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명에 의해 비밀리에 시작된 천문 연구가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천문 연구소가 만들어졌고 천체를 관측할 수 있는 간이 등 관측 기구도 만들어졌다. 또한, 이 연구를 이끌던 장영실은 세종에 의해 면천되어 노비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었다. 세종은 이에 그치지 않고 그에게 관직을 내려 힘을 실어주었다. 노비 신분을 벗어나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던 장영실은 이를 뛰어넘어 양반이 됐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인사였다. 하지만 그의 직책은 천문 연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천문 연구에 부정적인 이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장영실과 서운관의 연구자들은 각자의 직책을 수행하며 비밀 연구를 지속했고 명나라 천문 서적에서 예측하지 못한 일식을 예측하는 등 조선만의 역법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높였다. 이들의 ..
세종의 명으로 명나라의 앞선 천문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사신단에 합류했던 장영실은 함께 명을 받았던 장희제의 배신과 그를 제거하려는 사대부 세력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이 위기에서 장영실은 천문연구에 관심이 많은 명나라 황족 주태강을 만나게 되고 그의 천문 기구의 정상 작동을 도왔고 그를 구명하기 위해 명나라로 온 이천과 함께 정적들의 기습에서 주태강을 구하며 그의 신뢰를 얻었다. 주태강은 장영실의 능력을 크게 인정했고 장영실의 안전을 물론이고 조선 사신단이 임무를 무사히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왔다. 아울러 장영실은 주태강으로 부터 과거 원나라 시절부터 전해오던 천문 연구 자료를 받게 된다. 이는 조선의 독자적 천문 연구를 위한 소중한 자료였다. 이런 장영실의 눈부신 성과와 대조적으로 장영실 제거에 일조했던..
태종과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세종으로부터 재주를 인정받은 장영실이었지만, 노비의 신분은 벗을 수 없는 굴레였다. 하지만 장영실은 이 굴레에서 벗어나려 애쓰기 보다 자신의 능력을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쓰기로 결심했다. 그는 맞은 봐 소임에 온 힘을 다했다. 이런 장영실을 신뢰하고 있던 세종은 그에게 큰 임무를 맡겼다. 그는 서운관의 책임자 장희제와 더불어 명나라 사신단에 참가해 명나라의 앞선 천문 기술을 보고 배우도록 했다. 세종은 이를 바탕으로 조선만의 천문관측 기술을 발전시키고 더 나아가 조선의 역법을 만들려 했다. 이전 중국의 역법에 의존한 천문관측이 나라 실정과 맞지 않는 현실을 안타까워한 세종의 마음이 담긴 일이었다. 하지만 이는 큰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명나라는 천문기술의 대외 유출..
부친 장성휘의 죽음과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명나라행의 실패로 실의에 빠진 장영실은 부친인 장성휘의 절친한 벗이었던 이천과 한양으로 향하게 된다. 관노의 신분이었던 장영실로서는 자신의 명나라행을 막은 이천의 처분에 따라 자신의 거취가 결정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장영실은 한양으로 가는 도중 수 차례 도망갈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이천의 생명의 위험까지 감수하며 백성들을 사랑하는 그의 진심을 알게 되면서 그 마음을 접었다. 이천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는 혼란기에 자신의 가문이 조선 태조 이성계 의해 멸문되다시피 한 아픔이 있었다. 누구보다 조선 왕조에 대한 증오심이 큰 그였다. 이천은 그 마음을 억누르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으로 조선 건국에 힘을 보탰던 인물이었다. 아울러 이천..
장영실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물건을 만드는 손재주가 뛰어났다. 여기에 천문에 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이는 그의 부친의 영향이 컸다. 장영실은 부친 장성휘는 고려 때부터 기술직 관리로 능력을 인정받았고 천문과 관련한 일을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그는 천문 과학자였다. 왕조가 바뀌었어도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장성휘는 고려가 이후 등장한 조선왕조에 협력하고 않았고 방랑자의 삶을 살았다. 그 과정에서 기생있었던 장영실의 모친을 만났고 장영실을 낳았다. 분명 장영실은 양반의 자손이었지만, 부모 중 한명이라도 천민이면 그 자녀 역시 천민이 되는 제도에 얽매여 관청의 노비로 살아야 했다. 당시 노비는 인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소유물이나 재산으로 취급됐다. 그런 노비에게 일 외에 다른 분야에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