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728x90
반응형
728x170

 

우리 역사상 최초의 통일 왕국이라 할 수 있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창업한 조선은 유교적 정치 이념을 바탕으로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유교는 불교를 밀어내고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을 지배했고 그 영향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런 조선의 변화를 상징하는 일은 한양으로의 천도였다. 새 왕국의 수도가 기존 고려의 수도를 그대로 계승하는 데 있어 왕실의 거부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1392년 즉위한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자신의 무너뜨린 나라의 궁궐을 그대로 사용하는 게 꺼림직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성계는 즉위 후 얼마 안가 천도를 강력한 추진했다. 하지만 공신들과 관리들의 생각은 달랐다. 새로운 나라가 서고 아직 안정기에 접어들지 못한 시점에 대규모 토목 공사가 불가피한 천도는 나라 재정과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여전히 고려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는 다수의 백성들의 여론을 악화시킬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당장은 국정을 안정시키고 민생을 돌보는 일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그 저변에는 기존 관리들의 이해관계도 깔려있었다. 관료들에게 오랜 세월 고려 수도 개경으로 중심으로 했던 그들의 터전을 옮기는 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이 될 수 있었다. 자신의 세력 기반을 잃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성계의 천도와 관련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개경에 정치적 기반이 튼튼하다 할 수 없었다. 왕권을 든든히 할 수 있는 우호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새로운 수도가 더 적절했다.

여기에 고려 말부터 제기된 천도와 관련한 각종 풍수도참설 등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어느 나라나 국정이 혼란하면 풍수도참설과 미신이 민간을 중심으로 퍼지게 된다. 고려의 수도 개경과 관련해 그 기운이 쇠하여 나라가 어려워진다는 등을 이유로 천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곳곳에 제기됐다. 물론, 고려의 위기는 사회 시스템 전반의 모순이 커지고 계속되는 외침, 그에 상응하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집권층의 무능과 부패가 큰 원인이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그런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제대로 인지하기 어려웠고 무속 등에 의지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확대된 미신과 무속, 풍수도참설 등은 고려 말 여론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창덕궁

 


여러 부담이 있었지만, 창업 군주의 의지를 완전히 꺾기는 어려웠다. 조정의 논의는 천도 가능과 불가가 아닌 어디로 천도할지로 모아졌다. 그 후보로는 현재 서울 종로 일대를 포함하는 한양과 신촌 지역인 무악, 최고의 명당으로 불렸던 계룡산 지역이 있었다.

처음 수도로서 제기된 곳은 계룡산 지역이었다. 실제 이 지역에서는 왕궁 및 수도 건설을 위한 공사가 진행되기도 했다. 하지만 계룡산으로의 천도는 1년여 만에 돌연 중단됐다. 조선 역사에는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되어 있다. 계룡산이 지나치게 남쪽에 있고 풍수지리상 길지가 아니라는 주장이 이어졌다. 조정의 논의 끝에 그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계룡산 천도가 이루어졌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계룡산은 애초 천하의 명당이라 해서  수도로 결정된 곳이었다. 다른 현실적인 문제가 더 결정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개경에서 계룡산은 지리적으로 멀이 떨어져 있고 이전에 따른 부담이 컸다. 개경의 관리들이 이동하기에는 부담이 컸다. 한양 천도에도 미온적인 관리들에게 계룡산 천도는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과거부터 도시 기능을 하고 있었던 한양과 달리 계룡산에는 그런 도시 기반 시설이 전혀 없고 모든 걸 백지상태에서 시작해야 했다. 수도 건설에 따른 예산과 시간, 인력 등의 문제가 훨씬 더 클 수 있었다. 

결국, 천도의 장소는 무악과 한양으로 압축됐다. 무악이 1순위로 떠올랐다. 풍수지리적으로 더 높은 점수를 받았고 이성계의 멘토로 할 수 있는 무학대사 역시 무악을 선호했다. 하지만 상당수 조정 대신들은 무악의 터가 좁다는 등의 이유로 이어 반대했다. 반대의 이면에는 천도 자체를 반대하는 조정 대신들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당연히 무악에 대한 단점이 더 부각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조정의 흐름은 이성계에게 결코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자신의 천도에 대한 의지를 조정에서 각종 현실론으로 이유로 막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대립 속에 한양이 강력한 후보지가 됐다. 이성계의 의지가 여전히 확고한 상화에서 조저에서도 이를 막을 수만은 없었다. 이성계는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정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하륜을 중심으로 풍수지리 도참설 등에 근거해 무악으로의 천도 주장이 계속됐지만, 정도전 등 공신 세력들은 수도를 정함에 있어 풍수지리와 도참설들에 의존하는 점에 크게 반대했다. 특히, 정도전은 "국가가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사람에 달려있는 것이지 자리의 성쇠가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풍수설에 의한 천도 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는 성리학적 사고와도 관련이 있다. 

사실 성리학은 관념론적인 학문이긴 하지만, 보이는 현상과 사실에 근거해 사물을 보고 현실을 바라보는 지극히 현실적인 학문이기도 하다. 이에 성리학에서는 종교나 무속 신앙 등 신의의 존재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당연히 풍수지리설에도 부정적인 시각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왕의 의지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무악과 개경으로 압축된 천도 논쟁은 이성계와 관리들의 절충점을 찾는 선에서 한양으로 결정됐다. 일조의 정치적 합의의 결과라 할 수 있다. 1394년의 일이다. 이후 천도와 관련한 일은 빠르게 진행됐다. 궁궐이 빠르게 지어지고 도성 성곽도 지어졌다. 이성계는 도성이 완벽히 완성되기도 전에 한양 별궁에 위치하며 공사를 살폈다. 그렇게 한양은 조선의 새로운 수도로 자리했다. 

이렇게 긴 논의를 거쳐 조선의 수도로 정해진 한양이었지만, 정치 격벽 속에 수도로서 완전히 기능을 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1398년 이방원의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이성계는 이방원에 의해 사실상 권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왕의 자리를 유지했지만, 조정과 군권을 이방원이 장악한 상황이었다. 이성계는 둘째 아들 방과를 세자로 책봉하고 얼마 안가 양위하며 상왕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막후에서 이방원과 맞섰다. 부자간의 권력을 놓고 벌리는 암투는 끝나지 않았다. 

 

1895년 숭례문, 1921년 숭례문

 


이성계에 의해 왕위에 오른 조선 2대 왕 정종은 1399년 개경으로의 환도를 결정했다. 정종의 뜻이라기보다는 이성계의 뜻이었다. 그가 세자로 책봉한 어린 아들을 포함해 신덕왕후 소생의 아들이 참살되고 신덕왕후의 마지막 남은 소생인 공주가 비구니 승려가 되는 상황 속에 한양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이방원을 견제하기 위한 방편도 숨어있었다 할 수 있었다.

이미 한양의 조정을 장악한 이방원에 맞서기 위해 개경이 더 나을 수 있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 물론,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방원은 넷째 형 이방간이 일으킨 2차 왕자의 난을 제압하며 그의 권력 기반을 더 튼튼히 했다. 이방원을 막을 이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현실을 인정한 정종은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했고 국정 운영에서 손을 땠다. 이후 얼마 안 가 그에게 왕위를 선위했다. 1400년 이방원은 훗날 태종이 되는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했다.

태종 즉위 이후 다시 한양으로서 천도 문제가 국정 현안으로 떠올랐다. 태종은 자신이 왕위에 오른 개경을 떠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태상왕으로 물러난 이성계의 의지가 강했다. 이성계는 한양으로의 재 천도를 주장했다. 비록, 아들에 밀려 권좌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이성계는 창업 군주의 권위가 있었다. 왕이 되기 위해 많은 이들의 숙청했고 아버지를 권자에서 밀어낸 태종으로서는 왕권의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이성계의 요청을 무조건 거부할 수 없었다. 

천도를 위한 논의 장이 열렸다. 태종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하륜을 중심으로 무악으로서의 천도 주장이 강하게 일어났다. 여기에 개경과 한양을 모두 수도로 활용하는 양경제 방안도 주장됐다. 개경을 수도로 하자는 주장이 다시 힘을 얻기도 했다. 이런 논의 속에 태종은 1404년 한양으로의 천도를 결정했다. 아버지 이성계의 뜻을 거스르기에는 그도 부담이 됐다. 대신 법궁이라 할 수 있는 경복궁 인근에 새로운 궁을 짓기로 결정한다. 지금의 창덕궁이다.

그 과정에서 태종은 무악 천도와 개경 수도 유지의 주장을 잠재우기 위해 묘안을 짜냈다. 그는 1404년 10월 종묘 앞에서  “종묘에 들어가 송도(개경)와 한양, 무악 등 도읍지 후보 세 곳을 두고 점을 쳐서 결정하겠다. 그렇게 결정된 뒤에는 어떤 사태가 발생해도 더는 왈가왈부하지 마라” 하고 명령했다. 그는 중요 대신과 종친들과 함께 종묘에 들어가 쟁반 위에 돈을 돈지는 일종의 돈점을 쳐서 마지막 결정을 했다. 결과는 한양이었다. 이를 통해 태종은  한양 천도가 하늘을 뜻임을 선포하고 더 이상의 논란을 차단했다.

이후 한양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수도로 자리했다. 창덕궁이 지어졌고 도성을 수비하는 성곽이 축조됐다. 도시에 필요한 수로와 물을 확보를 위해 청계천이 빠르게 정비됐다. 그 외에 도시에 필요한 각종 인프라가 완비됐다. 세종 때에 이르러서는 인구 20만의 대도시로 성장했고 대한민국의 수도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가 됐다. 이런 발전 과정 속에서 서울은 임진왜란의 큰 참화를 겪었고 일제 강점기 법궁인 경복궁이 총독부 건물이 들어서면서 그 원형이 크게 파괴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6.25 한국전쟁의 고통 속에 도시가 폐허가 되기도 했다. 

 

1920년대 경복궁과 인근 지역

 


하지만 서울을 한국의 고도성장과 엄청난 속도의 산업화를 상징하는 도시가 됐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이 되고 있다. 그 시작은 조선의 한양 천도였다.

이렇게 한양으로의 천도를 확정한 태종이지만,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난 안 했지만, 후대에는 무악에 도읍을 정하는 자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 그의 마음이 사실은 무악, 지금의 신촌에 있었음을 은연중 보여주는 일화였다. 그때 무악으로 천도가 결정됐다면 지금의 연세대 자리가 궁궐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대신 그의 아들 세종대왕은 이후 연희궁이라는 별궁을 무악에 지어주기도 했다. 

한양 천도는 당시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풍수와 정치적 상황과 합의, 도시로서의 기능 등을 모두 고려한 치열한 논의와 시행착오의 과정이 있었다. 1392년 조선 건국 시점부터 논의를 시작한 한양 천도는 천도와 환도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고 10년이 넘은 1404년에 와서야 완벽하게 조선의 수도가 됐다.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었고 강력한 왕권이 지배하는 시기였음에도 왕의 의견이 곧바로 반영되지 못했을 만큼 여러 이해관계가 얽히고 논쟁을 했던 일이었다.

이는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정하고 시행함에 있어 충분한 논의와 의견 수렴의 과정이 있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크게 논란이 되고 있는 대통령 집무실 이전과 청와대의 개방 등의 문제가 결코 졸속으로 즉흥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되고 사회적 합의가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시행되는 정책의 문제들은 고스란히 국민의 부담으로 귀결되고 세대를 넘어서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조선의 한양 천도는 결코 과거의 역사가 아닌 두고두고 참고해야 할 역사다. 



사진 : 우리 역사넷, 글 : jihuni74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
반응형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