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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레전드 중 이만수는 그 누구보다 특이한 캐릭터의 인물이다. 헐크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그에 대한 이미지는 거칠어 보이는 외모와 달리 과격하고 무섭기보다는 유모 감각이 있고 친근한 이미지로 기억된다. 그는 타자로서 홈런포를 양산하고 파괴력 있는 공격력을 보여주었다. 헐크라는 별명은 그의 경기력에 기인한 측면이 강하다 할 수 있다. 

이만수의 포지션을 포수였다. 그는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4번 타자 겸 포수로 데뷔했다. 데뷔 시절부터 이만수는 강타자의 반열에 있었다. 프로야구 공식 경기 첫 홈런도 그가 때려냈다. 그는 프로야구 초창기를 대표하는 홈런 타자였다. 삼성은 1983년 입단한 장효조와 함께 이만수가 중심 타선에 자리하면서 공포의 타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실제 이만수는 홈런 타자로서의 성적을 남겼다. 통산 16시즌 동안 이만수는 252개의 홈런과 860타점을 기록했다. 통산 타율도 0.296에 이른다. 통산 볼넷은 554개인데 삼진은 490개로 볼넷 대비 삼진 비율도 보통의 장타들에 비하면 그 격차가 크지 않다. 홈런 타자지만, 그는 정교함까지 갖춘 타자였다. 무엇보다 그의 포지션이 포수였다는 점에서 기록이 가치는 더 크다.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포수로서 중심 타선을 소화하고 있는 리그 최고 포수 양의지와 비견될 수 있는 이만수였다. 그는 경기 중 끊임없이 타석에 선 선수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하거나 특유의 쇼맨십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경기장에서 웃음을 주는 선수였다. 이는 팬들에게 그가 친근한 이미지를 가지게 했다. 삼성 팬들의 그에 대한 지지는 그가 전성기를 지나서도 상당했다. 

그에게 있어 최고의 시즌은 1984년이었다. 그 해 이만수는 타율과 타점, 홈런 부분에서 모두 타이틀을 차지하며 3관왕에 올랐다. 그 해 삼성은 최강 전력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보통이라면 그의 시즌 MVP 수상은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시즌 막바지 타율왕 경쟁 상대였던 롯데 홍문종에 대한 삼성의 고의사구 남발은 당시 큰 비판을 받았다. 시즌 마지막 2연전에 이만수는 출전하지 않았고 홍문종은 자력으로 타율 부분 타이틀을 차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삼성은 홍문종이 타율왕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여기에 삼성은 롯데는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만들기 위해 고의 패배 의혹까지 더하며 불명예를 더했다. 비난은 잠깐이지만, 기록은 영원하다는 말로 항변했지만, 공정한 경쟁을 막았다는 점은 이만수의 3관왕의 가치를 크게 떨어뜨렸다. 

여기에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이 롯데 최동원의 기적은 호투에 밀려 우승까지 놓치면서 이만수는 3관왕을 차지하고도 시즌 MVP를 차지하지 못했다. 한국시리즈 이후 MVP 투표를 하면서 최동원에 대한 기자단의 우호적 분위기가 조성된 탓이 컸다.  

하지만 이러한 아픔 이후에도 이만수는 4번 타자 포수로서 그 활약을 이어갔다. 이후 수차례 홈런왕과 타점왕 타이틀을 차지하며 강타자의 면모를 유지했다. 수비력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실제 그의 수비력은 결코 다른 포수들에 비해 밀리지 않았다. 너무 뛰어난 공격력 탓에 수비가 빛나지 못했던 점이 있었다. 이만수는 매 시즌 20홈런과 80타점을 해낼 수 있는 타자였다. 포수가 그런 공격력을 보여주는 건 당시로는 놀라운 일이었다. 

이런 이만수의 활약이 있었지만, 삼성은 항상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목표에 이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공격력에 비해 떨어지는 마운드와 포스트시즌에만 가면 작아지는 징크스, 해태라는 절대 강자의 존재 등이 그들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가로막았다. 그 사이 이만수 역시 세월의 흐름 속에 점점 노쇠화의 길을 걸었다. 잦은 부상에 노출되며 포수로서의 역할에도 무리가 있었다. 이만수는 1루수와 지명타자로 포지션을 변경하며 선수 생활을 이어갔지만, 장점이던 공격력의 약화를 피할 수 없었다. 

이만수는 팀의 레전드고 베테랑으로서의 가치가 있었지만, 우승에 목마른 삼성으로서는 효율적인 선수 구성이 필요했다. 양준혁, 이승엽의 입단으로 이만수의 포지션인 1루와 지명타자 자리 역시 포화상태가 됐다. 이만수로서는 은퇴의 압력에 직면했다. 그는 현역으로 더 남고 싶었지만, 구단은 그의 자리를 남겨두지 않았다. 결국, 이만수는 1997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다. 사실상의 방출이었다. 삼성 구단은 그에게 냉정했고 은퇴식도 없었다. 그렇게 이만수와 삼성은 긴 동행을 아쉽게 끝냈다. 

이후 이만수는 메이저리그에서 지도자로서 오랜 경력을 쌓았다. 메이저리그 팀에서 코치로 오랜 기간 활약하기도 했다. KBO 리그의 레전드에 메이저리그 지도자 경험까지 그는 국내 프로팀의 지도자로 화려하게 복귀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그의 현역 시절 소속팀인 삼성으로의 복귀 가능성에 많은 이들이 주목했다. 하지만 이만수는 끝내 삼성으로 복귀하지 못했다. 

그는 SK에서 수석코치로 국내 프로야구에 복귀했고 이후 SK 감독으로도 성과를 남겼다. 삼성의 감독 공석이 발생하면 그의 이름이 거론됐지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최근 젊은 감독과 프런트 출신 감독이 대세가 되면서 그의 프로야구 감독으로서의 복귀는 더 요원해졌다. 

비록 그라운드로 돌아오기 어려운 상황이 됐지만, 이만수는 여전히 야구 관련 일에 종사하고 있다. 특히, 야구 불모지인 동남아 지역에서 야구를 보급하는 일에 힘쓰는 등 대외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야구 선수 출신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것과 비교해 이만수는 야구인으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분명 화려한 선수 생활이었지만, 그 끝이 아쉬웠던 이만수였다. 그럼에도 그는 야구를 떠나지 않았고 해외에서 국내에서 지도자로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이만수는 우리 프로야구의 레전드로 전혀 손색이 없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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