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그 정신을 계승한다고 할 정도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1960년 당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자행된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면서 시작된 시민혁명은 이승만의 하야와 그를 추종하는 자유당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우리 현대사에서 너무나 중요한 사건이었다. 역사저널 그날 260회에서는 4.19 혁명 60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에 4.19 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당시의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4.19 혁명의 중요한 원인은 앞서 언급한 3.15 대통령, 부통령 부정 선거에 있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의 계속된 실정과 부정부패도 큰 원인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이승만은 대통령 연임을 지속하며 그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최근 우리 현대사를 재조명하고 있는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259회에서는 대한민국의 최초 정부,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의 이야기를 다뤘다. 해방 이후 시작된 미 군정,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위한 미국과 소련의 협상, 그 과정에서 유력 정치 지도자들의 행보를 이승만을 중심으로 보여주었다. 해방 이후 한반도는 38도 선을 중심으로 남으로는 미국이 북으로는 소련이 진입하며 대립하는 구조였다. 해방은 되었지만, 두 강대국들에 의해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되는 상황이 됐다. 미국과 소련의 주도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되고 정부 수립 전까지 그들이 주도하는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이에 반대하는 반탁 운동이 강하게 일어났지만, 미국과 소련은 미소 공동위원회를 열어 관련 논의를 지속했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재조명하고 있는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258회에서는 1949년 6월 온 나라를 충격에 빠뜨렸던 김구 암살 사건을 다뤘다. 김구 암살 사건은 안두희라는 포병 장교에 의해 자행된 사건으로 암살범 안두희는 온 국민의 공분을 샀고 배후에 대한 의혹이 끊임없이 있었지만, 속 시원한 해답을 찾지 못했고 지금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암살범 안두희가 1996년 사망하면서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기회마저 사실상 사라지고 말았다. 역사 저널 그날에서는 각종 기록들을 토대로 김구 암살사건의 미스터리를 추적했다. 1949년 6월 백범 김구는 그의 자택에 머물러 있었다. 포병 장교였던 안두희는 당시 북한군과의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으로 나가기 전 그를 면담했다. 김구와 안면이 있었던 안두희는 의심을..
최근 급속히 냉각된 한일 관계가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 이후 일본의 수출규제와 우리나라 정부의 지소미아 파기 등 맞대응과 민간의 일본 보이콧 운동이 겹쳐지면서 인적, 물적 교류가 급속히 위축되었다. 여기에 코로나 사태에 따른 일본의 갑작스러운 한국인 입국 불허 조치와 정부의 대응 조치가 더해지면서 사태 해결이 더 어려웠다. 일본의 아베 정권은 정권의 유지를 위해 험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고 일본의 우익 세력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일본은 지속적으로 독도가 자신의 영토임을 주장하면서 국제 분쟁 지역화하려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일본은 국제사법 재판소에서 시비를 가리자는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오랜 기..
일제시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독립운동의 단체가 중국과 러시아 등 해외 각지에 있었고 독립운동의 노선에 다양했던 탓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을 모두 총괄하였는지에 대한 이견도 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고 많은 인사들이 이곳에 속해 있었다.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의거도 임시정부가 주도하였고 이후 광복군 창설 역시 임시정부가 중심에 있었다. 해방 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 속에 한반도가 편입되면서 임시정부는 그 존재감을 잃었지만, 다수의 임시정부 인사들이 정치활동을 했고 우리 헌법에는 대한민국이 1919년 3.1운동의 정신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정의 시작이었고 ..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2회에 거쳐 그 의미를 재조명한 시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211회에서는 3.1운동의 전개 과정을 소개해주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 외에 잘 몰랐던 이야기까지 알 수 있었다. 물론, 3.1 운동의 역사적 의미는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3.1운동은 1910년 일제의 조선에 대한 강제 병합 이후 계속된 압제에 대한 반감, 고종 황제의 승하를 기점으로 증폭된 분노, 국. 내외 독립운동과 민족자결주의 등 대외적 여건이 결합되어 발생했다. 결코 우연에 의한 사건이 아니었고 치밀한 준비와 많은 이들의 헌신이 있어 가능했다. 3.1운동은 전국적으로 200만명 이상의 국민들이 만세 운동에 참여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에 죽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