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사건사고가 있었음에도 2017년도 프로야구는 흥행에서 성공하며 최고 인기 스포츠 자리를 지켰다. KIA는 2009시즌 우승 이후 7년의 세월이 흘러 팀 통산 11번째 우승에 환호했고 수년간 하위권을 전전하던 롯데는 후반기 대반전으로 정규리그 3위에 올랐다. 이들 인기 구단의 선전은 프로야구 흥행에 큰 호재였다. 

이 외에도 프로야구는 살아있는 전설이라 할 수 있었던 이승엽의 은퇴 소식을 들어야 했고 이승엽 외에도 이호준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베테랑들의 은퇴를 접했다. 그 자리는 젊은 선수들이 하나둘 채워가는 모습을 보였다. 한때 야신이라 불렸던 김성근 감독은 한화에서 불명예 퇴진하면서 사실상 프로야구 감독의 커리어를 끝냈고 프로야구 원년 지도자였던 김성근 감독의 퇴장은 감독들의 세대교체를 의미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이 밖에도 프로야구는 신문 스포츠면의 가장 앞자리를 채우는 뉴스메이커로 그 존재감을 과시했다. 시즈 후 스토브리그에서도 프로야구는 대형 FA 계약 소식과 해외 진출 선수들의 깜짝 복귀 등으로 야구팬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아직 스토브리그는 끝나지 않았고 트레이드의 가능성도 열려있는 만큼 올겨울 프로야구의 또 다른 뉴스도 기대된다. 

이런 프로야구에서 가장 큰 흐름은 극심한 타고투저였다. 이는 수년간 이어져온 일로 올 시즌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타고투저의 심화는 경기의 질적 저하를 불러왔다. 경기 시간은 크게 길어졌고 타격 기록의 인플레도 극심했다. 과거 3할 타자의 가치는 상당했지만, 최근 3할 타자는 너무나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비정상적 타고투저는 국제경기 경쟁력 저하로까지 이어졌다. 문제는 10개 구단 체제가 되면서 더 심화된 타고투저를 쉽게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2017 시즌을 앞두고 KBO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스트라이크존을 넓히고 1군 등록 선수 엔트리를 늘리도록 했다. 투수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조치였다. 시즌 초반 이는 효과가 있었다. 타고투저의 어느 정도 완화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타자들의 무서운 적응력을 보였고 넓어졌던 스트라이크 존도 어느 순간 본래대로 환원되는 모습을 보였다. 무엇보다 부족한 투수 자원은 넓은 스트라이크 존을 활용할 수 있는 투수들의 수를 제한했다. 

결국, 올 시즌 프로야구에서 규정 타석을 채운 47명의 타자 중 33명이 3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하며 여전히 타격 인플레 현상을 보였다. 투구 부분 방어율 1위 피어밴드가 3.04를 기록하며 규정 투구 수를 채운 2점대 방어율 투수를 볼 수 없었다. 시즌 20승에 빛나는 KIA의 원투 펀치 양현종, 헥터 역시 3점대를 훌쩍 넘는 방어율을 기록할 만큼 타고 투저의 흐름은 상당했다. 

팀 기록에서도 이는 그대로 반영됐다. 팀 방어율 1위 LG의 팀 방어율은 4.30에 이르렀고 팀 방어율 10위 삼성의 팀 방어율은 5.88이었다. 반대로 팀 타격은 정규리그 1위 KIA가 팀 타율 0.302를 달성했고 팀 타율 10위 SK의 팀 타율도 0.271로 수준급이었다. 대신 SK는 무려 234개의 팀 홈런으로 공포의 홈런 군단의 위력을 보였다. 이런 타고 타고투저의 흐름은 팀 도루의 감소를 불러왔다. 

팀 도루 1위 삼성의 시즌 도루는 100개에 못 미치는 98개에 그쳤다. 그 도루 숫자 중 상당수는 도루 부분 1위 박해민의 40개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박해민의 시즌 도루 40개는 여느 때 도루왕의 도루 숫자에 비하면 크게 줄어든 수치였다. 방망이가 연일 불을 뿜는 현실에서 부상 위험과 체력 부담이 큰 도루는 공격 전술에서 그 비중이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KBO 리그 타자들이 투수들을 압도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국내 투수들의 이를 견디지 못하면서 각 팀은 외국인 투수에 대한 의존도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각 팀은 수준급 외국인 투수 영입에 온 힘을 다했고 영입에 들어가는 비용도 크게 증가했다. 그나마도 막대한 투자의 성공을 모든 팀들이 함께 할 수 없었다. 외국인 투수의 활약 여부는 팀 성적과도 직결됐다. 항간에는 외국인 선수 보유를 늘리고 출전 제한을 풀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도 했다. 그만큼 지나친 타고 투저에 대한 심각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런 와중에도 롯데 박세웅, KIA 임기영, NC 장현식 등 젊은 투수들의 리그 선발 투수의 한 축으로 자리 잡는 긍정적 장면도 나타났다. 젊은 투수 기근의 시대에 이들의 등장은 오아시스와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투수는 부족하고 질적 향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 현실이다. 타자들은 나날이 힘을 키우고 투구에 대한 빠른 적응력을 보이고 있고 올 시즌 등장한 영건들이 내년 시즌에도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프로야구의 극심한 타고투저는 건강한 리그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다. 항상 반복되는 타격전은 야구팬들에게도 피로감으로 다가올 수 있다. 문제는 이런 타고투저의 리그지만, 정작 국제경기에서는 타자들이 힘을 쓰지 못한다는 점이다. 특히, 지난 WBC에서 야구 대표팀은 마이너리거들이 주축을 이룬 외국 팀들과의 경기에서 타격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낯선 투수들에 대한 적응력의 문제가 있었지만, 타고투저리그의 어두운 한 단면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식의 기형적인 타고투저 리그는 우리 타자들의 진짜 능력을 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가지게 하는 일이었다. 

어떤 일이든 한쪽으로 힘이 쏠리게되면 그 부작용이 크다. 우리 프로야구도 타격의 힘을 지나치게 커지면서 그 후유증도 커지고 있다. 이에 대한 대안이 시급하다. 시즌 초반 강화되다 흐지부지되는 스트라이크 존 확대를 지속적으로 일관성 있게 추진할 필요가 있다. 외국인 선수 규정 변경은 FA 시장의 이상 과열 현상이 지속되는 현실과 맞물며 변화를 검토할 시기가 됐다. 무엇보다 극심한 타고투저가 리그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음을 모두가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대안이 내년 시즌에는 가시화될 수 있을지 이에 대한 고민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사진, 글 : 지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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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시즌 정규리그, 한국시리즈 우승 팀 KIA가 에이스 양현종과 연봉 재계약에 성공했다. 양현종은 지난 시즌 후 FA 계약 과정에서 1년 계약을 하면서 규정상 FA 대상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계약 당시 팀 사정을 고려한 상호 협의에 의한 계약으로 계약에 합의하지 않는다면 타 팀 이적이 가능하도록 하는 옵션이 있었다. 사실상 FA 선수로 할 수 있었던 양현종이었다. 

양현종은 올 시즌 20승을 달성한 데 이어 한국시리즈에서 빛나는 역투로 팀 우승에 결정적 역할을 했었다. 연말 시상식에서는 각종 대상을 독식했었다. 이런 양현종의 재계약은 KIA에게는 스토브리그 필수 과제였다. 양현종 역시 KIA 잔류에 대한 의지도 강했다.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보였지만, 예상보다 결과 발표가 늦어졌다. 이 과저에서 몇몇 구단들이 양현종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양현종의 거취에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는 조심스러운 전망도 나왔다. 

KIA와 양현종은 이런 기류에도 물밑에서 협상을 이어갔고 2017년이 끝나기 전 협상을 마무리했다. KIA는 올 시즌 큰 활약을 한 외국인 헥터, 팻딘을 잔류시킨데 이어 양현종까지 강력한 1,2,3 선발 투수들과 함께 내년 시즌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올 시즌 기량이 크게 발전하면서 선발 한자리를 차지한 임기영이 더 완성된 투수로 성장할 수 가능성이 높은 만큼 선발 마운드는 더 강해질 가능성도 있는 KIA다. KIA는 내부 FA 선수 김주찬과의 협상이 아직 결과는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김주찬의 타 팀 이적이 어려운 만큼 김주찬 역시 KIA 선수로 내년 시즌을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KIA는 올 시즌 우승 전력을 그대로 유지한 채 스토브리그를 마무리하고 있다. 군 입대 선수들이 많지만, 이들은 대부분 유망주로 전력에 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다. 외국인 타자 버나디나와 재계약에 성공하면서 타선의 힘도 여전히 유지했다. 2차 드래프트와 트레이드를 통해 백업진도 보강했다. 수석코치였던 조계현 단장이 새롭게 부임하면서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춰온 김기태 감독과의 조화로 기대되는 KIA다. 

KIA는 아직 확실하지 않은 제5선발 투수와 올 시즌 내내 마음 졸이게 했던 불펜의 약점을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있지만, 이런 문제점을 가지고도 올 시즌 우승의 결과는 만들어냈다. 이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된다면 한층 더 강한 전력이 될 수 있다. 즉, KIA는 현 상태로도 우승 전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KIA가 현상 유지를 한가운데 KIA의 경쟁팀들은 전력 보강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KIA에게는 호재로 작용할 수 있다. 우선 올 시즌 정규리그 2위 두산은 FA 시장에서 전력의 큰 손실을 입었다. 주전 외야수 민병헌이 롯데로 떠났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던 간판타자 김현수는 잠실 라이벌 LG와 계약했다. 두산은 합리적 기준을 유지하며 이들과의 협상에 미온적이었다. 물론, 두산의 두터운 야수층은 이들의 공백을 최소화할 수 있지만, 전력 약화는 불가피하다. 

여기에 두산은 외국인 선수 3인을 모두 교체했다. 오랜 기간 팀 에이스로 활약했던 니퍼트를 떠나보내고 롯데 에이스 린드블럼을 영입했고 나머지 두 명은 더 젊은 선수들로 교체했다. 두산은 올 시즌 우승 실패의 원인 중 하나로 외국인 선수의 활약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분위기 전환의 목적도 있다. 하지만, 린드블럼이 에이스 니퍼트를 대신할 수 있을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고 새로운 외국인 선수들도 적응의 문제가 남아있다. 두산으로서는 떠난 선수들의 빈자리가 커질 가능성이 남아있다. 

올 시즌 후반기 대반전으로 정규리그 3위에 오른 롯데는 민병헌이라는 공수를 겸비한 외야수를 FA 시장에서 영입했지만, 주전 포수 강민호를 떠나보내면서 전력 보강 효과가 반감됐다. 강민호가 나이가 먹어가면서 수비 능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현재 롯데 내부에서 강민호를 대신할 포수 자원이 없다. 수비는 물론이고 공격력에서 강민호는 리그 최상급 선수였다. 그의 풍부한 경험도 무시할 수 없는 자산이었다. 롯데는 신예 포수들의 경쟁으로 이를 극복하려 하고 있지만, 리빌딩 팀이 아닌 상황에서 이들의 성장을 무조건 기다려줄 수 없는 상황이다. 

롯데는 베테랑들을 대거 정리하면서 팀의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하는 한편 거물급 외국인 투수 듀브론트로 두산으로 떠난 에이스 린드블럼의 자리를 대신했다. 2차 드래프트로 팀의 아쉬운 부분을 메웠다. 하지만 전력 보강이라는 측면에서는 아직 의문부호가 남는다. 강민호가 떠난 포수는 물론이고 3루, 지명타자 자리도 아직 미정이다. 롯데로서는 스프링캠프 기간 전력을 다시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올 시즌 후반기 부진으로 정규리그 4위에 머물렀더너 NC 역시 주전 포수 김태군의 군 입대 공백이 크다. NC는 내부 자원으로 이를 해결하려 하고 있지만, 불안감을 지울 수 없다. 과감히 떠나보내 외국인 에이스 투수 해커의 빈자리를 새로운 외국인 투수가 잘 메워줄 수 있을지고 내년 시즌 NC에는 중요한 문제다. NC는 장현식이라는 영건 선발 투수를 발굴했지만, 외국인 투수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마운드 운영에 어려움이 가중될 수 있는 구조다. NC로서는 여전히 강력한 타선을 유지하고 있는 만큼 포수와 선발 마운드를 어떻게 강화시킬 수 있을지가 스프링캠프의 중요한 과제다. 바꿔 말해 올 시즌 이상의 전력을 구축하기 쉽지 않은 NC다. 

이런 점에서 올 시즌 정규리그 5위로 포스트시즌에 턱걸이한 SK는 내년 시즌 KIA를 위협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에이스 김광현이 부상에서 돌아오고 에이스 켈리에 강속구 외국인 투수를 보강했다. 타선은 여전히 강력하고 백업진도 잘 갖추고 있다. 다만, 불펜 보강의 숙제는 남아있다. 김광현의 부상 후 첫 시즌이라는 점은 그의 활용에 있어 제한 요소다. SK의 더 높은 도약 여부는 아직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이 밖에 에이스 투수 로저스와 돌아온 4버 타자 박병호가 가세하는 넥센과 김현수를 팀 타선에 보강한 LG 등이 변수가 될 수 있지만, 넥센은 구단주의 형사 피소 문제가 시한폭탄과 같은 문제로 남아있고 LG는 팀 개편 과정에서의 잡음이 전력에 마이너스 요소가 될 수 있다. 

이렇게 팀 내부와 외부 사정은 내년 시즌도 KIA가 최강팀으로 자리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올 시즌 호재만 가득했던 KIA로서는 기분 좋은 연말연시가 될 수밖에 없다. 내년 시즌 개막까지는 시간은 남아있고 어떤 변수가 나타날지 알 수 없지만, 현재 분위기는 KIA가 최강자로서 새로운 왕조를 만들어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사진, 글  : 지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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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제10구단 kt는 창단 이후 줄 곳 최하위 자리가 익숙했다. 2017 시즌도 초반 돌풍을 일으켰지만, 지속력이 떨어졌고 정규 시즌 결과는 역시 최하위였다. kt의 계속된 부진은 빠른 시간 내 상위권 팀으로 자리한 제9구단 NC와 크게 비교됐다. NC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유망주 자원 등의 문제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투자에 인색한 것이 최하위 탈출을 하지 못하는 원인이라는 것이 공통적이 의견이었다. 

kt는 대기업을 모회사로 하고 있지만, kt의 지배 구조는 대주주들의 입김이 강하고 정부의 영향력하에 있는 공기업적 성격이 강하다. 의사 결정과정이 복잡하고 큰 규모의 지출에 있어서는 더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야구단 운영에 대해서는 이사회 내에서 부정적 기류가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야구단에 대한 대대적 투자는 쉽지 않은 것이 kt의 현실이다. 

이런 kt에 대해 야구팬들은 야구단 운영에 대한 의지에 큰 의문을 가졌고 비판 여론이 높아갔다. 여기에 경기 외적인 사고가 터지면서 kt 구단 이미지도 크게 떨어졌다. 또한, 미숙한 구단 운영은 kt를 더 힘들게 하는 요인이었다. 당연히 연고지 수원을 비롯한 팬층이 형성되기도 힘들었다. 여전히 야구단 운영의 주 목적이 기업 이미지 제고와 마케팅적 측면이 강한 우리 프로야구 현실에서 kt는 성적과 이미지 제고에 모두 실패한 시간을 보냈다. 




kt로서는 이번 스토브리그에서 전력 보강이 절실했다. kt는 올 시즌 경험이 풍부한 김진욱 감독을 영입하고 시즌 중 과감한 트레이드로 전력 보강에도 힘을 썼지만, 그 성과는 크지 않았다. 부족한 선수층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냈다. 가시적인 전력 보강 조치가 필요한 kt였다. 특히, 수년간 리그 최하위 수준의 팀 공격력 강화는 스토브리그에서 kt가 풀어야 할 문제였다. 이를 위해 외부 영입은 필수적이었고 상당한 투자가 뒤따라야 하는 일이었다. 

kt는 FA 시장에서 대형 내야수 황재균 영입으로 투자에 인색하다는 이미지를 벗어나려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해  FA 자격을 얻었던 황재균은 FA 계약을 미루로 메이저리그 도전을 택했다. 메이저리그 로스터 보장이 안되는 계약이었지만, 황재균은 실력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의 벽은 높았다. 한때 메이저리그 출전 기회도 있었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황재균은 마이너리그에서 대부분을 시간을 보냈다. 

시즌 종료 후 황재균은 현실을 인정하고 KBO 리그 복귀를 타진했다. 물론, 메이저리그 도전의 진정성에 대한 논란을 피할 수 없었지만, 황재균에 대한 각 구단들의 관심은 높았다. 타격에서 중심 타자로 역할일 가능한 수비 능력을 갖춘 아직 젊은 3루수 자원은 분명 매력적이었다. 황재균은 큰 부상이 없는 내구성을 갖추고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를 영입한다면 최소한 부상 등의 이유로 전력에 마이너스 요인이 될 가능성은 적었다. 

이런 황재균에 대해 kt는 일찌감치 영입을 결정했고 그와 접촉했다. 마침 그의 원 소속 팀 롯데는 손아섭, 강민호 등 내부 FA 선수들이 다수 보유한 탓에 황재균과의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었다. 결국, kt의 적극적 움직임에 황재균은 4년간 88억 원의 대형 계약으로 kt와 손을 잡았다. kt는 그의 영입으로 불펜 투수 조무근을 보상 선수로 내주는 출혈이 있었지만, 다수의 유망주 투수들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kt는 황재균의 영입이 그들에게 내내 따라다녔던 약체 타선의 이미지를 벗어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하고 있다. kt는 올 시즌 중 트레이드로 넥센에서 영입한 윤석민을 1루수로 고정하고 재계약에 성공한 외국인 타자 로하스, 황재균으로 중심 타선을 구성할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FA 외야수 유한준과 팀의 중심 타자로 자리한 박경수 등이 힘을 더한다면 중심 타선의 틀은 확실히 갖출 수 있다. 

황재균은 홈런 20개 이상 도루 20개 이상이 가능한 힘과 기동력을 겸비한 타자고 윤석민은 넥센의 4번 타자 출신이다. 유한준은 잦은 부상이 고민이지만, 경험이 풍부한 타자다. 외국인 타자 로하스는 올 시즌 대체 외국인 선수로 영입돼 리그 적응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후반기 맹타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를 바탕으로 로하스는 대폭 인상된 조건으로 재계약할 수 있었다. 박경수는 kt로 팀을 옮긴 이후 꾸준한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kt는 내부 FA 이대형의 계약이 불투명해지면서 고민이 생긴 테이블 세터진을 새롭게 하는 과제가 있지만, 올 시즌 가능성을 보인 신예 전민수를 비롯해 오정복, 김사연, 하준호 등 또 다른 외야수 자원과 정현, 심우준 등 재능 있는 내야수 들의 경쟁을 통해 테이블 세터진 문제를 극복하여 할 것으로 보인다. 

테이블 세터진만 잘 갖추어진다면 강해진 중심 타선의 위력을 더해질 수 있는 kt다. 또한, 장성우, 이해창의 새로운 경쟁 체제가 구축된 포수진은 하위 타선을 강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경험이 풍부한 이진영과 박기혁, 내야에서 외야수로의 변신을 모색하고 있는 오태곤은 팀 선수층을 두껍게 하는 요소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황재균 영입 효과는 kt에 분명 긍정적이다. 하지만 황재균 영입으로 팀 타선이 획기적으로 변할 수 있을지는 아직 지켜볼 필요가 있다. 기존 선수들의 분발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 효과는 반감되기 때문이다. 다만, 공격력을 갖춘 대형 내야수의 영입은 기존에 kt가 가지고 있지 않았던 부분을 채워준 건 분명하다. kt로서는 그 효과를 극대화하는 노력은 스프링캠프 기간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황재균 영입으로 모처럼 만에 큰 투자를 한 kt의 시도가 투자 대비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궁금해진다. 

사진, 글 : 지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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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구단들이 FA 선수를 영입함에 있어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장기 계약 후 본래 기량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여부다.  그동안 FA 선수들 중 상당수는 기대만큼의 활약을 하지 못하면서 실망감을 안겨주는 일이 많았다. 이는 FA 거품론이 더 강하게 제기되는 요인 중 하나였다. 물론, 모범 FA 계약의 사례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FA 계약은 구단에게는 큰 리스크를 안고하는 일이다. 

두산 좌완 에이스 장원준은 확실한 FA 성공 사례다. 장원준은 2014시즌 후 FA 자격을 얻었고 원 소속 팀 롯데의 제안을 뿌리치고 두산행을 택했다. 당시 롯데는 4년간 88억 원의 거액을 배팅했지만, 장원준은 그보다 적은 4년간 84억 원을 제시한 두산과 계약했다. 물론, 이면 계약설이 강하게 제기됐지만, 장원준의 선택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전통적으로 외부 FA 선수 영입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두산의 과감한 베팅도 놀라웠다. 

장원준은 2004시즌 롯데에서 프로에 데뷔했다. 부산고를 졸업한 장원준은 서서히 단계를 밟아 성장한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성장 과정에서 기복이 심한 투구 탓에 안정감에서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던 장원준이었지만, 힘을 빼는 투구에 눈을 뜨면서 달라지 모습을 보였다. 






2008시즌 12승으로 프로 데뷔 후 선발투수로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한 장원준은 이후 매 시즌 10승 이상을 기록하는 꾸준함을 유지했다. 어느새 장원준은 좌완에 긴 이닝을 소화하는 이닝이터라는 장점, 부상이 없는 단단한 내구성까지 갖춘 리그 정상급 선발 투수로 자리했다. 2011시즌에는 15승에 성공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장원준은 동시대 최고 좌완 투수들이었던 류현진, 김광현, 봉중근 등에 밀려 기량이 평가절하됐고 국가대표 선발에서도 밀리는 불운을 겪었다. 이는 병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마저 잃게 했다. 결국, 장원준은 2011시즌 15승을 달성하고도 2012, 2013시즌 군 입대에 따른 공백기를 겪어야 했다. 리그 정상급 투수였던 장원준은 2시즌을 경찰청 소속으로 퓨처스 리그에서 보내야 했다. 이는 선수 커리어에 있어 큰 손실이었다. 

2014시즌 다시 롯데로 돌아온 장원준은 10승을 달성하며 건재함을 보였다. 마침 장원준은 2014시즌 이후 FA 자격을 얻었다. 당시 장원준은 롯데 잔류 가능성이 높았다. 롯데 프랜차이즈 선수라는 상징성이 컸고 롯데가 그를 잔류시키려는 의지도 강했지만, 장원준은 변화를 택했다. 

장원준의 두산행은 롯데 팬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프랜차이즈 선수를 잃었다는 상실감은 상당했다. 롯데 역시 선발의 한 축을 담당하던 투수를 잃으면서 전력에 큰 손실을 입었다. 이런 장원준을 얻은 두산은 팀의 약점이던 선발 투수진을 확실히 강화시키는 효과를 얻었다. 

2015시즌 장원준은 정규 시즌 10승 9패 방어율 4.59로 다소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표를 남겼지만, 포스트시즌 호투로 두산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장원준은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이는 두산의 FA 장원준 영입 성공 스토리가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후 장원준은 2016 시즌 15승 6패 방어율 3.32, 2017 시즌 14승 9패 방어율 3.14로 나이가 들수록 더 안정되고 완성된 투수를 했다. 안정된 제구를 바탕으로 한 슬라이더, 체인지업 변화구 조합은 범타 유도에 적격이었고 두산의 수비력과 넓은 잠실 홈구장과 어우러지면서 장원준 투구의 위력을 극대화했다. 장원준이 포함된 두산의 선발진은 2016 시즌 정규 시즌,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의 중요한 요소가 됐고 2017 시즌도 여전히 위력적이었다. 

특히, 장원준은 2017 시즌 여타 선발 투수들이 부상과 부진으로 지난해보다 페이스가 떨어진 와중에도 홀로 꾸준함을 유지하며 두산의 선발 마운드를 든든히 지켜주었다. 올 시즌 아쉽게 한국시리즈에서 KIA에 우승을 내준 두산이었지만, 장원준의 시즌을 성공적이었다. 

2018 시즌 장원준은 두산과의 FA 계약한 4년 차를 맞이한다. 2008시즌 이후 조용하지만 강했던 장원준이었다. 이는 올 시즌에도 다르지 않았다. 두산에서의 지난 3년도 다르지 않았다. 장원준이 현재의 기량을 유지한다면 또 한 번의 대형 계약 가능성이 높다. 

아직 30대 초반에 큰 부상이 없었다는 점, 풍부한 경험과 안정감까지 갖춘 좌완 선발 투수에 대한 팀들의 수요가 높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산과의 이면 계약설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가 내년 시즌 후 FA 시장에 나온다면 큰 관심의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장원준에게는 큰 동기부여 요소라 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변화기에 있는 두산으로서도 장원준의 꾸준함을 팀을 지탱하는 중요한 바탕이다. 어찌보면 내년 시즌 장원준이 짊어져야 할 짐이 더 무거울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모습을 살펴보면 내년 시즌 역시 기대감이 더 큰 게 사실이다. 

사진 : 두산베어스 홈페이지, 글 : 지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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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에서 FA 계약을 한 선수들 특히 초대형 계약을 한 선수들의 성적으로 큰 관심사항이다. 막대한 투자를 한 구단은 물론이고 야구팬들 역시 투자의 결과에 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대형 FA 계약을 한 선수로서는 그에 걸맞은 활약을 하면 본전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상당한 비난 여론에 직면하는 것이 보통이다. FA 100억 시대가 열렸지만, 그만큼 대우를 받는 선수들의 부담도 함께 커졌다.

2016 시즌 FA 계약으로 삼성에서 NC로 팀을 옮긴 박석민에게 2017 시즌은 최악의 시즌이었다. 박석민은 FA 계약 당시 4년간 96억 원의 초대형 계약으로 NC로 이적을 결정했다. 삼성은 대표하는 박석민의 이적은 삼성에게 큰 충격이었다. 당시 긴축 경영을 하고 있었던 삼성은 NC와의 머니게임을 이겨낼 수 없었고 떠나가는 그를 그대로 보내야 했다. 

NC는 수준급 3루 수비와 함께 중심 타자로 활약할 수 있는 타격 능력까지 겸비한 박석민의 합류로 우승권 전력을 구축했다. 박석민은 2010시즌 이후 거의 매 시즌 20홈런 이상 80타점 이상을 달성한 꾸준함이 있었다. 큰 경기 경험도 많았고 30대 초반으로 전성기를 구가할 나이라는 장점도 있었다. 우타 거포로서 화려한 좌타선에 비해 부족함이 있었던 NC 우타선을 강화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다. 






2016 시즌 박석민은 0.307의 타율에 32홈런 104타점으로 기대했던 역할을 해냈다. 그의 가세로 NC는 역대급타선을 구축했고 한국시리즈 진출도 이뤄낼 수 있었다. 비록, 최강 전력의 두산에 밀려 우승의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박석민의 영입은 성공적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2017 시즌 박석민의 어깨는 더 무거웠다. 수년간 리그를 평정했던 외국인 타자 테임즈가 메이저리그 진출로 팀을 떠나면서 약해진 타선의 무게감을 그가 채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박석민은 NC의 젊은 간판타자로 자리한 나성범과 새로운 외국인 타자 스크럭스와 함께 중심 타자로 시즌을 시작했다. 

하지만 올 시즌 박석민은 잦은 부상에 시달리며 제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부상의 여파는 그의 타격감도 함께 떨어졌고 1군 엔트리 말소와 등록이 반복됐다. 그 사이 박석민의 3루수 자리는 모창민, 지석훈 등이 채웠다. 특히 모창민은 올 시즌 지명타자와 3루수, 1루수 등 여러 포지션을 소화하면서도 프로 데뷔 후 가장 많은 136경기에 출전했고 0.312의 타율에 17홈런 90타점으로 타격에서 큰 발전을 보였다. 그동안 수비 불안과 기복이 심한 타격으로 백업을 전전했던 모창민으로서는 박석민의 부상과 부진이 새로운 계기가 된 시즌이었다. 

모창민의 발전과 대비되어 박석민은 올 시즌 101경기 출전에 0.245의 타율, 14홈런, 56타점으로 극히 부진했다. NC는 박석민의 부진과 맞물려 후반기 팀이 큰 부진에 빠졌고 롯데에 3위 자리를 내주며 정규리그 4위로 시즌을 마무리해야 했다. NC는 그 와중에도 경험 많은 박석민이 후반기 그리고 포스트시즌에서 큰 활약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고 그의 부상 회복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주면서 배려했지만, 박석민의 포스트시즌은 실망스러웠다. 박석민은 급기야 포스트시즌에서 벤치에서 상당 시간을 보내야 했다. 팀의 중심 선수로서는 분명 실망스러운 시간이었다. 

올 시즌 부진하긴 했지만, 내년 시즌에도 박석민은 NC의 주전 3루수로서 그 입지가 단단하다. NC는 4년간 96억 원의 계약을 한 선수를 활용해야 하고 박석민만큼의 무게감을 지닌 3루수 후보가 팀에 없다. 앞서 언급한 모창민이 있지만, 모창민은 여전히 수비에 의문부호가 남아있다. 모창민은 지명타자로 나설 때 타격 성적이 월등히 좋았다. 하지만 박석민이 올 시즌과 같은 부진을 이어간다면 모창민은 대안으로 검토될 수 있는 자원이다. 이는 박석민이 보다 더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될 수 있다. 

2017 시즌, FA 계약 2번째 시즌을 보낸 박석민은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활약을 했다. 부상이라는 요인이 있었지만, 실망스러운 결과물을 남긴 건 분명하다. 이것이 그에게 심기일전의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이지만, 역시 관건은 그의 건강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박석민은 고질적인 손가락 부상을 안고 있고 올 시즌에는 다른 부상이 겹쳤다. 오프시즌 기간 이에 대한 관리가 필요한 박석민이다. 내년 시즌 주전 포수 김태군의 군 입대로 전력 약화가 우려되는 NC로다. 박석민이 올 시즌 부진을 딛고 내년 시즌 본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팀 성적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사진 : NC 다이노스 홈페이지, 글 : 지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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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는 과거 사극에서 자주 사용됐던 소재 중 하나였다. 비리와 폭정을 일삼으며 일반 국민들을 수탈하고 못살게 하는 탐관오리들을 벌주고 무고한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등 일종의 구세주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 암행어사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들이 신분을 숨기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 악을 응징하는 모습을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권선징악의 드라마 소재로 그만큼 극적인 소재도 그리 흔치 않았다.

실제 조선시대 암행어사는 비밀리에 왕명을 받고 지방을 순시하며 비리 관리를 벌주고 잘못된 지방행정을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당연히 암행어사의 존재는 일반 국민들에게 희망이었다. 이들은 이런 사찰 업무와 동시에 민심을 살피고 왕에게 전달하는 가교 역할까지 했다. 암행어사는 조선시대 중앙의 지방 통제를 강화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암행어사의 임무는 큰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신분을 드러내지 말아야 하는 까닭에 높은 지방관리들에 즉시 공권력을 행사할 수 막강한 권한이 있었음에도 수행자를 최소해야 했다. 위험을 감수하야 하는 일이었다. 가는 길에 산짐승이나 산적들에게 봉변을 당하거나 오지에서 조난을 당해 목숨을 잃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여기에 그들의 존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지방관들의 자객들에 의해 희생되는 일도 있었다. 여기에 붕당정치에 가속화된 이후에는 반대파를 견제하고 무고하는 수단으로 그 임무가 변질되기도 했다. 하지만 암행어사는 조선 말기 고종 때까지 그 존재가 역사서에 기록될 정도로 중앙에서 지방행정을 사찰하고 감독하는 수단이었다.



이런 암행어사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인물은 박문수를 꼽을 수 있는 실제 암행어사 박문수라는 드라마가 과거 인기리에 방영될 정도로 박문수는 암행어사 그 자체를 상장하는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다양한 설화는 지방 곳곳에서 구전되어 전해질 정도로 그의 이름은 조선시대 일반 국민들에 크게 회자됐다.

하지만 조선시대 실록에 그가 암행어사로 활약한 기록은 없다. 대신 그는 조선 영조 시대 어사라고 하는 왕명을 수행하는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한 적은 있었다. 박문수는 당시 영남지역에서 어사로 활동하면서 빈민들을 구휼하고 지방관리들의 비리를 처벌하는 한편 지역의 현안들을 잘 해결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때의 기억이 그에 대한 신화를 만드는데 큰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박문수는 암행어사라기보다는 행정가로 더 이름이 높았다. 박문수는 젊은 시절 관직에 등용된 이후 그 능력을 인정받고 주요 요직에 기용됐다. 그는 노론 세력이 조정의 중심 세력으로 떠오르던 영조 시대 소론에 속해있었지만,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영조가 강력하게 추진하던 탕평책의 수혜를 입은 인물이었다.



그만큼 영조의 박문수에 대한 신뢰는 컷을 가능성이 높다. 박문수는 국방을 담당하는 병조판서와 재정을 담당하는 호조판서 등 주요 요직을 맡아 영조를 보필했다. 특히, 호조판서로서 박문수는 당시 문제가 되던 조세 제조 개편이나 화폐개혁을 추진하는 것과 동시에 일반 국민들의 민생고를 해결하는 일에 적극 나섰다.

​박문수는 이와 동시에 행동하는 실천가였다. 국가가 소금 생산을 관장해 필수품은 소금의 가격을 안정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국가 재정 확충을 도모하기도 했다. 이는 노동을 천시하는 대다수 조정 대신들의 반대와 조롱을 받는 일이었지만, 그는 이를 꾸준히 밀어붙이는 뚝심을 보였다.



여기에 양반과 평민 모두에게 균등하게 군역을 부담하게 하는 호포제 도입을 주장하면서 조세정의의 실현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는 군포를 부담하지 않는 것은 양반들의 특권이라 여기던 시절, 집권층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박문수는 그 자신이 양반이었음에도 이를 주장하며 일반 국민들의 조세 부담을 덜어주려 했다. 이런 과감한 정책 추진과 더불어 박문수는 정치적으로 반대파에 있던 인물이 무고를 당해 위험에 처했을 때 이를 구명하는 등 공과 사를 구분하는 일처리로 왕의 강한 신임을 받았다.

 

박문수가 추진했던 정책들은 당시대에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의 정책은 일반 국민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치열해지는 붕당정치의 와중에 자신이 속한 당파의 이익을 우선시하던 당시 정치환경 속에서 박문수는 몇 안되는 일하는 정치가였다. 그가 죽자 영조는 깊은 슬픔은 드러내며 이를 애도할 정도였다.



박문수가 일반 국민들의 희망의 이름이 된 것은 암행어사로의 활동 이전에 진심으로 민생을 챙기고 고민했던 그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당시 국민들에게 민생정치는 먼 나라 이야기였고 쉽게 체험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다르지 않다.


선거때만 되면 국민을 하늘같이 섬기겠다고 하면서 굽실거리던 국회의원 후보들이 막상 당선이 되고 나면 갑질을 일삼거나 애초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 한 것이 현실이다.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하면서도 정책에 이에 대한 베려는 없고 사회적 불평등이 점점 심해지는 요즘에 박문수와 같이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정치가의 존재가 아쉬울 수밖에 없다.



2017년 연말, 세상은 더 발전하고 첨단 기술의 발달이 눈부시지만, 뉴스에서는 각종 비리와 부정들 판을 치는 세상과 만나고 있다. 이는 박문수가 정치가로 활동하던 시기가 크게 다른 모습이 아니다. 사람들은 치열한 경쟁만이 존재하는 삶과 갑의 횡포에 지쳐갈 뿐이다. 어쩌면 우월한 직위를 이용해 부정부패를 저지르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을 시원하게 응징할 누군가가 나왔으면 하는 마음속 소망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박문수는 조선시대 이런 소시민들의 삶 속에 함께 하는 영웅 같은 인물이었다. 그가 실제 암행어사로서 비리 관리를 혼내주는 드라마 같은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삶에서 일반 국민들은 분명 큰 존재였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박문수와 같은 정치인은 분명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사진, 글 : 지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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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 100억원 시대가 열렸고 억대 연봉 선수가 매년 다수 배출되는 프로야구지만, 이런 과실을 따낼 수 있는 선수들의 아직 소수에 불과하다. 여전히 많은 선수들의 프로 입단 후 1군 엔트리 진입이 버겁고 치열한 경쟁구도 속에 놓여있다. 그나마 매년 새로 들어오는 신인 선수들의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입지가 확실하지 않은 선수들의 소속 팀에서 정리 대상이 되는 매 시즌 후 일어나는 일이다. 이에 속한 선수들의 매 시즌은 프로에서 생존하기 위한 투쟁을 해야 하고 저 연봉을 감수해야 한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기회의 문이 점점 좁아진다는 점이다.

이런 과정을 견디고 뒤늦게 이름을 알리는 선수들도 있지만, 그 경우는 극히 드물다. 1군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면 젊은 나이에라도 프로야구 선수가 아닌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올 시즌 스토브리그에서는 선수단 정리가 더 과감해진 모습이다. 그에 비례해 만연 2군 선수들의 불안감도 커질 수밖에 없다. 

롯데 내야수 황진수는 10년이 넘는 무명의 세월을 묵묵히 견디고 올 시즌 비로소 그 이름을 야구 팬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킨 몇 안되는 경우 중 하나다. 황진수의 프로 입단 연도는 2007시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력으로만 따지면 팀 중견 선수가 되어야 하지만, 황진수에게 1군 무대는 너무나 멀었다. 

2007시즌 롯데에 입단한 이후 황진수는 수년간 2군을 전전해야 했다. 그가 1군 경기에 나선 건 2012시즌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하지만 1군 출전 기회는 너무나 한정적이었다. 그 역할도 대주자 대수비 정도였다. 황진수의 1군 경험은 주전 선수의 부상 공백을 메우는 과정에서 잠깐 1군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는 정도였다. 1.5군이라 하기에도 애매한 위치였다. 2012시즌 2016 시즌까지 황진수는 1군에서 20타수 이상을 소화하지 못했다. 그의 무대는 대부분 퓨처스 리그였다. 그 사이 그보다 어린 후배들이 다수 입단하여 퓨처스리그에서 함께했다. 






황진수는 내야 전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멀티 능력에  스위치히터로서 장점을 자신만의 장점을 만들기도 했다. 과거 롯데의 백업 내야수로 존재감을 높였던 박준서와 같은 유형의 선수였다. 황진수는 이런 특화된 능력도 주력도 빠른 편으로 쓰임새를 갖춘 선수였지만, 경쟁에서 번번이 밀렸다. 

올 시즌을 앞두고도 황진수는 1군 엔트리 경쟁에서 밀려 2군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여기에 롯데는 외국인 타자로 내야수 번즈를 선택했다. 그만큼 국내 선수들의 1군 엔트리 진입의 문이 더 좁아졌다. 황진수는 개막 이후 5월까지 2군에 머물렀다. 간간이 찾아오는 1군 엔트리 등록의 기회도 없었다. 그를 대신해 신인 김민수가 1군에 종종 이름을 올리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황진수의 시즌은 여느 때처럼 흘러갔다. 

하지만 6월 들어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롯데는 황재균의 메이저리그 진출에 따른 3루수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있었다. 시즌 초반 베테랑 문규현이 나섰지만, 이에 적응하지 못했다. 롯데는 이후 신본기, 김동한 등으로 그 자리를 메웠지만, 공격력에서 부족함이 컸다. 보통 각 팀별로 거포들이 3루수에 자리한 현실과 비교하면 롯데 3루수 자리는 팀 공격력에 있어 마이너스 요소였다. 이를 메울 트레이드도 여의치 않았다. 롯데는 내부 자원에서 대안을 찾았고 마침 퓨처스리그에서 괜찮은 타격감을 유지하고 있는 황진수에게 기회를 줬다. 

황진수는 6월의 시작과 함께 1군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6월 한 달 황진수는 자신의 지금까지 통산 타수보다 더 많은 54타수를 기록했고 0.278의 타율을 기록하며 내야 경쟁 군에 합류했다. 출전 경기가 들쑥날쑥했지만, 황진수에게는 이전에 없었던 소중한 기회였다. 타 경쟁자들에게 없는 스위치히터라는 장점과 멀티 능력이 유리하게 작용했다. 절실함에서 나오는 근성 있는 플레이는 롯데 팬들에게 그의 이름을 조금씩 조금씩 알려지게 했다. 어렵게 1군 엔트리에 자리를 잡았지만, 고비는 있었다. 

황진수는 7월 들어 타격 페이스가 떨어졌고 출전 기회마저 줄었다. 급기야 다시 2군행을 통보받았다. 그로서는 힘이 빠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황진수는 다시 기약 없는 2군 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1달 후 황진수는 다시 1군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고 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출전 경기 수를 늘렸다. 황진수는 8월 월간 타율 0.400에 이어 9월에도 0.353의 월간 타율로 상승세를 유지했다. 황진수의 후반기 활약은 롯데의 상승세와 맞물리며 그 가치를 높일 수 있었다. 황진수는 이 활약과 함께 포스트시즌에도 나설 수 있었다. 

황진수로는 프로 입단 후 개인적으로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60경기에 출전한 황진수는 117타수에 34안타, 타율은 0.291을 기록했다. 평범하다 할 수도 있지만, 황진수로서는 이를 위해 10년의 세월을 견뎌낸 결과였다. 올 시즌 활약으로 황진수는 내년 시즌 롯데 내야진의 경쟁자로서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아직 롯데 주전 3루수 자리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황진수는 신본기, 김동한 등과 함께 주전 경쟁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감한 투자로 내년 시즌 올 시즌 정규 3위 이상의 성적을 기대하고 있는 롯데로서는 3루수의 공격력 강화가 필수적이고 황진수를 비롯한 후보군이 이를 채우기에는 부족하다는 판단을 할 수 있다. 다른 대안 모색이 계속될 수 있다. 올 시즌 신인 중에도 경쟁 구도 속에 포함될 자원이 있고 트레이드 가능성은 물론이고 타 팀에서 보류선수 제외된 베테랑의 영입될 가능성도 남아있다. 

황진수로서는 여전히 엔트리 진입 경쟁을 해야 하는 처지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10년 무명 선수에서 프로선수로서 이름을 확실히 알렸다는 점은 황진수에게는 가치가 있는 올 시즌이었다. 그럼에도 내년 시즌 황진수의 1군에서 입지는 여전히 유동적이다. 스프링캠프는 물론이고 시범경기까지 황진수는 온 힘을 다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수비력 보완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올 시즌 경험은 그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다. 자신감도 한층 더 높아졌을 것으로 보이고 내년 시즌을 위한 동기부여 요소도 될 수 있다. 황진수가 내년 시즌 올 시즌 이상의 존재감을 보일 수 있을지 여전히 2군에서 1군 진입을 위해 애쓰고 있는 선수들에게는 황진수가 긍정의 예가 될 수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사진 :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글 : 지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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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조선시대는 현대에 가장 가까운 시대로 현대들에게 친숙한 시기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드라마의 소재로 조선시대, 왕이 있는 궁궐의 이야기는 자주 사용된다. 상대적으로 많은 사료가 있다는 점이 중요한 이유지만, 왕을 중심으로 권력을 향한 대결과 갈등, 그 안에서 파생된 다양한 이야기들은  현대인들이 보기에도 흥미를 끌 수 있는 소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권력의 비정함을 보게 된다. 그것에서 파생된 왕권과 신권의 대립, 신하들 간 당쟁, 왕위 계승을 위한 왕자들의 대립은 생존을 위한 치열한 대결을 불러왔다. 그 대결에서 승리한 자는 역사의 중심에 섰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그 존재감마저 희미해지거나 그의 진면모가 왜곡되는 패배자의 역사를 감수해야 했다.

   

이는 권력의 2인자 세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나라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왕위 계승 1순위 후보들이었지만, 시대적 상황에 따라 왕위에 오르지 못하는 불운을 겪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세자라는 직위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경우도 있었다. 왕에게 세자는 자신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존재이고 했지만, 반대로 권력을 약화하는 위협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세자는 항상 왕에 의해 견제되고 그 충심을 의심받아야 했다. 즉, 왕과 세자는 부자 간이 아닌 정적으로 자리하는 경우가 상당수 있었다. 


이는 비극적인 역사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군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는 비운의 세자들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잘아는 3인의 세자는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불운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다. 조선 초기 성군, 세종대왕의 형이었던 양녕대군, 병자호란이 혼란기의 왕이었던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 조선 왕조 최고 비극의 주인공 사도세자가 그들이다.





양녕대군은 폐세자의 비운을 겪긴 했지만, 대신 편안한 말련을 보냈다. 양녕대군의 아버지 태종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고 그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이들의 목숨을 거둬야 했다. 조선 초기 왕권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태종은 악역을 자처하며 치열한 권력투쟁의 과정을 거쳐 승자의 자리에 올랐다. 피로 세워진 정권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또 다른 희생을 불러왔다. 왕권에 위협이 되는 존재는 친, 인척이던 공신이던 숙청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태종의 맏아들로 일찍이 세자로 책봉된  양녕대군 역시 자신들의 처가 쪽 인사들이 희생되는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역사서에서 나오는 양녕대군은 왕자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기행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도피의 방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장자의 왕위 계승에 상당한 집착을 보였던 태종이었지만, 세자의 계속되는 귀행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결국, 양녕대군은 폐세자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권력을 내려놓은 댖가는 달콤했다. 양녕대군은 이후 왕위에 오른 세종대왕의 보살핌 속에 왕실의 좌장으로 자리했다. 일정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세종대왕 사후에도 그는 왕실의 종친으로 자리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 주변의 친. 인척들도 더는 화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 초기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그도 권력의 달콤함을 완전히 끊지는 못했다. 그는 세조의 권력찬탈때 상당 역할을 했었다. 이후 언급할 사도세자와 소현세자와 달리 살아남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어찌보면 스스로 군왕의 길에서 벗어난 양녕대군과 달리 사도세자와 소현세자는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와의 정치적 대립이 소현세자 역시 아버지 인조와의 불화가 그를 힘들게 했다. 공통적으로 두 세자의 아버지는 신권에 맞서 왕권 강화를 위해 고심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렸던 태종과 달리 그들은 왕권에 버금가는 신권과 힘겨운 파워게임을 해야했다. 여기에 붕당정치가 심화되던 시기에 왕은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정치력 발휘가 필수적이었다.  

 

영조는 집권 초기부터 선대 왕인 경종의 독살설에 휘말렸고 후궁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큰 컴플렉스가 있었다. 노론이라는 거대 정치세력과의 힘겨루기도 이겨내야 했다. 영조는 붕당정치의 폐단을 막고자 탕평책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웠지만, 실상은 신권의 약화를 노린 측면이 강했다. 영조로서는 자신의 후계자가 보다 안정적으로 왕권을 유지하길 바랐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의 아들 사도세자가 영조의 정책에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는 숨막히는 권력다툼에 부정적이었고 이는 마음의 병으로 이어졌다. 역사 기록에는 사도세자의 기행이 많이 실려있기도 하자. 이런 사도세자의 처지를 정치권력에서 소외된 세력이 동정하고 동조하면서 신, 구 권력 간 다툼이 점점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당장 자신의 왕권이 위협받는 상황을 자시할 수 없었다. 여기에 당시 집권층도 자신들에 비협조적인 사도세자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조금만 잘못해도 사도세자에게는 정치적 위협이 될 수 있었다. 

 

결국,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노론 강경파는 사도세자를 탄핵했고 영조는 이에 동조했다. 영조는 더 나아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게 하는 비정함을 보였다. 영조는 아들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의 권력을 더 단단히 할 수 있었다. 자신에 반하면 아들마저 피의 숙청을 하는 왕에게 대응할 수 있는 이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훗날 사도세자는 그의 아들이 영조에 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당시의 억울함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지만, 권력의 냉혹함을 마음 깊이 느끼며 생을 마감해야 하는 비운의 왕자로 역사에 남게 됐다. 사도세자와 함께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또 한 명의 왕자 소현세자는 아버지 인조의 탐욕이 만든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인조는 조선의 가장 치욕적인 역사라 할 수 있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황제에 항복의 예를 했던 왕이었다. 임진왜란의 피해가 채 복구되기 전에 당한 병자호란의 상처는 조선을 사실상 회복 불능의 상태로 만들었다. 조선은 명나라에 이어 청나라에 예속됐고 일반 서민들을 삶은 더 피폐해졌다. 왕과 집권층은 이런 현실을 극복한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인조는 이러한 국가적 위기에 자신의 왕권이 흔들리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전쟁에 패하고 적장에 항복을 한 왕이 그의 의지대로 국정을 운영하긴 힘들었다. 그를 둘러싼 집권층마저 때에 맞지 않게 명나라를 숭상하는 의미 없는 대의 명분에 빠져 있는 강경파 뿐이었다. 패전국 조선에는 변화가 필요했지만, 인조를 비롯한 집권 세력은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소현세자를 달랐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볼모로 지내던 시절 청나라에 유입된 발전된 서구의 문물과 기술에 관심을 보였고 조선을 지배하던 성리학적 사상과 다른 서양의 문화에도 개방적이었다. 그는 조선의 발전적 변화를 통해 나라를 부국강병에 이르도록 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는 이와 별도로 청나라의 실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전후 조선이 청나라의 부당한 간섭을 덜어내는데 힘 섰고 배우자인 세자빈과 더불어 직접 무역 등을 통해 상업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이를 조선을 위해 유용하게 활용했다. 이렇게 열린 사고를 가진 소현세자였지만, 이는 아버지 인조와의 불화를 불러왔다. 


조선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돼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이와 관련이 있다 할 수 있다. 소현세자는 병 치료를 받던 중 돌연 사망했다. 당시는 물론, 지금도 그의 죽음은 독살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아버지 인조는 석연치 않은 아들의 죽음에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도리어 세자빈과 손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냉혹함을 보였다. 인조는 조선의 변화를 꿈꾸는 아들이 자신과 집권층의 권력 기반을 흔들 수 있음을 우려했다, 그에게 권력은 부자 간의 정보다 더 소중했다.  


소현세자의 사후 조선은 변화의 동력을 잃고 영.정조때까지 긴 암흑기에 빠져들었다. 당연히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반응하지 못하면서 근대화된 서구와의 국력 격차가 더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근대화의 지연은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소현세자의 황망한 죽음이 아쉬운 이유다. 
 

 

이렇게  조선시대 왕의 후계자들은 결코 모두가 행복하지 못 했다. 아니 대부분이 세자가 된 이후 더 힘든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에 왕위를 이어받지 못한 세자들의 삶은 비참했다. 앞서 언급한 3명 외에도 불운한 삶은 살았던 왕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이런 희생의 기반 위에 조선은 그 역사를 이어갔다. 그리고 패배한 이들의 기록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도 양녕대군, 사도세자, 소현세자 이 세 명의 후대에 그 삶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나마 행운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진, 글 : 지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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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를 배우면서 많이 들었던 단어 중 하나가 당파싸움이다. 분명 긍정적인 단어는 아니다. 대립과 분열을 강조하는 듯 한 단어의 조합은 부정적인 면이 강하다. 이는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식민 사관의 영향이 강하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파를 갈라 싸우기를 좋아하고 단결하지 못한다는 식의 논리가 그것이다.


실제 우리 역사에 있어 당파싸움, 지금은 붕당정치로 칭해지는 정치권의 대립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오늘날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붕당정치에 무조건적인 비판을 하는 것은 과한 부분이 있다. 어쩌면 우리는 붕당정치의 일부분만을 보고 그것을 평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선진 정치와 거리가 먼 당파 간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을 이루고 수준 낮은 대립과 반목을 거듭하는 우리 정치의 행태가 오버랩 되면서 조선시대 붕당정치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 더해지는지도 모른다.

붕당정치는 조선 중기 본격화됐다. 조선 초지 정치의 주도 세력은 조선 건국에 큰 역할을 한 공신들과 태종 이방원과 권력 쟁취를 함께 한 측근들이 중심이 된 훈구세력 들이었다. 이들은 소수였지만, 대를 이어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관직은 독점되었고 왕권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기도 했다.






조선 왕들은 훈구세력을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위해 이들과 맞설 정치세력이 필요했고 지방을 기반으로 한 사림세력들이 중앙 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다. 성종 때 이후 왕들 역시 사람 세력을 적극 기용했다. 하지만 사람 세력들이 중앙 정치무대에서 자리를 잡기는 쉽지 않았다. 기득권을 가진 훈구세력은 그들을 끊임없이 견제했다. 그 과정에서 수차례 사화가 발생했고 수많은 사람 세력들이 숙청당했다.

그럼에도 사람 세력을 꾸준히 그 세력을 넓혔고 선조 때에 이르러 정치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했다. 하지만 사람 세력은 공공의 적이었던 훈구세력을 몰아낸 이후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됐다. 한정된 관직에 늘어난 양반의 수는 권력을 향한 대결을 불가피하게 했다. 애초 성리학 사상적 차이로 갈라져 있던 사람 세력이 정치적 대립관계가 더해졌다. 이는 붕당정치의 시작을 불러왔다.


선조 때 조정의 중요 관직을 놓고 시작된 대립에서 시작해 동. 서 양당으로 갈라진 정치 세력을 지금의 여당과 야당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며 붕당정치를 본격화했다. 한때 율곡 이이와 같은 인물이 동. 서 양당의 공존을 모색하며 이를 위해 힘쓰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인은 율곡 이이의 사상을 기반으로 동인은 퇴계 이황의 사상을 기반으로 더 강하게 대립했다. 


이후 서인은 노론과 서론으로 동인은 북인과 남인 등으로 다시 분화되며 붕당정치는 더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초기에는 상대 당의 존재를 인정하고 상호 공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권력 독점화 경향이 강화되면서 상대당을 숙청하는 식의 정치 보복이 난무하는 식으로 변질됐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의 대립이 정파 간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면서 국가 정책 결정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었다. 특히,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수행원들이 동인과 서인의 입장에서 다른 의견을 내면서 일본의 야욕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부분은 붕당정치의 폐해를 보여준 장면이었다. 이렇게 붕당들의 대립은 나라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보다는 정파의 이익과 권력투쟁의 방향으로 전개됐다.


물론, 붕당정치를 긍정적 방향으로 이용한 왕들도 있었다. 조선 후기 부흥기를 이끈 영조와 정조는 특정 정당에 의존하지 않는 다양한 인재 기용으로 정파 간 대립을 완화했다. 이를 통해 정치 안정과 함께 왕과 권력을 지난 붕당과 그렇지 않은 붕당이 상호 견제하에 공존했다. 이런 구조는 권력의 독점과 부패를 막는 효과도 있었다. 이처럼 붕당정치의 본래 목적은 권력의 쏠림 현상을 막고 다양한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는 발전된 정치 형태였다.

하지만 이런 이상적 붕당정치는 강력한 왕권이 있을 때만 제대로 작동했다. 그 시간도 길지 않았다. 왕권이 미약할 때 정파 간 이해관계는 다시 심화됐고 권력 투쟁은 다시 격화됐다. 이 과정에서 상호 공존의 원칙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고 일반 국민들을 위한 정치는 실종됐다. 마치 오늘날 우리 정치의 모습과 같았다.


정조 사후 붕당정치는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로 변질되면서 그 명맥마저 끊어지게 됐다. 그나마 존재하던 견제세력마저 사라진 세도정치는 나라를 더 병들게 하고 조선을 쇠락시키는 원인이었다. 즉, 붕당정치가 조선을 망하게 했다는 식의 논리는 다소 비약한 측면이 있다 할 수 있다. 그나마 유지되던 붕당정치 시스템의 붕괴가 더 큰 문제였다.


이렇게 붕당정치는 당파싸움으로 매도되기에는 아쉬움이 많은 조선의 역사다. ​근대적 정치 형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런 시스템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사장시켰다는 점이다. 붕당정치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조선 시대 붕당정치의 나쁜 이면을 그대로 닮은 우리 정치의 모습을 보면 붕당정치에 대해 무조건 비판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붕당정치가 조선을 망하게 할 원인이었을지 아직은 그렇게 단정하기에는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사진, 글 : 지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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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스토브리그에서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던 선수들의 복귀가 눈에 띄고 있다. kt와 FA 계약을 체결한 황재균을 시작으로 넥센으로 돌아온 박병호, 최근 LG와 FA 계약을 한 김현수까지 3명이 메이저리그 도전을 멈추고 KBO 리그로 돌아왔다. 지난 시즌 역대 최고 FA 계약으로 롯데로 돌아온 이대호까지 내년 시즌에는 4명의 메이저리거 출신 선수들의 대결 구도가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야구팬들로서는 분명 반가운 일이고 흥행적인 면에서 상당한 플러스 요인이긴 하지만, 한 편으로는 KBO 출신 메이저리거가 대부분 사라졌다는 사실은 아쉬움이다. 음주운전 문제로 비자 발급이 거부되어 한 시즌을 통째로 쉰 강정호 역시 사실상 메이저리그 복귀가 쉽지 않은 현실임을 고려하면 타자로서 메이저리그에 남아 있는 선수는 추신수 외에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추신수는 KBO 리그를 거치지 않고 고등학교 졸업 후 마이너리그에서 시작해 현 위치에 올라간 선수로 경우가 틀리다. 

그 외에 여전히 불펜 투수로서 메이저리그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오승환의 메이저리그 팀 계약 가능성이 크고 올 시즌 긴 부상 재활에 성공한 류현진 역시 내년 시즌 재 도약을 기대하고 있지만, 이들은 타자가 아니다. 결국, 타고 투저의 KBO 리그에서 타자들의 메이저리그 도전은 일단 실패로 귀결되는 모양새다. 

올 시즌 가장 먼저 복귀를 선택한 황재균은 올 시즌 FA 시장에서 국내 구단의 제안을 뿌리치고 도전을 택했다. 황재균은 메이저리그 로스터가 보장되지 않는 계약 조건임에도 게이치 않았다. 주 포지션인 3루는 물론이고 외야까지 멀티 플레이어로 변신도 시도했다. 하지만 황재균의 마이너리그 생활은 생각보다 길었다. 비관적인 전망이 늘어날 즈음 황재균은 극적으로 메이저리그의 콜업을 받았다. 






메이저리그 경기에 나선 황재균은 초반 몇 경기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만, 얼마 안가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메이저리그의 벽은 높았고 기약 없는 마이너리그 생활이 이어졌다. 결국, 황재균의 시즌은 마이너리그에서 끝나고 말았다. 시즌 후 황재균은 도전보다 현실을 택했다.

다시 FA 선수 신분이 된 황재균은 KBO 리그 팀과 협상을 시작했고 kt 행을 확정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메이저리그 도전이 FA 시장에서 가치를 높이기 위한 전략적인 선택이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을 가지는 눈초리도 많았고 그 진실성에도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다. 4년간 88억원이라는 계약 규모에 있어서도 거품론이 강하게 제기됐다. 

이런 시선을 잠재우기 위해 황재균으로서는 수준급 수비 능력을 갖추 장타력 있는 3루수라는 그의 장점을 내년 시즌 확실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 하지만 KBO 리그 최고 3루수인 홈런왕 최정을 비롯해 박석민, FA를 앞둔 김민성과의 비교에서 경쟁력을 있는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면 논란은 사그라 들지 않을 수 있다. 

넥센으로 복귀하는 것이 확정된 박병호는 KBO 리그 홈런왕의 이력을 바탕으로 포스팅을 통해 화려하게 메이저리그에 입성했었다. 그의 소속 팀 미네소타에서 그에게 거는 기대도 상당했다. 박병호 역시 데뷔 시즌 초반 홈런포를 연이어 쏘아 올리며 거포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하지만 그의 약점이 간파되면서 박병호는 심각한 타격 부진에 빠졌다. 결국, 시즌 중반 마이너리그로 내려간 박병호는 더는 메이저리그 도전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박병호는 기약 없는 마이너리그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올 시즌 스프링 캠프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메이저리그 진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즌 후 40인 로스터에도 그의 이름을 없었다. 사실상 전력 외로 분류된 박병호는 결단이 필요했다. 박병호는 마이너리그에서 보장된 연봉을 받으며 계약 기간을 채우기보다는 KBO 리그로 돌아올 것을 선택했다. 박병호는 내년 시즌 넥센에서 재 도약을 기대하고 있다. 박병호로서는 달라진 홈구장과 KBO 리그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우선 필요해 보인다. 박병호가 제 기량을 유지한다면 리그 홈런왕 판도에도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또 다른 메이저리그 유턴파 김현수는 복귀 결정에 고심을 거듭했다. 김현수는 2시즌 동안 메이저리거로서 이력을 쌓았다. 마이너리그 강등 거부권이 큰 역할을 했지만, 가치 있는 경험이었다. 하지만 주전이 아닌 백업 선수로 경기에 나서면서 기회가 많지 않았다. 지난 시즌 그 와중에서 적응력을 높였던 김현수는 올 시즌 더 나은 성적이 기대됐지만, 크게 줄어든 기회 탓에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기회가 많지 않았다. 한정된 기회에서 김현수는 존재감을 보여야 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시즌 도중에는 원 소속 팀 볼티모어에서 낯선 필라델피아로 트레이드되기도 했다. 새로운 팀에서도 김현수는 주전 경쟁에서 밀려 백업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렇게 2년간의 메이저리그 계약이 끝난 김현수는 새로운 팀을 모색했지만, 마이너 옵션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김현수로서는 메이저리그 도전을 위해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해야 했다. 김현수는 도전과 현실 사이에서 현실을 택했다. 김현수는 원 소속 팀 두산으로의 복귀를 원했지만, 두산은 한층 높아진 그의 가치를 감당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결국, 오랜 기간 그에게 관심을 보여온 LG가 김현수에 손을 내밀었고 김현수는 4년간 115억원이라는 역대급 계약으로 KBO 리그로 돌아왔다. 

김현수 역시 앞선 황재균, 박병호와 마찬가지로 실패한 도전자의 이력을 안고 내년 시즌 KBO 리그에 나서게 됐다. 새로운 팀 LG의 높은 기대와 함께 가치를 성적으로 입증해야 하는 과제를 김현수도 안게 됐다. 

이렇게 스토브리그 메이저리그 유턴파의 자리는 모두 결정됐다. 그 과정에서 아쉬움은 남아있지만, 이들은 모두 리그 타격 판도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선수들이다. 올 시즌 롯데의 정규리그 3위를 이끌었던 해외리그 유턴파 이대호와 함께 리그 타격 부분 상위권을 점할 가능성이 크다. 이들과 함께 기존의 KBO 리그 거포 최정과 김재환 등과 외국인 타자들까지 합세해 리그 타격 부분의 경쟁구도는 한층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메이저리그 도전이라는 공통의 이력을 가지고 있는 선수들 간 경쟁도 야구팬들의 관심을 높이는 요인이다. 이들의 활약은 시즌 내내 비교되고 회자될 가능성이 크고 이들의 활약 정도에 따라 소속 팀의 성적에도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만큼 이들의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두 경험이 풍부한 선수들인 만큼 상당한 활약이 기대되는 건 사실이다. 내년 이맘때 이들의 희비가 어떻게 엇갈릴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사진, 글 : 지후니 

Posted by 지후니74 지후니74 트랙백 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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