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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는 모든 경계가 전라북도 시군과 접하면서도 바다와 함께 접하는 도시다. 이런 김제시를 특징하는 건 넓은 평야다.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를 품고 김제시는 예로부터 넓고 기름진 농토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기원전 고대부터 벼농사가 시작됐고 지금도 김제시의 넓은 평야에서는 벼농사가 주를 이루며 막대한 생산력을 유지하고 있다. 김제시는 대표적인 농업 도시로 경지면적은 전국 3위, 경지율은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드넓은 평야를 품고 있는 김제시는 농업이 근간이 되는 시절 풍요의 고장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식량을 수탈하는 일제에 의해 고난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지금은 이 넓은 평야가 김제시를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다. 매년 10월이면 김제시 지평선 축제가 열리고 중요한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에서는 김제시를 찾아 김제시의 이모저모 그리고 우리 이웃들의 삶을 살피고 그들의 이야기와 함께 했다.

봄이 오는 들판의 풍경과 함께 여정을 시작했다. 마음까지 넓어지는 듯한 풍경을 따라 걷다가 산인 득 언덕인 듯한 지형에 나무들이 심어져 있는 곳이 보였다. 그 앞에 안내판이 보였다. 산의 이름은 신털미산, 그 산은 과거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저수지인 벽골제 보수 공사를 하던 이들의 신발의 흙을 털어낸 게 쌓여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벼의 고장이라는 뜻이 있는 벽골은 과거 김제의 지명이었다.

그만큼 김제는 벼농사가 흥한 곳이었다. 그 벼농사를 위해 백제 비류왕은 대규모 저수지를 축조했고 벽골제라 했다. 우리 농경의 역사를 품고 있는 곳이 벽골제다. 벽골제는 이후 시대를 거쳐 보수를 거듭했고 호남평야의 농수를 공급했다. 조선 태종 때 수만 명의 인원을 동원해 보수공사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바로 그때 신털미산이 만들어졌다. 벽골제와 신털미산은 지역의 역사를 상징하는 곳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벽골제는 조선 중기 이후 관리가 부실해지면서 저수지가 사라지고 농지화됐고 일제 강점기 원형이 훼손되면서 지금은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김제의 역사 현장을 지나 한마을을 찾았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집들이 줄지어 있는 마을 한편에 한 슈퍼마켓이 보였다. 편의점이 보편화된 요즘이지만, 이 마을에는 슈퍼에서 정육점, 식당까지 겸하는 만능 슈퍼가 있었다. 그 슈퍼를 운영하는 부부와 이야기를 나눴다. 부부는 마을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남편은 건축 일을 하면서 전국을 누비며 살았고 이 마을 근처 공사 현장관리자로 일했다. 마침 그곳에서 그는 공장 노동자들의 식당이었던 슈퍼집 딸인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이후 부부의 연을 맺었다. 남편은 20년 세월 이어온 공사 현장일을 그만두고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기 위해 귀향을 결정했고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지금의 슈퍼를 아내와 함께 운영했고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이 슈퍼는 그 어느 곳과 비교할 수 없는 가족들의 행복한 보금자리가 됐다.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이 가족에게는 큰 행복으로 보였다. 

다시 정겨운 시골 마을의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 집 앞에 텃밭이 있고 개나리가 담을 이루고 낮은 담장이 줄을 지어 서있는 마을 길을 따라 걸었다. 그 길의 끝에 대문이 없는 집이 보였다. 그 안으로 잠시 들어가 봤다. 꽤 오래돼 보이는 집에 사람들의 정성이 더해져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그 집 한편에 겉으로 보기에는 수백 년을 되어 보이는 나무위 집이 눈길을 이끌었다. 이 집 주인이 궁금했다. 

이 집의 주인은 일본인이었고 부인은 이곳 김제 출신의 부부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5남매가 단란한 가족을 이루고 있었다. 가족은 폐가로 방치된 집을 고치로 수리해 가족의 보금자리로 만들었다. 지금도 공사가 진행 중인 나무위 집, 트리하우스도 가족들의 힘으로 또 다른 보금자리가 되고 있었다. 오래된 집을 수리하고 관리하는 건 분명 귀찮고 어려운 일이지만, 가족들은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보였다.

이 집은 과거 셋째가 큰 병으로 투병하던 시절, 가족들이 함께 공간에 대한 공감대가 모여 새로운 보금자리가 됐다. 이곳에서 가족은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가족 간의 정이 더 돈독해 짐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장성한 자녀들이 하나 둘 도시로 그리고 또 다른 세상으로 나가게 되지만, 그들의 트리 하우스는 언제든 찾아와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믿음으로 가족들은 오늘도 함께 하고 있다. 

김제 만경강 하구 산책로를 걸었다. 넓은 평야와 강을 따라가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나루터가 보였다. 새창이 나루라 불리는 이곳은 과거 서해바다로 향하는 이들이 모여들었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군산으로 향하곤 했다. 과거 김제 평야에서 나는 쌀이 오가는 통로이기도 했다. 지금은 간척 사업 등으로 바다로 향할 수 없고 그 기능을 잃었다. 시대 흐름 속에 부침을 겪은 역사의 흔적이었다. 

그 근처에 오래된 콘크리트 다리가 보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콘크리트 다리인 새창이 다리, 과거 만경대교로 불렸던 다리였다. 새창이 다리는 일제 강점기 건설됐다. 이 다리는 근대화의 상징이라 할 수도 있지만, 실제는 일제가 우리 쌀을 수탈하기 위한 통로로 사용하기 위해 건설됐다. 이 다리를 지나 우리 땅에서 난 쌀들이 일본으로 반출됐다. 일제의 식량 수탈은 일제 강점기 내내 이어졌고 최대 곡창지대인 김제지역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았다. 낡고 이제 보잘것없어졌지만, 새창이 다리는 잊지 말아야 할 일제 강점기 역사를 품고 힘겹게 그 자리를 지켜가고 있었다. 

쌀이 주로 생산되는 김제지만 밭농사가 활발한 곳도 있었다. 넓은 밭이 있는 마을을 찾았다. 그 마을길을 걷다 고구마 농사 준비가 한창인 마을 주민들을 만났다. 그중에는 젊은 청년들도 다수 보였다. 갈수록 청년들이 줄어지는 농촌의 현실에서 그들의 모습이 반가웠다.

이 마을에는 남다른 사연이 숨어 있었다. 이 마을은 과거 6.25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에 전쟁을 피해 피난 온 이들이 정착해 이룬 마을이었다. 당시 450여 가구가 이곳에 정착했다. 이 실향민 마을 주민들은 거칠고 황무지였던 야산을 개간해 농토로 만들었다. 그 1세대 실향민 마을의 역사는 2대, 3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할아버지와 할머니에서 아버지, 어머니에서 이어지는 마을의 3세대 청년들은 이 마을을 지키며 마을의 역사 또한 지켜가고 있었다. 청년들은 틈만 나면 마을 일을 돕고 어르신들에게 과거 그들이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고 있었다. 구전되는 이야기들은 마을의 역사로 남아 전해지고 있었다. 청년들의 마을 사랑, 자신의 뿌리에 대한 애착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청년들이 함께 하는 이 농촌 마을의 미래가 밝아 보였다. 

김제의 전통 시장을 찾았다. 시장 한편에 오래된 식당이 보였다. 김제에서 나는 팥으로 만드는 팥칼국수 식당이었다. 과거 농사짓는 이들이 새참으로 즐겨 먹었다는 팥칼국수, 그때는 노동에 지친 이들의 허기를 채워주고 다시 힘이 나게 하는 먹거리였지만, 지금은 전통 가득한 별미가 됐다.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향수를 그때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새로움으로 다가올 팥칼국수, 그 맛에 담긴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다시 시장의 한 옷 공방을 찾았다. 이 공방의 주인은 과거 시아버지의 한약방에 이 공방을 차렸다. 과거 시아버지는 공방 자리에서 오랜 세월 한약방을 운영했다. 그때의 흔적이 가게 곳곳에 남아 있었다. 며느리는 서울에서 먼 김제로 시집을 왔다. 모든 게 낯설고 힘든 시집살이였지만, 시아버지는 그런 며느리를 묵묵히 사랑으로 감싸고 지켜줬다.

 

 


10여 년 전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한약방을 더는 운영할 수 없는 상황에서 며느리는 큰 결정을 했다. 그는 시아버지의 평생이 담긴 한약방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는 시아버지가 즐겨 입던 모시옷에 착안해 옷 공방을 만들었다. 그는 직접 옷감을 준비하고 디자인했고 천연 염색을 통해 전통 옷을 제작했다. 그리고 그 옷들이 이 공방을 채우고 있었다. 그는 지금도 자신만의 전통 옷을 제작하며 시아버지와의 동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여정의 막바지 읍내 거리를 걷다 포장마차가 보여 그곳으로 향했다. 떡볶이 등 분식을 파는 포장마차의 벽면은 유명인들의 스케치 초상화로 가득했다. 그 실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모두 이 포장마차의 사장님 작품이었다. 그는 독학으로 그림을 배우고 실력을 키웠다고 했다. 취미가 시작했지만, 이제는 당당한 화가가 됐다. 그는 그의 남편이 지병으로 활동이 힘들어지면서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여러 일을 하다 20여 년 전 지금의 포장마차를 시작해 지금껏 유지하고 있다.

그곳에서 사장님은 일과 화가로서의 꿈을 함께 이루며 하루하루를 알차게 채워나갔다. 그리고 수많은 작품들이 탄생했다. 포장마차를 찾는 이들은 그곳에서 다양한 작품을 함께 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사장님의 작품은 고단한 인생의 여정 속에 피어난 꽃과 같아 보였다. 이제는 남편도 몸이 나아져 걱정도 덜었다. 꽃잎이 떨어지는 벚꽃 나무 아래에서 모델이 된 남편과 그 남편을 초상화를 그리는 아내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김제는 넓은 평야와 더불어 예로부터 풍요로움의 땅이었다. 농사가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던 시절 김제의 기름지고 넓은 평야는 큰 축복이었다. 그로 인해 일제 강점이 수탈의 장소가 되는 비운도 있었고 산업화 시대 발전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제시는 그 어디에도 없는 환경을 가진 도시이기도 하다. 농업의 중요성이 새롭게 대두되는 상황에서 김제는 새로운 도약을 기대할 수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이웃들은 그런 김제시에서 꿈을 키우고 행복을 만들어가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 꿈들이 함께 하는 김제시의 새로운 도약을 기대해 본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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