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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4일은 롯데, 그리고 우리 프로야구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레전드 투수 최동원이 세상을 떠난 지 4주기 되는 날이다. 최동원은 롯데의 1984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던 가을의 영웅이었고 롯데를 대표하는 선수였지만, 롯데가 아닌 타 팀에서 은퇴를 해야 했고 그토록 열망했던 지도자로서의 롯데 복귀를 끝내 이루지 못한 비운의 영웅이기도 했다. 


최동원은 아마야구 시절부터 팀의 소속팀이 대회가 출전하면 거의 전 경기를 책임지는 철완을 과시했다. 고교 시절, 대학, 프로야구가 없던 실업야구 시절, 심지어 국가대표로서 최동원은 엄청난 투구 이닝을 소화해야 했다. 연속경기 완투가 비일비재했다. 지금이라면 엄청한 혹사에 선수생명 단축 우려가 클 수밖에 없었지만, 당시 최동원은 그에게 주어진 무거운 짐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감당했다. 


프로에 와서도 그런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프로야구 초창기 투수 분업의 개념이 부족했고 선진 야구 시스템이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최동원은 선발과 구원을 오가야 했다. 아마 시절과 다르다면 중간 중간 휴식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무리한 투구의 연속인 건 분명했다. 




(최동원 동상 앞에서 머리 숙인 롯데 그룹 회장)



최동원이 진짜 롯데의 레전드로 자리한 건 1984년 한국시리즈였다. 당시 프로야구는 전기, 후기리그로 나눠 정규리그가 치러졌고 전기리그, 후기리그 우승팀이 한국시리즈에 맞붙었다. 당시 롯데와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은 팀은 삼성이었다. 삼성은 전기리그 우승을 하고 후기리그에서는 모든 전력을 다하지 않고 한국시리즈에 대비했다. 그 과정에서 삼성은 후기리그 막판 롯데와 두산의 전신인 OB의 우승 다툼에 있어 캐스팅보트를 쥐게 됐다. 


삼성은 롯데와의 마지막 2연전에서 석연치 않은 경기로 패배를 자초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사실상 롯데를 그들의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선택한 삼성이었다. 삼성은 껄끄러운 상대 OB보다는 롯데가 더 수월하다는 판단이었다. 삼성은 재일동포 좌완 투수 김일륭과 김시진이라는 국내파 우완 정상급 투수가 원투펀치로 자리하고 있었고 장효조, 이만수가 이끄는 강력한 타선이 롯데를 앞도하고 있었다. 사실상 한국시리즈는 어른과 아이의 싸움과 같았다. 


하지만 삼성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단기전에 최적화된 최동원의 능력이었다. 삼성은 김일융, 김시진의 원투 펀치가 최동원과의 맞대결에서 충분히 그를 이길 수 있다고 여겼지만, 한국시리즈 방향을 그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최동원은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의 시리즈에서 5경기에 등판했다. 4번은 선발이었고 한 번은 구원이었다. 


최동원은 홀로 4승 1패를 기록하며 롯데를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역대 최고의 반전시리즈였다. 비록 한국시리즈 MVP는 7차전 역전 3점 홈런의 주인공 유두열이었지만, 최동원이 없었다면 그의 초인적인 투구가 없었다면 보나마나한 시리즈였고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도 없었다. 이후에도 최동원은 롯데의 간판선수로 커리어를 쌓아갔다. 그를 빼놓고 롯데라는 팀을 생각할 수 없었다. 


이런 그에게 1998년 삼성으로의 트레이드는 소식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최동원은 롯데 선수로 최고의 활약을 했지만, 매 시즌 연봉협상 과정에서 구단에 마찰을 빚었다. 최동원은 활약에 걸맞은 합당한 대우를 요구했고 구단은 현실론으로 맞섰기 때문이었다. 이런 마찰은 구단과 선수의 감정의 골을 깊게 했다. 당시만 해도 선수를 구단의 직원 정도로 여기는 분위기가 강한 현실에서 최동원의 모습은 이례적이었고 구단은 그를 점점 눈엣가시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런 그에게 선수협 파동은 최동원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최동원이 주도한 선수노조 형태의 선수협 구성 움직임은 혁명적인 일이었지만, 구단들의 강한 반대에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선수협을 주도한 선수들은 구단들로부터 강한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롯데 구단은 기다렸다는 듯이 최동원의 트레이드를 전격 단행했다. 그 트레이드는 최동원의 삼성행을 시작으로 김시진, 장효조의 롯데행으로 이어졌다. 롯데나 삼성팬 모두에 충격 그 자체였다. 


이는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트레이드 이후 야구에 대한 의욕을 잃은 최동원은 긴 방황을 했고 삼성으로의 복귀 이후에도 제 기량을 되찾지 못한 채 쓸쓸히 은퇴의 길을 걸어야 했다. 이렇게 롯데의 레전드는 선수 생활을 아쉽게 마무리 해야했다. 이후 최동원은 야구와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야구 해설가로 활약하기도 했지만, 예능인으로 사업가로 정치인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열정을 불태웠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선수협 주도자였던 그를 꺼려하는 프로 구단들은 그를 지도자로 영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긴 야인 생활 후 최동원은 한화에서 투수코치, 2군 감독으로 현장 지도자로 돌아왔다. 하지만 롯데로의 복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롯데 팬들은 그를 원했지만, 구단은 그와의 관계 개선을 애써 외면했다. 최동원은 롯데로의 복귀 희망을 버리지 않았지만, 뜻하지 않은 병마가 그를 찾아왔다. 최동원은 끈질기게 암투병을 했지만, 2011년 50대 초반의 나이에 그의 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의 사후 롯데구단은 팬들의 강한 여론에 떠밀려 마지못해 영구결번과 그를 추모하는 일련의 움직임을 했다. 최동원은 이 세상을 떠나서야 롯데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2015시즌 롯데 그룹의 총수가 그의 동상 앞에서 머리를 숙였다. 물론, 최근 롯데 그룹에 대한 좋지 못한 여론을 무마하려는 조치의 일환이었지만, 최동원과 롯데 구단의 화해를 상징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고 말았다. 


누구보다 열정적인 선수였고 롯데를 사랑했던 최동원이었다. 그의 온 힘을 다하는 특유의 역동적인 투구폼도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은 과거 기록으로만 봐야 한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의 존재가 희미할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씨앗을 뿌린 선수협은 자리를 잡았고 그의 선수로서 업적을 기리는 최동원상도 제정되었다. 비록, 그는 이 세상에 없지만, 그가 남긴 흔적을 계속 만날 수 있다는 건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는 롯데 자이언츠라는 팀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우리 프로야구의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진 :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글 : 심종열 (http://gimpoma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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