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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프로야구에는 좌타자가 팀 중심 타선을 이루는 일이 많다. 박병호나 양의지 같은 리그 정상급 우타자들도 있지만, 좌타자들의 비중은 커지고 있고 우수한 좌타자들을 많이 보유한 팀은 팀 공격력에서 큰 이점을 가질 수 있다. 우투수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큰 현실에서 좌타자는 유리함을 가질 수 있고 1루 베이스와 한 발이라도 더 가까운 좌타자들의 출루 가능성은 커진다. 

과거에는 빠르고 정확도에 강점을 가진 좌타자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장타력을 겸비한 거포형 타자들도 많다. 이에 프로야구 각 팀은 좌타자들에 대비할 수 있는 좌투수 확보가 중요해졌다. 한 타자만 상대하는 원 포인트 릴리프 투수들은 대부분 좌투수들이다. 1루수 수비도 과거에 비해 그 중요성이 커졌다. 그만큼 좌타자를 잘 상대하는 건 팀 성적에도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다. 

강한 좌타자 시대의 요즘이지만, 프로야구 초창기 강력한 좌타자의 비중은 크지 않았다. 선수 자원도 부족했다. 뛰어난 좌타자의 존재감을 그만큼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 장효조는 가장 빛나는 이름이었다. 1983년 데뷔해 1992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장효조는 현역 시절 안타제조기 타격의 달인이라는 명성을 얻을 정도로 뛰어난 선수였다. 방망이를 거꾸로 들어도 3할을 때려낼 수 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의 타격은 천재적이었다. 

 

 

 



그의 타격 능력은 아마 시절부터 알려져 있었다. 고교, 대학은 물론이고 프로야구가 없었던 실업리그에서도 그는 최고 타자였다. 국가대표에서도 부동의 중심 타자였다. 1982년 세계 야구선수권 우승 멤버 중 한 명이었다. 1983 시즌 삼성 소속으로 프로에 뒤늦게 데뷔한 장효조는 입단 첫해 0.369의 타율에 117안타 18홈런, 62타점을 기록했다. 신인의 성적이라 할 수 없는 결과였다. 

하지만 그는 이 성적으로도 신인왕을 차지하지 못했다. 일설에는 그의 자존심 강하고 언론에 친화적이지 못한 태도가 기자단 투표에서 득표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거나 신인으로서 너무 뛰어난 성적을 거둔 탓에 신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등의 풍문도 있었다. 중요한 건 장효조는 이미 데뷔 시즌부터 최고 타자였다는 점이었다. 

이후 장효조는 이만수와 함께 삼성을 대표하는 타자로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로 매 시즌 활약을 이어갔다. 그가 없는 삼성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의 삼성에서 존재감을 절대적이었지만, 이로 인해 매 시즌 연봉 협상에서 장효조와 삼성은 원만한 계약을 하지 못했다. 장효조는 자신의 성적에 맞는 대우를 원했다. 선수들이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프로야구 초창기 장효조는 보기 드문 선수였다. 그만큼 장효조는 자존감이 크고 강한 선수였다. 

구단과의 불편한 관계는 결국 큰 사건으로 이어졌다. 1987 시즌 이후 삼성은 돌연 장효조의 공개 트레이드를 선언했다. 1984 시즌 롯데와의 한국시리즈에서 믿을 수 없는 패배를 당했던 삼성은 1985 시즌 전후기 통합 우승으로 챔피언에 오르긴 했지만, 한국시리즈 무대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고 패배자로 남아야 했다. 삼성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투수력 보강이 필요했다. 이에 중심 타자 장효조를 트레이드 시장에 내놓는 결정을 했다. 이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 이면에는 구단과 항상 마찰을 빚은 장효조의 기를 꺾기 위한 측면도 분명 존재했다 

이후 트레이드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1988 시즌 이후 장효조는 결국 삼성을 떠나야 했다. 삼성은 대형 트레이드를 통해 에이스 김시진을 롯데에 내주고 최동원을 영입한 데 이어 장효조를 롯데 중심 타자 김용철에 트레이드했다. 삼성은 우승을 위한 선택이라 했지만, 껄끄러운 관계에 있던 김시진, 장효조를 내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비판이 상당했다. 롯데에서 영입한 최동원, 김용철 역시 구단과의 관계가 매끄럽지 않았다. 삼성과 롯데는 소위 구단에 순응하지 않는 선수들의 서로 교환한 셈이었다. 

이를 두고 팬들의 비난은 상당했다. 하지만 구단의 힘이 절대적인 현실에서 이 트레이드는 현실이 됐다. 누구보다 삼성을 사랑했던 장효조는 원치 않는 트레이드로 팀을 떠나고 말았다. 트레이드 이후 장효조는 부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1991 시즌 0.347의 타율을 기록하며 교타자의 면모를 다시 보여주며 부활하기도 했다. 1992시즌에는 삼성에서 누리지 못했던 한국시리즈 우승의 기쁨을 함께 하기도 했다. 장효조는 1992 시즌 후 롯데에서 명예로운 은퇴를 하며 현역 선수의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삼성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장효조가 롯데 선수로 은퇴식을 치르고 현역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는 장면은 씁쓸함을 남겼다. 그 역시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장효조는 롯데에서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최고 교타자의 지도자 변신은 기대를 모았지만, 롯데에서 지도자로서의 성과는 크지 않았다. 이런 그에게 삼성으로의 컴백은 새로운 동기 부여가 됐다.

장효조는 삼성에서 프런트와 코치, 2군 감독으로 역량을 발휘했다. 비록, 불편한 관계 속에 삼성을 떠나긴 했지만, 지도자로서 장효조는 삼성과 화해했고 선수 육성에 큰 역할을 했다. 그렇게 지도자로서 그의 야구 인생이 헤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시점에 장효조에게 병마가 닥쳤고 그는 일어나지 못했다. 2011년 9월 장효조는 55세의 한창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마침 그해 9월에는 그와 함께 트레이드 되었던 최동원이 긴 투명 끝에 사망하며 야구 팬들의 슬픔이 더해졌다. 두 선수는 모두 삼성과 롯데의 간판선수였고 레전드로 남을 수 있었지만, 구단의 일방적인 결정에 원치 않는 트레이드를 당했고 그토록 원했던 고향팀에서의 은퇴를 하지 못한 공통점이 있었다. 다만, 장효조는 지도자로서 삼성과 함께 할 수 있어 끝내 롯데로 돌아오지 못한 최동원과는 대조를 보였다. 

이런 부침이 있었지만, 장효조는 최고 타자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의 통산 타율 0.331은 여전히 역대 최고 기록이고 전성기 시절 그가 골라내는 공은 무조건 볼이라 할 정도로 그의 타격은 정교했다. 만약 프로야구가 조금 더 일찍 출범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함께 하는 선수 중 대표적인 선수가 장효조다. 최근 뛰어난 좌타자들이 다수 존재하지만, 최고 좌타자로서 그리고 교타자로서 장효조가 남긴 발자취는 그 무게감이 여전하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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