 살았다. 

이석영 6형제의 비극적인 최후는 그 자손들에게도 이어졌다. 6형제 자손들 상당수가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타국에서 사망했다. 그 부인들 역시 고난의 삶을 살아야 했다. 이회영의 배우자 이은숙은 국내로 돌아와 같은 일을 다하며 남편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했다. 그가 그의 기억을 바탕으로 쓴 서간도 시종기는 당시 독립운동의 상황을 매우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 글에는 당시 힘겨웠던 하루하루의 일과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독립운동사 연구의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시영

 


이렇게 이석영 6형제는 그들의 모든 것을 나라의 독립의 바쳤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이들이었다. 이들의 재정적 지원이 없었다면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 건설은 불가능했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무관학교도 존재할 수 없었다. 겉으로 드러난 독립운동을 이름 없이 지원한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었다. 그중 이석영의 헌신은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 대한 예우가 늦어진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최근 이석영의 직계 후손들의 존재가 확인된 건 너무 반가운 일이다. 그의 후손들이 지금이라도 독립유공자로 제대로 대우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석영은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누군가는 일제 강점이 친일파들은 열심히 살았고 그로 인해 지금도 잘 살고 있고 독립운동가들은 대충 살았기에 그 후손들이 힘들게 산다는 망언을 하기도 한다. 그런 망언이 극우 커뮤니티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친일파들은 열심히 살았을지언정 그 노력과 열정을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서만 사용했다.

그 반대편에 자리한 독립운동가들은 모든 걸 나라의 독립을 위해 바쳤다. 그 과정에서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을 돌볼 수 없었다. 해방 후 그들의 상황이 바뀌어야 했지만, 친일파들은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 이룩한 부와 사회적 직위를 대대손손 이어갔다. 반대로 모든 걸 나라에 바친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은 자신은 물로이고 가족까지 대대손손 힘든 삶을 영위해야 했다.

이런 불공평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해방 후 정의를 바로 세웠다면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들의 처지는 크게 달라졌고 지금 친일파 청산 등 과거사 문제로 대립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정의를 바로 세우지 않는 나라에서 과연 국민들에게 나라에 충성을 요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늦었지만 독립운동사는 세밀히 연구하고 독립운동가들과 독립운동의 역사를 알리는 건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아직 우리는 끝나지 않은 독립전쟁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진 : 우리 역사넷 / 국가보훈처,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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