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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프로야구 개막전이 4월 20일 이후로 연기되면서 각 구단들은 자체 청백전으로 컨디션을 유지하며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 여전한 코로나 감염의 위험으로 선수들의 건강관리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다. 하지만 기약 없는기다림은 선수들은 물론이고 팬들에게 야구에 대한 갈증을 더하고 있다. 

상황의 변화가 없다 보니 야구 관련 뉴스 역시 밋밋한 기사들이 대부분이다. 앞으로 예상과 전망을 섣불리 할 수도 없고 선수들의 상태도 시범경기 등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포츠 TV에서도 추억의 경기들을 다시 방송하며 야구팬들의 기다림을 위로할 뿐이다. 과거 프로야구 경기를 보면서 큰 활약을 했던 레전드 선수들 다시 한번 기억 저편에서 소환되는 요즘이다. 

그중에서 이종범은 전형적인 호타준족의 선수였고 공격과 수비, 주루 능력까지 최상급의 기량을 보여준 다재다능함의 선수였다. 야구 천재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선수였다. 그는 선수 시절 바람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리그 레벨을 넘어선 선수였다. 그의 전성기는 전설 속으로 사라진 무적의 팀 해태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어 더 극적이었다. 

 

 



1993 시즌 해태에 입단한 이종범은 데뷔 시즌부터 돌풍을 일으켰다. 그 해 이종범은 타격에서 0.280의 타율에 머물렀지만, 133개의 안타와 16개의 홈런, 53타점, 85득점으로 신인답지 않은 성적을 기록했다. 특히, 73개의 도루로 그의 이름을 팬들에게 더 강하게 알렸다. 당시 이종범과 롯데 소속이었던 전준우와 함께 치열한 도루왕 경쟁을 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비록 도루왕은 차지하지 못했지만, 그가 신인이었고 유격수 포지션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성과였다. 

1993 시즌은 레전드로 가기 위한 예열기간이었다. 1994 시즌 이종범은 괴물 같은 활약을 했다. 타율 0.393, 196개 안타, 113득점에 홈런 19, 77타점과 함께 84개의 도루로 공격 전 부분에서 상위권에 자리했다. 특히 84개의 도루는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는 리그 최다 도루다. 

당시는 팀당 경기 수가 144경기보다 적었다. 엄청난 체력 부담이 유격수였지만, 이종범은 도루는 쉼 없이 이어졌다. 그가 출루하면 한 개 루가 추가되는 건 기정사실과 같았다. 그의 타격 능력을 견제해서 볼넷을 내주면 도루로 상대 팀을 괴롭히고 정면 승부를 하면 안타와 장타를 펑펑 날리는 그를 막아내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이종범이 도루를 줄이고 타격에 조금 더 신경 썼다면 꿈의 타율이라는 4할도 가능했었다는 것이 지금의 중론이다. 1994 시즌은 리그 최고 호타준족 이종범의 스토리가 본격 시작되는 시즌이었다. 

이후 이종범은 1997시즌까지 해태 선수로 매 시즌 공격 전 부분에서 빼어난 활약을 했다. 해태가 재정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최강팀의 면모를 유지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이종범과 최고 투수 선동열의 존재였다. 선동열이 일본 리그로 진출한 이후에도 이종범의 존재감은 해태가 최강팀의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1997 시즌 이후 해태는 그룹의 부도 상황에서 구단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리그 최고 선수 이종범에게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기도 어려웠다. 이종범의 활약을 눈여겨 본 일본 리그에서의 이종범에 대한 영입 시도는 해태 구단에 큰 현안이 됐다. 이미 선동렬을 떠나보면 해태는 팀의 또 다른 심장 이종범을 내줄 수 없었다. 이에 팬들의 여론은 들끓었다. 여론에 밀린 해태는 이종범을 일본 주니치로 떠나보내야 했다. 열악한 재정상황은 선동열과 이종범을 모두 해외 리그로 떠나보내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렇게 일본 리그로 진출한 이종범은 특유의 화려한 플레이로 선풍을 일으켰다. 그의 활약이 대한민국을 넘어 일본 리그로 향하는 시점, 이종범은 경기 중 몸 맞는 공으로 큰 부상을 당했고 뜻하지 않은 공백기를 거쳐야 했다. 이는 전성기에 있던 이종범에게는 큰 타격을 안겨주었다. 이후 이종범은 과거의 기량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이종범은 외야로 수비 포지션을 변경하기도 했지만, 그 활약도는 이전과 달랐다. 결국, 이종범은 일본 리그에서의 짧은 기억을 뒤로하고 국내 컴백을 선택했다. 

그가 돌아온 KBO 리그는 이전과 달랐다. 원 소속팀 해태는 KIA에 인수되어 간판이 바뀌었고 함께 활약했던 선수들의 상당수도 달라졌다. 어느새 이종범은 베테랑 선수가 됐다. KIA는 팀의 간판선수로 이종범의 컴백을 강력히 추진했고 이종범은 KIA의 간판선수로 그 활약을 이어갔다. 하지만 KIA는 과거 해태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했고 그의 활약도 다소 빛을 잃었다. 그 역시 점점 기량이 저하를 피할 수 없었다. 타격 능력을 살아있었지만, 호타 준족의 면모는 점점 사그라들었다. 

세월은 그를 최고의 자리에서 점점 밀려나게 했다. 여전한 이종범이라는 이름에 대한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하는 사이 이종범에 대한 구단과  팬들의 평가 역시 이전과 달라졌다. 이종범 역시 나이가 먹어감을 실감해야 했다. 2009 시즌 KIA 우승의 영광을 함께 하긴 했지만, 그는 우승의 중심 선수는 아니었다. 이종범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가려 했지만, 2001시즌을 끝으로 그의 현역 선수 생활은 자의반 타의 반 마무리됐다. 그는 명예로운 은퇴를 원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후 이종범은 야구 해설가와 지도자로서 역량을 보였지만, 눈에 띄는 성과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올 시즌 고향팀은 KIA의 감독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현실화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종범의 전설은 그의 아들 이정후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이정후는 입단 직후 이종범의 아들로 유명세를 떨쳤지만, 지금은 키움을 대표하는 선수이자 국가대표 외야수로 당당히 자리했다. 이제는 이정후 그 이름만으로 충분히 브랜드가 되고 있다. 이종범으로서는 아들이 빠른 시간 내 그의 그늘을 벗어나 또 다른 레전드의 역사를 만드는 과정이 흐뭇할 수밖에 없다. 이종범에서 이정후로 이어지는 야구 천재의 계보는 우리 프로야구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길 것으로 보인다. 그 시작은 1993 시즌부터 시작한 이종범의 프로 입단이었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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