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은 조선의 임금 고종이 궁궐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을 일종의 망명을 한 아관파천과 함께 독립신문 창간과 함께 독립협회가 설립된 연도이기도 하다.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 한글 신문이었고 독립협회는 일반 대중들이 참여한 자주독립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상당했다. 시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195회에서는 독립신문의 창간에서 시작해 독립협회의 활동 그 의의를 다뤘다. 독립신문은 갑신정변을 주도했다 거사가 실패한 이후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서재필이 창간을 주도했다. 서재필은 당시 개화파 정치 세력을 주도하고 있던 인사들의 후원 속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서재필과 개화파 인사들은 갑신정변 실패의 주요한 원인이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이 있음을 공감했다. 그들은 대중들을 계몽하고 근..
1896년 2월 궁궐에서 상궁들이 타는 가마 하나가 궁 밖을 나가 긴박하게 어느 장소로 이동했다. 그 가마가 향한 곳은 당시로는 아라사라 칭하던 러시아 공사관이었다. 그리고 그 가마에 타고 있는 인물은 조선의 임금 고종이었다. 우리가 아는 역사적 사건 중 하나인 아관파천의 시작이었다. 역사저널 그날 194회에서는 고종의 아관파천의 의미와 전개 과정을 다뤘다. 아관파천은 1894년 청. 일전쟁,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노골화된 일본의 조선 국권 침탈과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심의 선택이었다. 당시 고종은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친일 내각과 궁궐 수비대에 둘러싸여 있었다. 항상 신변의 위협을 걱정해야 하는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고종으로서는 일본의 간섭을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
역사저널 그날 191회는 조선이 최초로 국제 외교무대에 나선 그 뒷이야기를 다뤘다. 1883년 우리 근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조선이 당시 조선 주변국인 일본과 청나라를 제외한 서양 국가에 최초로 외교 사절단을 파견했기 때문이었다. 보빙사라는 생소한 이름으로 미국으로 파견된 조선의 외교 사절단은 1882년 체결된 조미 수호통상조약 이후 조선에 파견된 미국 공사 푸트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미국으로 향했다. 이들은 고종의 명을 받아 미국으로 향했다. 대부분의 구성원의 고위 관리들의 자재들로 젊고 당시 조선이 추진하던 개화정책에 긍정적인 이들이었다. 고종은 이들로 하여금 외교관의 역할뿐만 아니라 서양의 발전된 문물을 몸소 체험하고 이를 토대로 이들이 개화정책을 이끌어가기를 기대했다. 보빙사 일행의 미국..
우리의 역사를 토크 형식으로 풀어가는 장수 프로그램 역사 저널 그날, 190회 주제는 근대사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던 임오군란이었다. 1882년 발생한 임오군란은 당시 신식 군대에 비해 홀대를 받았던 구식 군대의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켜 궁궐을 습격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임진왜란 이후 처음으로 일반 백성들의 최고 권력의 상징인 궁궐을 습격한 사건으로 당시로서는 큰 충격이었고 조선의 정치는 물론이고 국제 관계에도 큰 변화를 불러온 사건이었다. 사건의 직접 발단은 앞서 언급한 대로 구식 군대의 군인들의 처우에 대한 불만이었다. 조선은 1876년 불평등 조약은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 이후 쇄국 정책을 버리고 개화정책을 시행하면서 부국강병을 기조로 외국과의 교류를 확대하는 과정에 있었다. 이는 아버지 대원군을..
고려 역사에 있어 몽고와의 전쟁은 사상 유례없는 장기간의 투쟁이었다. 당시 아시아는 전체는 물론이고 유럽에까지 영향을 미치던 몽고군은 세계 최강의 전력이었다. 그들이 침공한 나라는 예외 없이 굴복당했다. 하지만 고려는 30여 년을 버티며 그들과 맞섰다. 하지만 긴 전쟁으로 인해 일반 백성둘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피폐해졌다. 몽고군의 약탈과 노략질에 전 국토가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그 과정에서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파괴되고 소실되는 아픔도 있었다. 고려는 장기간의 전쟁을 위해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옮겼다. 몽고군이 육지에서 세계 최강이지만, 해전에 약하는 점을 이용한 결정이었다. 강화도에 자리한 고려 정부는 대몽 전쟁을 이끌었다. 문제는 강화도 고려 정부가 민생을 외면한 그들만의 삶을 영위했다는 점이..
얼마 전 TV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우리에게 아직 멀기만 제국 발해에 대해 다뤘다. 멸망하 고구려를 계승하고 그들보다 더 광활한 영토를 가졌고 해동성국이라 불리던 발해에 대한 이겨기는 마음을 뜨겁게 했지만, 이후 우리 민족에서 만주 지역이 남은 땅이 되었다는 사실은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만주 지역은 과거 요동, 요서라 불리던 곳으로 우리 민족 삶의 터전이었다. 특히, 삼국시대 고구려는 이 지역을 근거지로 중국의 대제국과 당당히 맞서며 우리 민족의 자존감을 높여주었다. 고려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고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구축했고 주변 이민족들을 지배하는 제국의 면모를 갖췄다. 이런 고구려가 중국 통일 왕조에는 눈엣 가시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고구려는 중국의 신흥 제국 당나라와 신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