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대한민국과 일본은 국교 정상화를 위한 협상을 마무리하고 한일 협정을 체결했다. 이로써 일제에 의한 한일강제병합과 이어진 식민통치, 일본이 2차 세계대전 패망 후 교류가 중단되었던 대한민국과 일본은 외교관계를 복원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과 일본의 외교관계에 있어 근간은 1965년 6월 체결된 한일협정이다. 하지만 이 협정은 양측의 해석상 차이와 과거사 문제에 인식이 차이를 비켜간 협정으로 한일 관계를 악화시키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최근에도 전후 배상 문제를 둘러싼 양측의 갈등은 일본의 경제 보복과 함께 그 골이 더 깊어졌다. 이로 인해 한일협정은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역사저널 그날 273회에서는 협정 당시 국내외 상황과 그 배경, 최근 알려진 숨겨진 이야기들을 다뤘다...
6.25 한국전쟁 70주년 특집으로 4주간에 거쳐 당시의 상황을 조명한 역사저널 그날 266회에서는 중국군의 본격 개입 이후 전황과 정전협정으로 이어지는 과정의 이야기를 다뤘다. 그 과정에서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했던 당시 국제정세와 이해 당사국들의 상황도 살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한 전쟁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의 참전으로 큰 변화를 맞이했고 낙동강 전선에서의 치열한 대치와 세계 전쟁사에 남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한 반전, 이후 1950년 10월 중국군의 대규모 참전으로 인한 재반전의 과정을 거쳤다. 중국군의 참전 이후 전황은 유엔군과 국군에 급격히 불리해졌다. 한때 3.8선을 넘어 파죽지세로 압록강과 두만강에 이르렀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국군을 전력을 과소평가했..
6.25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이해 전쟁의 과정과 그 이면의 이야기를 수회에 거쳐 다루고 있는 역사저널 그날 265회에서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 중국군의 참전과 흥남철수까지의 과정을 소개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중국, 그리고 소련까지 당시 전쟁에 대한 각기 다른 시각과 관점도 볼 수 있었다. 맥아더 장군의 이끄는 유엔군과 국군의 인천상륙 작전 성공으로 전세를 급반전시킬 수 있었다. 주력부대 대부분이 낙동강 전선에 발이 묶여 있던 북한군은 순식간에 보급선이 차단되고 포위되는 상황이 됐다. 급히 후퇴를 했지만, 낙동강 전선에서 이미 전력에 큰 손실을 입었던 북한군의 사실상 궤멸 상태에 빠졌다. 유엔군과 국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남한 지역을 신속히 장악했다. 그 기세는 순식간에 38도..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6.25 한국전쟁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전면 남침으로 시작한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발효될 때까지 3년 넘게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가 있었고 우리는 분단국가로 남게 됐다. 이후 남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체제의 최전선에서 맞서게 됐고 비극적인 전쟁은 종료되지 않았고 휴전의 형태로 여전히 진행형이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6.25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이해 2회에 거쳐 전쟁의 전후 상황, 전개 과정을 소재로 삼아 프로그램을 꾸몄다. 263회에서는 1949년 3월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부터 전쟁에 이르기까지의 국내외 사건들을 중심으로 전쟁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들을 정리했다. 해방 이후 소련의 지원으로 북한..
1945년 해방 이후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미진했던 친일청산이었다. 친일청산의 문제는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이슈로 자리하고 있다. 일제에 협력해 부귀영화를 누린 이들은 자자손손 그 자리를 지키며 우리 사회의 중요한 기득권 세력이 되었지만, 독립운동가들의 자손들은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현실이 대비되며 국민적 공분을 불러왔다. 이러한 왜곡된 현대사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번번이 벽이 부딪혔다. 세대가 바꾸면서 친일청산의 문제는 과거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친일 청산을 위한 범정부적인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1948년 조직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반민특위는 민족을 배신하고 일제와 영합한 이들에 대해 법적 응징을 할 수 있는 기관이었다. 역사저널 그날 262회에서는 이 반..
1948년 10월, 대한민국의 여수지역을 중심으로 군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들은 제주 4.3사건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던 군인들이었다. 이들은 정부의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후 여수, 순천, 구례까지 정부군과 반란군의 치열한 교전이 일어났다. 이는 대규모 유혈사태를 불러왔다. 한때 여순 반란 사건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군사 반란 사건이었고 이후 대한민국이 반공을 국시로 하는 국가가 되는 현대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역사저널 그날 261회에서는 이 여순사건의 배경과 진행 상황, 시사점을 다뤘다. 여순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은 제주 4.3사건에 있었다. 1948년 남한만의 총선과 단독 정부 수립이 확정된 상황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