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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서남부에 자리한 양천구는 서울의 대표적 주거 단지다. 목동은 1980년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건립되었고 신월동 일대는 서민 주거 단지로 많은 주택들이 자리했다. 그 때문에 1988년 지금의 강서구에서 분구되어 형성된 양천구는 전국의 기초 자치단체 중 가장 높은 인구 밀도를 보이는 곳 중 하나다.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57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동네 양천구 신월동, 목동을 찾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함께 했다. 

넓은 호수가 인상적인 한 공원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양천구에서 가장 큰 호수공원인 서서울호수공원은 이른 아침부터 호수를 따라 산책에 나서는 주민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그 주민들 사이로 사진촬영에 열중인 사진가가 보였다. 그는 공원 위를 오가는 비행기를 담고 있었다. 김포공항과 인접한 이곳에서는 대형 여객기의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사진가는 볼 때마다 달라지는 여객기의 모습을 수시로 담는다고 했다. 잠시 오가는 비행기의 모습을 지켜봤다. 어린이 되면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의 소음 문제가 더 신경 쓰이고 불편하게 느껴지지만, 어린 시절 하늘을 나는 비행기는 잘 모르는 어딘가로 갈 수 마술의 양탄자 같은 존재였다. 잠시 비행기를 살피며 추억 속에 있는 나를 발견했다. 

다세대, 단독 주택이 밀집해 있는 오래된 주택가를 찾았다. 골목길을 걷다 다세대 주택 반지하 공간에 자리한 빵집이 보였다. 3년 된 그 빵집의 사장님은 3대에 거쳐 살아온 집의 일부분을 개조해 빵집을 열었다고 했다. 그가 나고 자란 동네에서 사장님은 40살이 넘어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누구보다 마을과 주민들을 잘 아는 사장님의 빵집은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 같은 느낌이었다. 특히, 동네 아이들에게는 학교나 학원을 오가며 들리는 작은 아지트였다. 사장님은 그런 아이들이 반갑기만 하다. 어린 시절 동네 골목에서 친구들과 함께 하던 자신의 모습이 아이들 모습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 보였다. 사장님은 그런 아이들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빵집을 열고 장사가 더 잘 되는 시내 번화가에 시작할 것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사장님은 자신이 자란 동네를 떠날 수 없었다. 사장님은 많은 돈을 벌려는 욕심보다는 주민들과 함께 하며 인생의 중요한 일부가 된 동네를 지키는 게 더 행복하다고 했다. 그런 사장님의 마음이 통한 탓인지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이 주류를 이루는 지금에도 이 빵집은 동네 빵집으로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동네 골목을 벗어나 차도 옆 길을 걸었다. 그 길에 한 만두전골 식당이 보였다. 이 식당의 만두는 보통의 만두와 다른 속이 다 보이는 만두였다. 굴림만두라 하는 이 만두는 속을 만드는 재료나 방법이 일반 만두와 달랐다. 보통 밀가루로 피를 만들어 속을 채우지만, 이 만두는 전분을 섞어 만두 속을 뭉쳐 그대로 요리에 사용하고 있었다.

오랜 요식업 경력의 요리사이기도 한 사장님은 아이들이 좋아할 수 있는 만두를 고민하다 지금의 굴림만두를 개발했다고 했다. 이렇게 요리에 열정적인 사장님이지만, 사람들을 만나고 어울리는데 여전히 서툴다고 했다. 그 때문에 사장님은 일하는 시간에 좀처럼 주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아내가 그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있었다. 아내는 매우 활달하고 손님들과 스스럼없이 소통했다. 이 아내 덕분에 이 식당을 찾는 손님 중 상당수는 맛과 함께 아내 때문에 찾는다고 했다. 달라도 너무 다른 성격의 부부지만, 그 다름이 멋진 조화를 이루며 식당을 든든히 지켜가고 있었다. 

양천구의 중요한 조망 장소인 용왕산에 올랐다. 아직 눈이 쌓인 산책로를 따라 오르니 한 정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정자에서는 한강을 포함한 서울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높지 않은 마을 뒷산이었지만, 그곳에서 바라본 풍경은 그 어느 곳 보다 멋졌다. 덕분에 용왕산은 서울시에서 손꼽히는 조망 명소 중 하나가 됐다.

멋진 풍경을 뒤로하고 다시 나선 길, 길을 걷다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건물 앞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 소리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작은 방송국이 있었다. 동네 주민들이 함게 하는 동네 방송국이었다. 동네 어머니들이 주축인 이 방송국은 라디오 방송 녹음은 물론이고 직접 발로 뛰는 취재를 통해 영상 스트리밍도 하고 있었다. 경력이 쌓인 어머니들은 멋진 DJ가 되기도 하고 열혈 기자로 방송 제작자로 함게 활동하고 있었다.

과거 지자체의 프로그램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주체적으로 방송국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여러 어려움도 있지만, 어머니들은 과거 학창 시절 가졌던 방송인에 대한 꿈을 이뤄냈다는 사실에 일이 즐겁기만 하다고 했다. 이런 어머니들의 열정에 마을 방송국은 지금도 마을 구석구석의 소식과 주민들의 이야기, 여로 현안들이 공유되는 미디어로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방학으로 텅 빈 초등학교 운동장을 지나 전통 시장으로 향했다. 두 개의 전통시장이 서로 연결된 독특한 시장길을 따라 걸으며 시장 특유의 에너지와 풍경들과 함께 했다. 먼 고향에서 칡을 캐와 칡즙을 만들어 파는 사장님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고 다양한 시장 자판의 모습이 눈을 즐겁게 했다. 그 길에 오래된 군고구마 기계가 서있는 청과물 가게가 보였다. 사장님은 겨울에만 운영하는 군고구마 기계 조작이 한창이었고 한 청년이 열정적으로 호객을 하며 장사에 여념이 없었다. 보통은 가족들이 함께 운영하는 시장 가게들이 많지만, 이 가게는 사장과 직원의 오랜 인연이 이 가게를 이어가는 큰 힘이었다.

이 가게 사장님과 직원의 인연은 10년이 넘었다고 했다. 직원은 과거 마트의 청과물 코너에서 함께 일하며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사장님 가게에서도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사장님과 직원은 단순한 고용주가 직원이 아닌 가족 이상의 신뢰와 끈끈함이 있었다. 직원은 세심하게 자신을 챙겨주는 사장님이 항상 고맙고 사장님은 내일처럼 가게 일을 하는 직원이 고맙기만 하다.

올해 30살이 된 직원은 가게 한편에 앞으로 10년 넘게 더 열심히 일하겠다는 자신의 다짐을 적어 놓았다. 두 사람은 오늘도 시장에서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더 큰 꿈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사장님과 직원의 모습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물질적인 수단이나 각종 조건아 아니어도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로 단단해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두 사람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며 다시 길을 나섰다. 

아파트 단지 옆 산책로를 걷다가 작은 전각이 보였다. 그 안에는 서울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열녀문이 있었다. 조선 영조 임금이 하사했다는 열녀문에는 중병으로 오랜 세월 앓다가 세상을 떠난 남편을 따라 세상을 떠난 한 부인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임금이 하사했다는 내용이 있다. 당시 여성들의 삶을 상징하는 유물이었다.

성리학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던 조선에서는 여성 정절과 순결을 크게 강조했고 이를 지키지 못한 여성은 사회적인 지탄을 받거나 목숨을 잃기도 했다. 정절을 지키다 사망한 여성과 가문은 크게 칭송받았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자기 뜻대로 펼치기 못한 이의 아픔과 슬픔을 이것으로 대신할 수는 없었다. 마치 지금도 이슬람권 국가나 인도 등에서 자행되는 여성에 대한 가족들의 명예 살인과 다를 게 없는 일이었다. 열녀문은 남성 중심의 조선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예로 씁쓸함이 함께 했다. 열녀문은 잘못된 사회적 가치관을 상징하는 유물로 발전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다시 어느 마을 길을 걸었다. 그 길에 가로수에 뜨개질한 옷을 입혀주는 할머니들이 보였다. 보통 겨울이 되면 나무에 볏짚 등으로 나무를 둘러싼 옷을 입히는데, 이는 그 안으로 나무에 해가 되는 병해충들을 모이게 봄이 되면 태워 방재하는 목적이 있다. 이 마을의 가로수들은 할머니들의 정성 가득한 털 옷을 입고 있었다. 그 털옷에는 할머니들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어디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 일은 90살이 넘은 한 할머니와 동네 이웃들이 함께 하는 일이었다. 할머니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작업실에서 뜨개질로 다양한 생활용품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작품들은 판매되어 지역의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사용되고 있었다. 할머니들은 결코 여유 있고 넉넉한 생활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자신들의 기술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일이 즐겁기만 하다. 할머니들의 따뜻한 마음이 차가운 겨울의 공기를 따뜻하게 만들고 있었다. 

여정의 마지막, 주택가의 오래된 건물에 자리한 식당에 들렀다. 40년 동안 한자리를 지킨 이 식당은 대를 이어 가업으로 이어지는 전통 있는 식당이었다. 과거 40여 년 전 식당을 시작했을 때 식당이 있는 건물만 있었던 동네는 이제 많은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동네로 변했다. 이 식당은 동네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식당은 창업자였던 어머니에 이어 아들 내외가 운영하고 있었다. 아들 내외는 어머니의 손맛과 운영 노하우를 이어받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더해 식당의 메뉴를 업그레이드했다. 이 식당의 주메뉴인 아귀찜은 1대 사장님의 비법과 2대 사장님의 다양한 반찬이 더해진 한 상이었다. 이 식당에는 과거 어머니의 맛을 잊지 않고 찾는 손님들과 2대 사장님의 단골손님이 찾는 곳이 됐다. 

단단히 식당이 자리를 잡았지만, 어머니는 지금도 고향에서 직접 농사지은 식재료를 보내며 마음을 함께 하고 있었다. 아들 내외는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며 일하고 있었다. 아들 내외는 이 식당이 그들에 이어 3대로 이어지며 100년의 가업으로 이어지길 소망하고 있었다. 이들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함께 기원했다. 

양천구에서의 여정은 도시에서 느끼기 힘든 사람 냄새 가득한 시간이었다. 이곳에서 만난 이웃들을 오랜 세월 자신의 터전을 지키며 이웃들과 함께 하고 있었다. 발전과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달라지는 시대에 양천구의 이웃들을 그 변화를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며 건뎌내며 자신들의 역사를 지켜가고 있었다. 함께 하는 이들이 있어 사람들은 외롭지 않아 보였다. 양천구에서의 여정은 이웃과의 소통이 점점 어색하고 어려워지는 삭막한 우리 삶에 작은 오아시스를 만난 느낌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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