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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역사의 중요한 콘텐츠 중 하나가 고려 거란 전쟁이다. 이에 관련 드라마도 기대 이상의 시청률을 보이고 있다. 최근 드라마의 역사 고증과 역사 인물에 대한 해석과 관련한 논란도 드라마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있음을 방증하는 일이다. 

분명한 건 최근 고려 거란 전쟁 드라마와 이로 인해 파생된 다양한 콘텐츠는 관심 밖에 있었던 고려사를 대중들이 다시 관심 속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고려 거란 전쟁의 중요 인물이었던 고려 왕 현종과 2차 고려 거란 전쟁의 영웅이었던 양규 장군에 대한 재평가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강감찬에 국한됐던 고려 거란 전쟁의 세계관을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이렇게 고려 거란 전쟁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짐과 동시에 살펴봐야 할 부분이 있다. 30년 가까이 이어졌던 고려 거란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던 귀주대첩과 관련해 몇 가지 의문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의 10만 대군이 고려에 침공한 3차 고려 거란 전쟁 당시, 고려의 총사령관 강감찬이 그들을 궤멸시킨 전쟁으로 요약된다. 

귀주 대첩의 결과 소배압의 거란군은 겨우 수천 명만이 살아서 돌아갈 정도로 고려의 대승이었다. 이 전쟁은 세계사적으로 고려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동아시아 정세를 주도하는 국가가 되도록 했다. 고려는 거란과 송나라와 함께 상호 견제와 균형의 축으로 자리를 잡았고 이를 통해 추가적인 전쟁을 억제했다. 이는 고려가 이후 긴 세월 번영기를 누리도록 했다.

고려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귀주대첩이지만, 전쟁의 승리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고 수차례 위기가 있었다. 몇 가지 장면은 '왜'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기도 한다. 그 속에서 고려와 거란 모두에게 승전의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이었기 때문이다. 고려는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지만, 거란은 그렇지 못했다. 

 

 

3차 고려 거란 전쟁 전개도 추정




강감찬의 판단 실수? 의도된 작전? 


전쟁 초기 가장 중요한 장면은 거란군의 개경 직도 작전이었다. 고려는 2차 고려 거란 전쟁 후 꾸준히 거란의 추가 침략을 대비하며 전쟁을 준비했다. 거란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강동 6주 지역의 요새화를 견고하게 했고 군사력을 확충했다. 상대적으로 공성전에 취약했던 수도 개경의 방비도 강화했다. 

2차 고려 거란 전쟁에서 고려는 거란군의 기동력에 수도 개경이 점령당하고 파괴되는 아픔이 있었다. 당시 고려 현종은 급히 몽진길에 오른 탓에 거란군에 사로잡힐 위기를 넘기고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다. 현종의 몽진은 그 과정이 험난했지만, 고려가 거란에 굴복하지 않고 거란군이 철군하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려는 2차 고려 거란 전쟁 후 거란이 개경을 바로 노릴 것이라는 예상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1018년 일어난 3차 고려 거란 전쟁의 총사령관 강감찬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강감찬은 거란군의 진격로를 사전에 예측하고 그들의 고려 국경을 넘은 시점부터 공격을 가해 타격을 입혔다. 그러면서 그들의 진격로에 주력 부대를 배치해 거란군과의 결전을 준비했다. 

이 상황에서 거란군은 중요한 결정을 했다. 거란군은 고려군의 계속된 공세에 피해가 누적되는 상황에도 진격 속도를 더해 개경에 대한 직접 공격을 더 가속화했다. 이에 소배압의 거란군은 고려군의 공세와 추격을 뿌리치고 빠르게 개경으로 진격했다. 이는 그들의 부대가 기마병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가능한 일이다. 

거란군은 애초 고려 수도 개경에 대한 직접 공격을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군의 공세도 예상된 일이었고 일정 손실이 발생해도 개경을 점령하고 고려 왕을 잡아 항복을 받는 것이 고려의 굴복을 가져올 것이라 여겼다. 실제 2차 고려 거란 전쟁에서 거란은 그들이 왕 성종이 수십만의 대군을 이끌고 친정을 했음에도 최 전선에 자리한 고려의 성 흥화진 공략에 일주일을 소모하면서 점령하지 못했고 중요 요충지 서경도 점령하지 못했다.

거란군은 뒤늦게 개경을 직접 공격하기로 했지만, 고려의 지연술에 그 일정이 늦어졌다. 이후 개경을 점령하긴 했지만, 고려 왕 현종은 남쪽으로 몽진길을 떠난 이후였다. 거란은 고려 수도 개경을 파괴하고 약탈을 하면서 조금 분풀이를 했겠지만, 고려 정벌이라는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철군 과정에서 양규를 중심으로 한 고려군의 반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고려의 반격은 현종이 그 신변을 잘 보호했기에 가능했다. 

 

 

북방민족 그림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거란은 국경을 넘은 직후 고려 수도 개경으로 바로 향했다. 후미 부대의 희생도 개의치 않았다. 유목 민족의 특성상 장기간의 전쟁이 어려운 그들로서는 빠른 타임 어택이 불가피하기도 했다. 과거 발해를 멸망시킬 당시에도 거란은 발해 수도를 직접 공격해 발해왕의 항복을 받아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경험도 있었다. 실제 거란은 빠른 이동에 맞는 보급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2차 고려 거란 전쟁 당시 보다 적은 10만의 군대를 보낸 건 기마병을 중심으로 부대를 재편하고 기동력을 높이는 의도가 있었다. 

이를 알고 있었을 강감찬이었지만, 강감찬의 거란군의 개경 직도 작전을 완전히 저지하지 못했다. 당시 고려는 20만이 넘는 대군으로 거란군에 맞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해 고려의 당시 인구수를 고려하면 과장된 규모라는 반론도 존재하지만, 국운을 건 일정에 고려는 가용 자원을 모두 동원해 대응했던 건 분명하다. 

강감찬은 주력군을 거란군의 진격로에 배치해 그들을 타격하긴 했지만, 예상보다 빠른 진격에는 대응하지 못했다. 거란군을 고려 영토 내로 유인했다는 추론도 가능하지만, 당시 고려 수도 개경의 수비 병력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군사를 강동 6주 일대 최전방으로 배치한 상황에서 개경에는 많아봐야 수천 명의 수비 병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마저도 최 정예 부대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거란군이 그대로 개경으로 진격해 공성전을 전개한다면 수비를 장담할 수 없었다. 고려에는 이런 거란군의 전술이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이에 강감찬은 1만여 명의 기마부대로 거란군을 추격하고 개경을 수비하도록 했다. 고려로서는 나름 거란의 기마부대에 대응한 기마부대를 양성했겠지만, 고려군의 주력은 보병이었다. 거란군의 기동력을 완전히 대응하긴 한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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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전쟁의 결과를 알고 있지만, 당시 고려에게는 이런 상황이 큰 위기라 할 수 있었다. 고려로서는 고려의 추격군이 거란군을 공략하기까지 개경이 버텨주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려가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했을 가능성도 있다.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이 고려 개경에 가장 근접한 신은현에 도달한 건 전쟁이 시작된 1018년 12월에서 한 달여가 지난 다음 해 1월의 정월 무렵이었다.

기마병을 중심으로 기동전을 펼쳤다고 하기에는 많은 시일이 소요됐다. 그 기간 고려군의 공격과 거란군의 피해와 관련한 기록이 몇 차례에 불과하지만, 거란군이 남하하며서 상당한 저항을 받았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기마민족은 전쟁 수행 시 현지에서 약탈 등을 통해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게 보통인데 고려는 이에 대응해 그들의 진격로를 스스로 초토화하는 청야전술을 펼쳤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일각에서는 거란군이 고려가 애초 예상한 진격로가 아닌 내륙길을 통해 진격했다는 점에서 청야 전술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 해도 거란군이 내륙길을 선택했다면 기마병의 기동력을 완전히 발휘하기 힘들 수 있었고 체력적 부담이 한층 더 가중될 수도 있었다. 고려군의 추격을 뿌리쳤다 해도 남하 과정에서 상당한 전력 손실이 불가피했다. 그럼에도 거란군은 개경 직접 공략의 기회를 잡았고 이는 전쟁의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었다. 

 

 

대동여지도 속 개성




고려 현종의 개경 사수는 신의 한 수? 도박? 


이런 거란군의 개경 직도 전술은 분명 성공 가능성이 있었다. 고려의 주력 부대가 거란군을 추격하는 과정에 있었고 개경은 많아봐야 수천명의 부대로 10만여 명의 거란군을 상대해야 했다. 물론, 고려는 2차 고려 거란 전쟁의 교훈으로 수도 방비를 위한 축성을 하는 등 대비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수도 방어를 위한 나성의 축조는 3차 고려 거란 전쟁이 끝나고 10여 년 만에 완성이 됐다. 2차 고려 전쟁 당시 개경의 수비 시스템이 완벽하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었다. 

소수의 병력으로도 대군을 막아낼 수 있는 게 공성전이지만, 강동 6주 등 변방보다 약한 방어 체계는 거란군의 대규모 공세에 상대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 현종으로서는 신변의 보호를 위해 또 한 번의 몽진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현종은 도망 대신 결사 항전을 선택했다. 이는 군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이미 한번 몽진을 했던 그로서는 또다시 몽진을 한다면 왕의 권위가 크게 실추될 수 있었다. 2차 고려 거란 전쟁을 겪으며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여전히 강성함을 느끼고 그들의 힘을 억제하는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던 현종이었다.

이에 지방관이 파견되고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했던 그였지만, 두 번째 몽진에는 호족들의 반발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 수에서는 논란이 있지만, 고려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20여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는 총동원령을 시행한 상황에서 왕이 도망간다는 건 여론의 악화를 불러올 수 있었다. 현종은 2차 고려 거란 전쟁 이후 또 다른 전쟁을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전시 체제와 같은 상황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통해 호족들을 비롯해 반대파를 힘으로 제압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준비한 전쟁에서 현종은 또 한 번의 도망을 택하는 건 정치적으로도 어려운 일이었다. 

현종은 개경 주변의 백성들을 개경으로 피난시키고 일대를 초토화하는 청야 전술로 맞섰다. 또한, 그가 앞장서 항전을 독려했다. 이런 왕의 태도는 분명 백성들의 큰 지지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 완성되지 않았지만, 성벽이 구축되는 등 방어 체계도 있었다. 거란군은 긴 이동으로 지쳐있기도 했다. 총사령관인 강감찬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전쟁 상황을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현종은 며칠만 버틸 수 수 있다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판단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큰 도박이었다. 거란군이 그대로 공성전을 펼친다면 개경은 큰 위기에 빠질 수 있었다. 

 

 

거란문자

 




승리 기회를 스스로 놓친 소배압의 철군


고려의 큰 위기 상황에서 거란군은 진격을 멈췄다. 여러 어려움을 뚫고 개경 근처까지 남하한 거란군으로서는 다소 이상한 결정이었다. 소배압은 공성전을 개시하기 전 정찰을 통해 개경의 방어 상태와 항전 의지를 파악했다. 그리고 사실상 방비가 없었던 2차 고려 거란 전쟁과 달리 성벽이 구축되고 있고 군사적 방어 태세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에 시시각각 고려의 기마병과 또 다른 추격군이 그들을 압박하고 있음도 인지하고 있었다. 

만약, 공성전이 길어진다면 거란군은 고려 영토 내에서 포위될 수 있었다. 여기서 소배압은 판단을 해야 했다. 만약 소배압이 과감한 개경 공략을 택했다면 전쟁 양상은 달라질 수 있었다. 소배압은 돌연 철군을 결정했다. 그러면서 기만술을 통해 고려의 허점을 노렸다. 소배압의 거란군은 철군을 공공연하게 알리면서 한편으로 300여 명의 군사를 비밀리에 고려 개경에 침투시키려 했다. 방심한 고려군의 허를 찌를 작전이었지만, 고려 현종은 100여 명의 결사대로 거란의 300여 군사를 궤멸시켰다. 

이 승리는 거란군에게 고려의 개경 방어가 단단함을 인지토록 했다. 고려 현종의 이런 기습 공격은 매우 중요한 결정이었다. 이 작전이 실패했다면 거란군은 그대로 개경으로 진격할 수도 있었다. 결국, 현종의 도박은 성공적이었다. 소배압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철군을 단행했다.

현종이 높은 평가를 받는 건 스스로 전장의 중심에서 승리를 이끌었다는 점이다. 그가 개경에서 강력히 항전을 한 건 고려군과 백성들의 사기를 높이는 일이었다. 기세가 무엇보다 중요한 전쟁에서 왕의 솔선수범은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이런 항전 의지가 있어 고려는 행운을 함께 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고려가 거란군의 직도 전술을 사전에 대비했고 동북면의 군사들로 개경을 방어토록 했다는 기록도 있다. 거란군의 개경 직접 공략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긴 했지만, 나름 고려도 대비를 하고 있었고 기마부대가 빠르게 남하하기도 했다. 특히, 고려 기마부대의 존재는 거란에 큰 부담이 됐을 수도 있다. 상대적을 빠른 기동력의 기마부대의 위협이 본격화되면서 거란군이 철군을 결정했을 가능성도 있다. 

 

 

귀주대첩도 추정

 



피할 수 있었던 귀주에서의 대회전 


이렇게 철군을 결정한 거란군과 고려군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전개했다. 이런 추격전은 귀주에서 양측 주력군의 대치로 이어졌다. 3차 고려 거란 전쟁의 하이라이트인 귀주대첩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이 전투는 거란군이 피할 수 있는 대결이었다. 

거란군은 철군 과정에서 부분적인 피해를 당했을 수도 있지만, 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귀주대첩이 있었던 귀주성을 지나면 얼마 안 가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철군의 속도를 더했다면 전투를 피할 수 있었다. 귀주대첩이 일어났을 당시 거란군은 보다 지향적으로 유리한 자리를 선점하고 있었다. 전투를 하려 했다면 고려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전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란군은 고려의 추격군이 귀주의 평원에 도달하자 강을 건너 사실상 배수의 진을 치고 맞섰다. 귀주의 평원에서 고려군과 거란의 대 병력이 마침내 정면 대결을 하는 순간이었다. 거란군은 그들의 기마부대를 앞세워 고려군을 압박했고 고려군은 그에 최적화된 검차 부대로 맞섰다. 

양측은 귀주의 벌판에서 치열한 접전을 이어갔다. 이 접전의 양상을 바꾼 건 고려 김종현 장군이 이끄는 기마부대의 출현이었다. 개경의 방어를 위해 남하했던 고려의 철갑 기병은 철군하는 거란군을 쫓아 다시 북상했고 접전 중이 귀주 벌판에 등장했다. 

고려의 기마부대는 거란군의 측면과 후면을 공격했고 거란군 진형은 와해됐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거란군은 고려군의 공세를 당할 수 없었고 빠르게 도주했다. 기록에는 거란의 총사령관 소배압도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도주했다고 전해진다. 일명 모루와 망치 전략으로 표현되는 전투 방식을 고려는 그대로 재현하며 전세를 한 번에 역전시켰다. 

보병을 중심으로 한 고려 주력군이 기마병 중심의 거란군과 대치하면서 그들의 힘을 빼고 망치 역할을 하는 고려 기마부대가 거란군을 내리치는 듯한 전술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10만 명의 대군으로 고려는 침공한 거란군은 수천 명의 생존자들과 국경을 넘어서는 궤멸적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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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왜 거란군은 갈 길을 멈추고 고려군과 대회전을 펼쳤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이미 전쟁은 승리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들은 긴 원정으로 지친 상황이었다. 가능하면 빠른 철군으로 다음을 기약하는 편이 그들에게 유리할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거란군의 총사령관 소배압은 고려군과의 정면 대결을 택했다. 소배압은 고려의 주력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패전의 책임을 일정 부분 덜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지도 모른다. 유리한 지형을 선점한 만큼 유리한 싸움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모른다. 고려의 검차에 대한 대응책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2차 고려 거란 전쟁처럼 고려 주력군에 궤멸적 피해를 주는 승리를 한다면 전쟁 상황을 반전시킬 수도 있었다. 또 다른 분석을 한다면 그들의 철군로가 막힌 더는 물러설 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 거란군이 몰렸을수도 있다. 하지만 고려의 기마부대가 전투 중 변수가 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추론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런 거란군의 선택을 고려도 피할 리 만무했다. 고려는 거란이 다시는 고려를 침공하지 못하도록 큰 승리가 필요했다. 이는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쟁에 임했던 이순신 장군의 마음도 이와 같았다. 특히, 소배압의 10만 대군은 2차 고려 거란 전쟁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거란의 장점이 집약된 정예군이었다. 이 부대에 큰 승리를 한다면 거란에는 치명타가 될 수 있었다. 

다만, 고려도 리스크를 안고 있었다. 평원에서의 대회전은 기마부대가 절대 유리한 환경이기 때문이었다.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 주력군은 검차가 있었다고 하지만 보병 위주였다. 기마병과 보병의 대결은 대체로 기마병이 유리했다. 우리 역사에서도 외국 군대와 평원에서의 대회전은 거의 없었다.

 

 

귀주대첩도




소중한 평지 대회전의 승전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 당시 주필산 전투에서 당태종이 이끄는 당나군과 고구려의 15만 대군이 평원에서 대회전을 펼쳤다는 기록이 중국의 사서 등에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의 승패와 관련해 평가가 엇갈리지만, 고구려가 당나라의 진격을 억제하지는 못했고 안시성은 고립상태에서 당태종의 당나라 군과 치열한 접전을 하게 된다. 

2차 고려 거란 전쟁 당시에도 고려의 총사령관 강조가 이끄는 고려 주력군이 통주의 벌판에서 거란군과 대결했지만, 초반 우세를 지키지 못하고 대패한 기억이 있다. 이를 알고 있는 고려군으로서는 평지에서의 대회전이 부담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려군은 과감히 평지에서 대회전에 나섰고 버티고 또 버텼다. 이후 김종현이 이끄는 기마부대의 공격과 함께 고려군은 승기를 잡았다. 어쩌면 고려의 대회전은 철저한 사전 계획에 의한 전투였을 가능성도 있다. 거란군의 공세를 이끌어낸 측면도 있다. 고려는 그 대회전에서 대승을 하면서 30년 가까이 이어진 고려 거란 전쟁을 승리의 역사로 만들 수 있었다. 

결국, 거란은 3차 고려 거란 전쟁의 패전 이후 고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했고 고려와 거란의 전쟁은 마침표를 찍었다. 이후 고려와 거란은 고려 국경에 자리한 거란의 성과 관련한 영토 분쟁을 지속했지만, 전면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거란은 고려와의 전면전이 부담이었고 고려는 고려 거란 전쟁 이후에도 천리장성 축조와 개경의 나성 축조 등으로 국방을 더욱더 튼튼히 했다.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긴장 속에 평화가 이어졌다. 이후 양국의 희비는 엇갈렸다. 고려는 안정된 국방을 바탕으로 활발한 대외 교류를 하며 국력을 키우고 나라를 발전시켰다. 반대로 거란은 고려 거란 전쟁의 실패 후 나라의 발전이 정체되고 쇠락을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거란은 또 다른 유목 민족인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멸망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 거란은 다시는 나라를 세우지 못하고 타 민족에 동화되어 그들의 역사마저 단절되고 말았다. 

이렇게 귀주대첩은 고려는 물론이고 동아시아의 역사를 바꾼 빛나는 우리의 역사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영웅들도 만날 수 있었다. 최근 드라마를 통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양규와 같은 인물이 재평가되는 건 분명 반가운 일이다. 아울러 고려의 현명하고 전략적인 외교와 외침에 대한 대응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큰 교훈을 준다. 귀주대첩과 관련한 앞선 의문은 어쩌면 자랑스러운 역사를 더 깊게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사진 : 위키백과, 구글 지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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