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서초구 반포동은 1970년대 정부 주도의 강남 개발과 주택 공급 정책에 따라 생겨난 동네다. 당시만 해도 논과 밭, 하천변의 땅은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 주거지역이 됐고 각종 고속버스 터미널과 지하철, 고속도로 사회 인프라와 각종 오피스 빌딩, 중요 기관들이 들어섰다.
여기에 대표적인 명문 고등학교들이 밀집한 8학군이 더해지며 반포동은 사회 저명인사들과 엘리트들이 사는 대표적인 부촌으로 자리를 잡았다. 지금도 반포동은 고가의 아파트들이 즐비하고 최근에는 단군 이래 최대 재개발사업이 진행되며 일대 아파트 가격 및 부동산 가격이 치솟는 등 대한민국 최고 부촌으로서의 입지를 더 확실히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최고 반포동이 생겨났을 당시부터 이어진 50년 역사의 흔적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가는 아쉬움도 있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된 요즘이지만, 동네의 역사가 하루아침에 사라져 가는 현실은 씁쓸함으로 다가온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69회에서는 개발과 함께 사라져갈 반포동의 모습들과 동네의 역사와 함께 한 이웃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 시간을 채웠다.
봄의 절정, 화창한 봄날의 한강시민공원을 찾았다. 수면에 가장 가까운 다리로 호우가 여름철 호우가 내리면 물에 잠기는 다리 잠수교를 따라 걸었다. 그 위에 자리한 반포대교까지 독특한 2층 구조의 다리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량 분수가 있다. 그 분수대에서 내뿜는 물결이 시원해 보였다. 반포대교 분수대는 낮에도 멋지지만, 밤에는 한강의 야경과 함께 하는 멋진 풍경을 만들어주며 서울의 명소가 되고 있다. 다리를 건너 만난 한강공원은 활기차 보였다. 새빛 섬 등 공원의 명소를 둘러봤다. 이제 코로나 상황이 해제되고 더 많은 방문객들이 찾을 반포 한강시민공원의 모습이 기대됐다.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의 꽃 도매상가를 찾았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은 1977년 문을 열었고 강남지역 발전의 구심점이 됐다. 아울러 경부고속도로 등 고속도로 망이 확충되면서 전국을 일일생활권으로 연결되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제는 고속철도와 항공 교통이 발달하면서 그 입지가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은 사람들로 붐빈다.
그 고속버스터미널 상가에 자리한 꽃 도매상가는 오랜 세월 고속버스터미널의 역사와 함께 했고 꽃을 사랑하는 이들의 성지로 자리했다.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은 반포동의 역사와 함께 한 이들이라 할 수 있다. 그중에서 젊은 부부를 만났다. 아내는 과거 아버지가 운영하는 꽃 가게를 넘겨받아 운영하는 중이고 도매상가에서 일하다 만난 남편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부부는 도매상가의 특성상 밤에 많은 일을 해야 하는 일상이 버겁기도 하지만, 누구보다 강한 열정으로 일에 열심히였다. 부부는 이곳에서 더 큰 꿈을 꾸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하나보다는 둘이어서 일상이 즐겁기만 한 이 부부를 응원하며 다시 길을 나섰다.
서초구의 작은 프랑스라 불리는 서래 마을을 찾았다. 1980년대 초 프랑스 학교가 이주를 하면서 시작된 마을의 역사는 다수의 프랑스인들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독특한 문화를 만들었다. 우리나라에 사는 프랑스 사람들의 반 이상이 이곳에 거주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서래 마을에는 프랑스인들의 커뮤니티가 만들어지고 그들 취향에 맞는 카페나 식당 등이 들어서며 우리나라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느낌으로 채워졌다. 이 서래 마을에서 프랑스 향기 가득한 디저트 가게를 찾았다. 프랑스인 남편과 한국인 아내는 프랑스에서 만나 연인이 됐다. 이후 아내가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자 남편은 과감히 한국행을 선택했다. 그렇게 8년의 세월이 흘렀다.
남편은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나라에서 살고자 고군분투했다. 아내에 대한 사랑은 이런 그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이런 남편에서 서래 마을을 그가 마음을 둘 수 있는 제2의 고향이 됐다. 그는 이곳에서 과거 프랑스에 만들었던 디저트 요리를 만들어 팔았고 이를 바탕으로 자리를 잡았다. 국적을 초월한 사랑의 힘이 서래 마을에서 결실을 맺는 모습이었다.
서래 마을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한국적 식당이 눈에 보였다. 감자국을 주메뉴로 하는 식당은 40년 넘은 역사를 자랑하는 동네 맛집이 됐다. 부부가 땅끝 마을 해남에서 무작정 상경해 이룬 성공의 결과물이었다. 완도 출신의 아내는 남편 하나만을 믿고 연고가 전혀 없는 서울로 함께 상경했다. 서울 살이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혹독했다. 눈물로 지새운 날도 많았다.
이 감자국은 부부가 서울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하다는 강남지역에서 식당으로 성공하게 해준 일등 공신이 됐다. 수십 년 내공의 아내의 손맛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장을 고집하며 손님들을 대하고 식당일을 하는 남편의 정성이 더해져 식당의 역사를 이어지게 했다. 부부는 지금도 늘 그렇듯 온 힘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 부부가 만들어가는 감자국은 서래 마을 한편에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다시 반포동의 이곳저곳을 걸었다. 그 과정에서 육교 한편에서 자판을 펴 놓고 장사를 하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그는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낡은 파라솔 하나에 의지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는 달고나와 설탕 과자를 팔고 있었다. 하루에 몇 개를 팔 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할아버지의 모습에는 삶의 고단함이 그대로 보였다. 지나는 사람들은 그를 안쓰럽게 볼 수 있지만, 할아버지는 오늘도 길 위에서 그의 하루하루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 할아버지의 건강을 기원하며 계속 걸었다.
1970년 대 지어진 반포주공아파트 단지 인근을 지났다. 이곳은 반포동의 50년 역사를 상징하는 곳이다. 그 아파트가 포함된 구반포 일대는 이제 재개발의 물결이 몰아치고 있다. 재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오래된 아파트와 상가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고 있다. 실제 곳곳에 공실을 알리는 표식이 보였다. 그 모습 속에서 아직 문을 열고 있는 상가 속 탁구장이 있어 찾았다.
동네 주민들이 주 고객인 탁구장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과거 국가대표 탁구 선수로도 활약했던 관장은 이 탁구장을 인수해 운영하면서 성적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엘리트 스포츠에서 느낄 수 없는 생활체육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스포츠를 즐길 수 있고 여러 사람들과의 소통의 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렇게 관장은 탁구장에서 동네 주민들을 상대로 탁구를 가르쳤다. 관장과 함께 한 동네 주민들은 대부분 노년이 됐지만, 여전히 탁구장에서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물론, 승패가 중요하지 않고 함께 탁구를 즐길 수 있는 게 행복한 이들이었다. 동네를 떠난 이들도 상당수가 이 탁구장을 찾는다고 할 정도로 탁구장 회원들의 유대는 끈끈했다. 비록, 이 탁구장이 사라질 예정이지만, 이들이 또 다른 장소에서 탁구를 함께 즐길 수 있기를 기대하며 다시 길을 나섰다.
이제는 영업을 하지 않고 공가 표시들이 가게 정문 앞을 대신하고 있는 상가 길을 걸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야 할 거리가 허전함으로 채워져 있었다. 공가 표시 속 아직 영업을 이어가고 있는 가게가 있어 반가운 마음에 들렀다. 그곳은 수제 양복점이었다.
얼핏 바도 세월의 흔적 가득한 양복점 안에서 사장님이 작업에 열중이었다. 그는 1980년대 초 반포동에 터를 잡았다. 8남매 중 장남인 그는 가정의 생계를 위해 노심초사하는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에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그는 과거 우리 시골에서 가정의 생계를 위해 서울로 상경한 형, 누나 들 중 하나였다.
그는 양복점에서 기술공으로 일하며 재단 기술을 익혔고 1983년 반포동에 자신의 가게를 열었다. 그렇게 그는 이곳에서 돈을 벌어 시골에 보내고 가족들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게 큰 즐거움이었다. 그런 청년이 이제는 노년의 신사가 됐다. 40년 가까운 세월 그와 함께 했던 이 가게는 이제 지역의 재개발과 함께 사라질 상황이 됐다. 그의 일생을 함께 한 삶의 터전이 사라진다는 사실이 그는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하지만 그는 이 가게를 운영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손님들의 주문에 맞는 옷을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의 많은 단골손님들은 이 가게가 사라지기 전 옷을 맞추기 위해 양복을 주문했다. 사장님은 그들의 주문을 가게가 문을 닫을 때까지 완성하려 하고 있었다. 마지막 작업을 하면서 그는 반포동에서의 삶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는 듯 보였다. 수백권은 족히 더 돼 보이는 작업 표본들이 그의 삶을 기억하게 하고 있었다.
반포동을 벗어나 시원한 풍경이 있는 곳을 찾았다. 동작대교 반포동 구역에 자리한 전망 좋은 카페가 그곳이었다. 이 카페는 한강의 풍경을 조망하며 잠깐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마침 화창한 날씨 속 한강의 풍경이 시원하게 다가왔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서울의 멋진 풍경과 함께 할 수 있었다.
반포동의 한 초등학교 인근의 문방구를 찾았다. 마침 많은 초등학교 학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문방구 사장님이 직접 만들어주는 달고나는 초등학생들에게 인기 최고였다. 이 문방구는 1983년 문을 열어 40년째 운영 중이라고 했다. 반포동의 변화를 지켜보며 달라진 세태를 몸소 느끼며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었다. 이제 노년의 나이가 된 부부와 아내의 동생이 운영하는 문방구는 여전히 초등학생들이 방과 후 즐겨 찾는 아지트로 인기가 있었다. 최근 문방구가 점점 사라져가는 상황에서 과 장년들에게 과거 추억을 느끼게 하는 풍경이 이곳에서는 매일매일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 문방구의 운영자들은 이곳을 찾는 아이들이 성장해 어린이 되고 그 아이들과 함께 이 문방구를 다시 찾는 게 최고의 행복이라 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는 장소를 지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인들을 행복할 따름이다. 항상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도 큰 힘이 된다고 했다. 반포동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 하는 주인과 또 다른 미래의 주역인 아이들이 함께 문방구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여정의 막바지, 주택가의 한 식당을 찾았다. 서울 음식 전문점이라는 글귀가 눈에 띄는 오래된 식당 간판이 발걸음을 이끌었다. 1993년부터 문을 연 이 식당은 만두전골과 두부찌개를 주메뉴로 하고 있었다. 이 식당은 서울 음식 특유의 담백한 맛을 지켜가고 있었다. 서울에 살아온 사람들에게도 생소한 서울 음식의 맛을 지키는 몇 안되는 식당이었다. 식당의 사장님은 과거 시어머니의 맛을 전수받았고 그 맛을 지켜가는 중이었다. 지금은 그의 아들이 그와 함께 하고 있었다. 함께 빚는 만두는 3대의 손맛이 더해져 있었다. 수십 년간 그 어느 곳보다 많은 변화가 있었던 서울에서 서울의 맛을 지키는 식당이 있다는 게 반갑게 느껴졌다.
이렇게 반포동에서는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이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반포동은 높은 부동산 가격을 대표되는 부촌이 아닌 자신의 삶과 함께 하는 소중한 공간일 뿐이다. 이들에게 재개발은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일로 보였다. 그들은 반포동에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삶의 가치를 쌓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새롭게 편리해지는 게 사람들의 삶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반포동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져보는 시간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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