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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 변산반도에 자리한 전북 부안군은 북쪽의 김제시, 남쪽으로 정읍시와 고창군과 접해있다. 변산반도는 멋진 풍광의 해안선과 함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부안군은 군산에서 시작하는 새만금 방조제의 끝에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부안군은 그 지역 안에 산과 전북에서 가장 긴 해안선의 바다와 섬, 넓은 들판이 함께 있어 산들바람의 고장이라고도 불린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66회에서는 천해의 자연과 함께 하는 동네 부안을 찾아 그곳의 이모저모와 사람들을 만났다. 

부안의 바다와 접한 해안가 산책로를 걸으며 여정을 시작했다. 우리나라가 원산지인 주로 남부 지방의 해안가에서 자생하는 활엽수인 후박나무 군락지를 지나 걸었다. 멋진 해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변산반도 일대의 해안은 서해 바다 쪽으로 돌출된 암석층 지형이 오랜 세월 강한 파도와 바람을 만나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경관을 만들었다. 해식애, 파식대, 층리, 해안단구 등 진귀한 해안 지형이 있고 곳곳의 해안 동굴들은 많은 사진가들이 찾는 사진 포인트가 됐다. 이어 더해 과거 화산 활동의 흔적을 담은 지형도 존재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도 크다.

이에 부안의 해안지대를 예로부터 채석강, 적벽강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채석강이라는 이름은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한 명인 이태백이 자주 찾아 술을 마시며 놀았다고 전해지는 중국의 채석강과 그 모습이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만큼 부안군의 해안은 자연이 만들어준 부안군의 소중한 보물이라 할 수 있다. 

멋진 해안 풍경 한 편에 돌로 된 해안가에서 바지락 캐는 마을 어머니들을 만나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의 여운이 가시기 전 부안의 명소 격포 해수욕장 인근 마을에 이르렀다. 어느 마을 집 담벼락이 조개공예품이 발걸음을 이끌었다. 그 집 주인이 궁금해졌다. 

 

 


그 집에는 팔순을 넘어선 노모와 아들이 살고 있었다. 조개 공예품은 그 아들의 작품이었다. 아들은 과거 횟집에서 일을 하다 수없이 버려지는 조개껍데기가 아까워 그 조개껍데기를 활용할 방법을 찾다 공예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취미로 했지만, 점차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됐고 전문적인 공예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뒤늦게 시작한 조개공예 작가의 길은 이제 10년을 넘어서고 있다.

그의 작품의 재료는 부안의 바닷가에 지천으로 널린 조개껍데기다. 그 조개껍데기를 주어 잘 손질하고 조화롭게 붙여 작품을 만든다. 보통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은 조개껍데기가 그의 손에 의해 멋진 작품으로 탄생하고 있다. 특히, 행운을 불러온다는 부엉이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작가의 길을 기를 가는 아들이 어머니는 걱정스럽기만 했다. 이제 50살은 훌쩍 넘긴 아들이 결혼도 마다하고 공예에 빠져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그의 곁은 지키는 게 든든하지만, 노총각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아들의 처지가 안타깝기만 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곁에서 그의 든든한 후원자로 남아 있다. 어머니가 있어 아들은 조개공예 작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그가 작가로서 멋진 삶을 지속하길 응원하며 다시 길을 나섰다. 

바닷가 마을 길을 걷다 거리 한편에서 말리는 갈치가 눈에 들어왔다. 이 지역에서는 풀치라 풀리는데 작은 갈치를 잡아 말려 요리를 한다고 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부안군 특히, 곰소 지역의 특산물이었다. 그 풀치를 전문적으로 요리하는 식당을 찾았다. 

가족이 함께 운영하는 그 식당에서 부녀가 분주히 장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부녀는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의 식당을 지키고 그 맛도 지켜가고 있었다. 한때 거동조차 하기 힘들었던 아버지는 이제 지팡이를 짚고 식당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나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움직임에 불편함이 있다. 아버지는 이런 자신이 가족에 부담이 될까 걱정이다. 그 때문에 작은 힘이나마 식당 일에 보태려 애쓰고 있었다. 

부녀는 이런 아버지의 건강이 항상 걱정이다. 어미니와 딸은 아버지가 그들 곁에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보였다. 과거에는 아버지가 부녀의 든든한 울타리였지만, 이제는 그런 아버지를 부녀가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족에게 풀치 식당은 그들을 지키는 또 다른 울타리가 되고 있었다. 

한적한 마을 길을 걷다 지금은 보기 힘들어진 바느질 공예 장인의 집에 들렀다. 그녀는 60년 넘게 손바느질 공예의 길을 걷고 있었다. 바느질 공예는 과거 우리 어머니들이 그 딸에게 어머니가 된 딸이 자신의 딸에게 그 기술을 전해주며 그 명맥을 이어왔다. 공예 장인 역시 어머니에게서 그 기술을 배웠다. 과거 어머니들은 바느질로 옷도 만들고 이불도 만들고 많은 일을 했다. 정말 손이 많이 가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어머니들은 그 인고의 시간을 견뎌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옷 등은 가족들을 위해 가계의 생계에 큰 보탬이 됐다. 

하지만 각종 의복과 섬유 제품이 쉽게 만들어지고 버려지는 세상에 바느질 공예는 보기 힘들어졌다. 이 작가는 그런 세월의 흐름에도 굴하지 않고 그 길을 가고 있어다. 그녀의 작품은 국제 전시회에도 전시될 정도로 그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실제 공예품 제작의 모습은 한 땀 한 땀 헝겊을 바느질로 이어붙여 만들어내는, 고독하고 외로운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그 속에서 작가는 과거 그녀의 어머니를 만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제 노년이 되었지만, 바느질 공예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여전히 식지 않았다. 

부안의 명소 변산 해수욕장의 풍경을 지나 한마을을 찾았다. 그 마을에서 지역의 특산물 오디, 뽕나무 열매를 가지고 일을 하는 이들이 보였다. 오디는 검은색의 열매로 황산화 성분 등 몸에 좋은 성분이 많이 들어 있다고 했다. 어머니와 두 딸은 집 근처의 뽕나무 밭에서 일하는 중이었다. 통상 6월에서 7월 열매를 수확하는 오디이기에 지금이 수확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뽕밭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평생의 노력이 함께 하는 곳이었다. 그 때문에 가족들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그 묘를 뽕밭 바로 옆에 만들었다. 어머니와 딸들은 매일 뽕밭에서 함께 일하며 아버지와 만나고 있었다. 두 딸은 과거 도시에서 일하다 귀향을 했다. 큰 딸을 연구원으로 작은 딸은 디자이너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귀향을 결심했다. 큰 딸이 6년 전 돌아왔고 작은 딸이 뒤를 이었다. 두 딸들의 귀향으로 가족의 뽕밭은 대를 이어 유지될 수 있었다. 

큰 딸은 뽕밭은 지키는 것에서 벗어나 오디를 가공해 또 다른 제품을 만들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노력을 함께 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오디를 이용한 쨈을 만들어 상품화했다. 이를 통해 저장성이 떨어지는 오디의 단점을 극복하고 있었다. 딸들의 아이디어와 노력이 더해져 가족들의 오디 농장을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부안의 개펄을 다시 찾았다. 그곳에서 어민들의 조개잡이가 한창이었다. 특히, 그 크기가 크고 탄력이 좋아 조개의 여왕이라 불리는 백합조개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백합조개는 지역의 특산물로 과거에는 일본으로 대부분이 수출되었다고 했다. 지금은 그 수확량이 줄었지만, 그 때문에 더 귀한 조개로 대접받고 있었다. 

 

 


그 어민들 사이에서 한 할머니의 사연을 들었다. 이제 80살을 훌쩍 넘긴 할머니는 여전히 바다와 함께 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지금은 아들이 그의 곁은 지키고 있었다. 할머니는 과거 남편과 아들이 사업이 실패하면서 무거운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했다. 집도 경매를 넘어가는 극한의 상황에서 할머니는 좌절하지 않고 바다에서 더 열심히 일하며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는 어머니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할머니의 노력과 헌신이 더해지며 가족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이제는 채 30킬로도 안되는 체중에 작고 약한 몸이지만, 할머니는 바다 일을 쉬지 않고 있었다. 과거 그 몸으로 가족들의 시련을 받아내고 삶의 무게를 견뎌낸 어머니에게 지금 바다 일을 편하게 느껴질 뿐이다. 이런 할머니의 삶을 알고 있는 아들은 마음 한편에 미안함을 안고 있었다. 그 어머니의 삶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자 하루하루 어머니 곁에서 열심히 바다 일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할머니의 삶이 보다 편안해지길 기원하며 또 다른 곳으로 향했다. 

조선시대부터 천일염 생산지로 유명했던 곰소 지역의 마을 길을 걸었다. 그 마을 한편에서 불을 지피고 있는 노년의 부부가 보였다. 그곳에서는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드는 화염 생산을 하고 있었다. 어디 판매하기에는 양이 많지 않고 천일염에 비해 손도 많이 가도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 화염은 예로부터 곰소 지역에서 만들어졌다고 했다. 각종 고서에도 화염과 관련한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소금의 대량 생산이 가능한 천일염 제조가 보편화되면서 화염 생산 기술은 그 명맥이 거의 끊어졌다. 

이 노부부는 지역의 전통을 지키고자 화염 생산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부부는 더 많은 이야기할 수 있고 일상을 공유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 화염이 부부의 삶에 큰 활력소가 되는 것으로 보였다. 이 부부는 힘이 닿는 한 화염 생산을 계속할 예정이다.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노부부의 남다른 의지가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멋진 바다 풍경을 가지고 있는 부안에는 그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씨를 가진 이웃들이 곳곳에 있었다. 쉽게 가기 힘든 길을 가는 이도 있었고 가족의 사랑으로 시련을 극복한 이들도 있었다. 전통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이도 만날 수 있었다. 한 어머니의 위대한 힘도 함께 했다. 모두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아는 이들이었고 그 속에서 행복과 더 나은 삶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었던 부안군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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