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동남부에 자리한 도시 용인시는 농촌과 전원, 도시가 혼재한 전형적인 도농 복합 도시다. 과거 농촌의 풍경이 이 지역을 대표했지만, 2,000년대 들어 곳곳에 부동산 개발과 대규모 주거 단지가 들어서고 각종 사회 인프라가 구축되면서 도시의 규모가 커지고 인구수도 급격히 증가했다. 최근에는 인구 100만 명을 넘는 거대 도시로 발전했고 더 많은 자치권을 가지는 특례시가 됐다.
21세기 들어 가장 큰 변화를 겪은 도시가 용인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용인시 곳곳에는 전원 풍경이 남아있고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고 있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70회에서는 이 용인시를 찾아 도시의 이모저모와 그곳에 남아있는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는 모습들, 그리고 이웃들과 만났다.
최근 용인시에서 유명한 핫 플레이스를 가장 먼저 찾았다.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로수 사이로 트랜디한 모습의 카페들이 공존하는 카페 골목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봄의 절정에서 초록의 빛으로 물들어 가는 가로수 사이로 개성만점의 카페들이 공존하는 모습은 사진으로 담고 싶은 마음을 절로 가지게 했다. 한 잔의 커피와 함께 잠시 거리의 풍경과 하나가 돼봤다.
모내기를 위해 물을 대고 있는 논과 초록의 신록, 곳곳에 보이는 들꽃, 전원주택들이 함께 하는 한적한 마을을 찾았다. 마을 길을 걷다가 나무 장작이 가득 쌓여있는 집이 보였다. 넓고 잘 정돈된 잔디와 나무들이 있는 정원에는 닭들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닭들이 종류도 다양했다. 전 세계 닭들이 다 모인 것 같았다. 이 집의 주인이 누군지 궁금했다.
이 집은 쉽게 보기 힘든 화덕 빵집이었다. 도시에서 살다 정착한 부부가 운영하는 이 빵집은 프랑스 전통 방식으로 빵을 굽고 있었다. 이를 위해 프랑스에서 빵 화덕을 수입해 직접 설치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부부는 과거 공대를 나오고 나름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행 중 빵과의 만남이 이들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부부는 새로운 인생을 열기로 결심하고 제빵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나선 과감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의지와 달리 뒤늦은 나이에 시작한 도전은 가시밭길이었다.
제빵 기술을 누군가에게서 배우기 어려웠다. 나이 든 견습생을 받아주는 이들이 없었다 이에 부부는 독학으로 제빵 기술을 배우고 연구했다. 그들만의 빵을 만드는 노력을 지속했다. 시행착오도 많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만든 천연 효모와 그에 바탕을 둔 천연 효모빵을 만들어냈다.
이제 이 빵집은 동네의 명소이자 많은 이들이 찾는 장소가 됐다. 이 빵집을 찾는 이들은 넓은 정원 속에서 어디에서도 맛보기 힘든 빵을 함께 할 수 있다. 부부에게는 빵을 팔아 돈을 버는 것 이상으로 사람들에게 그들의 빵집이 휴식처가 되고 잠시나마 행복을 주는 공간이 되는 게 더 즐거워 보였다. 그렇게 부부의 도전은 매일 그들의 삶을 행복으로 채워가게 하고 있었다.
한적한 풍경을 지난 사람들로 북적이는 용인 중앙시장을 찾았다. 시장 특유의 활력 넘치는 풍경과 다양한 볼거리 먹거리를 접할 수 있었다. 독특하게도 그 시장을 대표하는 떡, 만두, 순대의 먹거리 거리가 각각의 블록을 형성하고 있었다. 순대 거리로 향했다. 용인의 남동쪽 끝, 백암면 지역은 조선시대부터 도축장이 운영됐고 한때는 우리나라에서 돼지 사육 농가가 가장 많은 곳이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돼지고기나 부산물을 얻기 쉬웠고 순대가 유명해지는 계기가 됐다. 과거 백암순대의 명성을 이 시장에서 이어가고 있었다.
순대거리 한편에 순댓국집과 족발집이 함께 하는 곳이 보였다. 한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 운영하는 족발집과 그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순댓국집이 공존하고 있었다. 족발집의 청년 사장은 과거 격투기 선수로 성공의 꿈을 꾸며 노력했다. 하지만 잦은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부상 재활이 지속되면서 경기력이 떨어지고 고민이 깊어졌다.
이런 아들을 뒷바라지하는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도 커졌다. 그는 운동선수의 꿈을 접었다. 대신 이 시장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어머니의 기술을 전수받아 족발집을 시작했다. 20년 넘게 순댓국집을 운영한 어머니의 손맛이 청년 사장에게 그대로 전수됐다. 이렇게 모자는 시장에서 함께 일하며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공감하며 인생을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이제 아들은 어머니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고 있고 어머니는 열심히 살아가는 아들이 그저 고맙기만 하다. 모자의 노력이 큰 결실로 이어지길 기원하며 다른 곳으로 향했다.
한적한 전원 마을에서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를 살필 수 있었다. 은이성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곳이었다. 김대건 신부는 이 용인지역에서 사목활동을 했다. 용인지역은 조선시대 박해를 피해 은신한 천주교 신자들이 다수 몸을 의탁한 곳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에서 용인은 빼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
이 은이성지를 중심으로 인근 도시를 포함해 천주교 성지와 김대건 신부의 흔적들을 탐방할 수 있는 둘레길이 있었다. 조용한 숲길을 따라 걸으면 절도 마음이 차분해지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 길 중간중간 만나는 천주교의 역사는 종교 이전에 우리 근대사의 장면 장면들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었다. 그 길에서 잠시 복잡한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다시 조용한 한마을을 찾았다. 그 마을 길에서 겉 보기에도 오래된 대장간이 보였다. 그 대장간에서 한 장인이 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장인은 50년 넘게 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수제 칼은 다양한 용도에 맞게 하루 50자루 정도가 제작된다고 했다. 기성 칼과 다른 장인의 손길이 절로 느껴지는 하나의 작품들이었다.
그는 16살 어린 나이에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대장장이 일을 배웠다. 하지만 그 일은 아직 꿈 많은 소년에는 버거웠다. 그는 참고 또 참았다. 많은 형제들이 함께 하는 집에서 고생하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버티고 또 버텼다. 그러나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대장간을 뛰쳐나와 집을 찾으면 아버지는 조용히 그를 감싸 안아주었다. 힘들고 배고픈 시절 가정의 입 하나를 덜기 위해 타향살이 더부살이를 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장인 역시 어린 시절부터 자의반 타이 반 그런 삶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보다는 아버지에게 더 잘 해 드리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운 뿐이다. 지금 그의 대장간은 어린 시절 그가 살던 집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그는 지금도 시간이 나면 그 시절 흔적이 남은 집을 찾곤 한다. 그 집의 흔적은 남아있지만, 아버지는 이제 그와 함께 할 수 없다. 그의 마음속에는 그가 만은 칼 한 자루 아버지에 선물하지 못한 후회가 가득하다. 그는 장인의 삶을 살면서 몸 곳곳에 다친 자국들이 훈장처럼 남아있다. 그에게는 이런 상처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더 큰 상처로 남아있었다. 이런 마음을 뒤로하고 그는 대장간의 명맥을 잇기 위해 하루하루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초록으로 호숫가 풍경이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마을을 찾았다. 호숫가를 따라 만들어진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돈가스 집, 과거 표현으로 경양식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그 식당을 찾았다. 내부는 1970년대 80년대 감성이 가득한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이 식당의 돈가스는 장년들에게는 추억 가득한 경양식집 돈가스를 추억하게 했다. 경양식집 돈가스는 그 시절 어린이들에게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만나서 조용히 대화할 곳이 마땅치 않았던 청춘들에게도 경양식집은 훌륭한 데이트 장소였다. 지금은 이런 경양식집의 감성이 젊은 층들에게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이 경양식집은 사장님은 요리와 서빙까지 일인 다역을 소화하고 있었다. 사장님은 40대 늦은 나이에 식당을 열었고 6년 전부터 서울의 식당을 접고 용인시의 지금 자리에 식당을 열었다. 사장님은 어린 시절 경양식집의 돈가스 맛을 잊지 못했고 자신이 직접 돈가스를 만들고 있었다. 이제 이 식당에는 돈가스 맛을 잊지 않고 찾는 단골들이 있고 주변 호수의 풍경을 접하러 온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장님에서 이 식당은 소중한 이들과의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여정의 막바지, 작은 개천이 흐르는 마을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한 주택가의 오래된 슈퍼가 보였다. 이제 동네 슈퍼는 편의점 등에 밀려 사람들 기억 저편으로 살라져 가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이 슈퍼는 50년 넘게 그 자리를 자키고 있었다. 80살을 넘긴 사장님과 슈퍼는 과거 논밭뿐이었던 마을이 주택단지로 변모하는 과정을 바로 앞에서 지켜봤다. 그 변화의 바람에 이 슈퍼는 아직 쓸려가지 않고 있었다.
이 슈퍼에는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는 정이 가득했다. 특히, 이 슈퍼에서 즐기는 막걸리는 마을 주민들을 이끄는 힘이 되고 있었다. 청년 시절부터 슈퍼를 찾았던 이들은 이제 장년이 되고 노년이 되고 한결같은 이 슈퍼를 찾는 단골이 됐다. 사장님은 손수 담근 김치와 밑반찬을 아낌없이 내주고 있었다. 고령의 나이에 힘이 부칠 수도 있지만, 사장님은 잊지 않고 슈퍼를 찾는 이들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건 다해주고 싶을 뿐이다. 사장님은 혹시나 이곳을 찾았다 실망하는 손님들이 없도록 1년 365일 쉬지 않고 문을 연다고 했다.
이런 사장님의 마음을 알고 있는 단골들 역시 잊지 않고 틈만 나면 슈퍼를 찾고 있었다. 사장님과 손님 사이 보이지 않은 정이 느껴졌다. 그렇게 50년 넘게 이어진 슈퍼의 역사는 이 마을의 역사이기도 했다. 과거 손님들이 사진으로 찍은 사진들을 이 슈퍼의 역사를 기억하고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작은 행복을 마음 한 편에 담아 가고 있었다.
용인시 하면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국내 최대 테마파크와 민속놀이공원, 아파트 단지, 리조트와 골프장 등이다. 과거보다는 현재가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용인시다. 우리나라 어느 도시도 마찬가지겠지만, 용인시는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고 그 풍경도 달라져왔다. 그 변화는 현재 진해형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용인시 곳곳에 변하지 않는 것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장소가 있었다. 그리고 누가 잘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의 역사를 지키며 살아가는 이웃들도 있었다. 변하고 발전하는 게 더 큰 선이 된 요즘이지만, 그 속에서 가치 있는 것들이 너무 쉽게 사라져가는 아픔도 존재한다. 용인시에서의 여정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소중한 것들이 없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는 시간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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