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백제, 신라가 대결한 삼국 시대는 군사적 대결만큼이나 치열한 외교전이 전개되는 시기였다. 삼국은 한강 유역의 지배권을 놓고 대결했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나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 순서는 백제, 고구려, 신라의 순이었다.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건 신라가 삼국 중 가장 발전이 늦었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신라는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다. 이는 중국의 앞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했다. 중국으로 사신을 파견하려 하면 고구려 또는 백제의 협조가 필요했다. 마침 이들 나라는 신라보다 국력이 강했고 신라로서는 중국과의 교류에 제약이 있었다. 신라는 바다 건너 일본, 왜와는 전통적으로 대립관계에 있어 교류보다는 군사적 충돌이 많았고 일찍부터 대외 무역과 ..
우리가 흔히 보는 세계지도에서 아일랜드는 유럽의 가장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그만큼 거리만 먼 나라다. 섬나라 영국의 서편에 자리한 또 다른 섬나라 아일랜드는 물리적 거리는 우리와 멀지만, 식민지 지배를 당했던 아픈 역사는 공유하고 있다. 아일랜드의 영국에 의한 피 식민 지배의 역사는 무려 750여 년에 이른다. 그 기간 아일랜드는 수많은 고난의 역사를 쌓았고 그렇게 생긴 응어리는 지금도 영국에 대한 불편한 감정으로 국민들의 마음 한 편에 남아있다. 2022년은 1922년 아일랜드가 자유국으로서 독립을 선포한지 100년이 되는 해다. 유럽의 마지막 식민자였던 아일랜드는 이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아일랜드는 긴 고난의 역사를 견뎠고 치열하게 투쟁했다. 그렇게 독립한 아일랜드는 1970년대까지 농업과 축산이..
1945년 종전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는 민주주의 미국과 공산주의 소련으로 대표되는 양 진영이 대립하는 냉전시대가 지배했다. 이 냉전체제는 두 강대국 간 직접적인 대결은 없었지만, 전 세계를 팽팽한 긴장감 속에 몰아넣었다. 양 진영을 대리하는 국지전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세계를 핵 전쟁을 포함해 제3차 세계대전의 위협 속에 살게 했다. 우리 민족 그 민족이 살고 있는 한반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긴 일제 강점기의 시련을 보낸 우리 민족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했지만,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 아래 남한과 북한에 다른 체제의 정권이 들어섰다. 이후 민족은 분단됐고 6.25 한국전쟁의 큰 전쟁을 겪었다. 이후 한반도는 휴전 체제 속에 분단되어 대립의 세월을 이어가고 있다. 휴전선을 중심으..
우리 역사상 최고의 왕으로 손꼽히는 세종대왕은 그의 뛰어난 자질과 함께 아버지 태종 이방원이 수립한 강력한 왕권이 있어 성군이 될 수 있었다는 게 보통의 평가다. 세종대왕은 건국 후 권력의 주도권을 놓고 왕권과 신권의 대립했고 왕자들 사이에서도 대립이 있었다. 이는 유혈 충돌로 이어졌고 다수의 사람들이 희생됐다. 조선을 설계한 개국공신 정도전도 권력 투쟁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고 조선 건국한 이성계 역시 사실상 아들 이방원에 밀려 권자에서 물러나 쓸쓸한 노년을 보내야 했다. 치열한 권력 투쟁을 이겨낸 이방원은 정도전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정승들이 주도하는 정치 시스템인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왕이 주도하는 6조 직계제를 채택하며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다. 왕권에 위협이 되는 세력은 외척이든 공신이든 숙청했..
한국사에서 벗어나 세계사로 그 영역을 넓힌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현대 세계사의 중요한 부분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 그중 독일과 공산주의 소련이 대결한 독. 소 전쟁을 다뤘다. 올해 80주년이 되는 독.소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사에서 우리에게 많은 알려지지 않았다. 전쟁의 당사자가 중 하나가 지금은 사라졌지만, 공산주의 진영의 맹주 소련이었다는 점에서 언급하기 껄끄러운 면이 있었다. 하지만 독.소 전쟁은 나치 독일과 민주주의 서방 진영이 대결한 서부 전선과 비교할 수 없는 파괴적이고 엄청난 피해를 남긴 전쟁이었다. 그 전쟁의 결과는 세계의 흐름을 뒤바꿔 놓을 정도로 그 후폭풍이 거셌다. 역사저널 그날 323회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개와 함께 독.소 전쟁의 발발 배경을 중심으로 이야기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 후 조선은 국가적인 위기에 빠져들었다. 전쟁의 피해가 막심했고 피해 복구는 더디기만 했다. 이를 해결한 권력층의 노력도 있었지만, 극심한 대립으로 치달은 붕당정치는 백성들을 위한 정치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 국가 위기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대부 양반들은 한계에 다다른 국가 시스템을 개선하고 변화를 모색하기 보다 구시대적인 사고를 벗어나 못했고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더 몰두했다. 그 사이 조선은 더 수구화되고 시대의 흐름을 따라 가지 못하고 말았다. 이런 조선 후기 부흥기를 이끌었던 왕이 있었다. 영조와 그의 손자 정조 시대 조선은 반등의 기운이 강하게 일어났다. 기존의 성리학의 한계를 탈피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실학이 일어났다. 서구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