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심부에 자리한 중구 명동은 근. 현대사를 관통하는 시간 속에 서울의 대표적 상업지역으로 그 명성을 이어왔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집단 거주지이기도 했던 명동은 명례방으로 불렸던 명동은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보급된 이후 천주교 신앙 공동체인 명례방 공동체가 자리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지금의 충무로 일대인 혼마치와 더불어 일본인들의 주거지가 있었다. 그 시절 명동은 메이지초 명치정으로 불렸다. 해방 이후 지금의 이름인 명동이 됐다.
긴 역사의 흐름과 함께 한 명동은 서울 중심부에 자리한 지리적 입지 탓인지 일제 강점기부터 상업의 중심지로 큰 명성을 얻었고 그 명성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명동은 국내 최대 백화점 본점이 자리하고 있고 각종 유행과 패션을 선도하는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여의도로 옮겨갔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은행과 대형 은행 본점 등이 위치한 금융의 중심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가장 즐겨 찾는 서울의 대표적 관광특구이기도 했다. 코로나 사태가 지속하면서 외국인 관광객이 끊기고 관광지로서 자리가 흔들리고 있지만, 명동 거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다 외국인 관광객이 더 많다고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명동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땅값이 비싸기로 유명하다. 지금도 해마다 발표되는 토지 공시지가에 명동은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유서 깊고 오랜 내공이 쌓은 동네가 명동이다.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58회에서는 이 명동을 찾아 명동의 과거와 현재, 그 역사와 함께 한 이웃들의 이야기와 함께 했다.
명동의 과거를 살피는 장소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많은 차량들이 오가는 대로변에서 과거 한국은행 본점 건물을 살폈다. 과거 명동은 앞서 언급한 대로 은행 본점들이 밀집한 금융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많은 은행들과 금융 기관들이 여의도로 옮겨갔지만, 여전히 명동 일대에는 은행과 증권사 등의 본사가 자리하고 있어 과거의 영화를 이어가고 있다. 번화가에서 시선을 돌리며 대형 백화점 본점이 보인다. 지금은 인터넷, 소셜 커머스가 대세가 되고 있고 유통의 채널이 다변화됐지만, 여전히 명동하면 유행을 이끌어가는 패션의 중심지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이에 명동은 화려함과 멋짐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르게 한다.
빌딩 숲 한편에 한 공원을 찾았다. 이 공원에는 1960년대 명동을 기록한 지도가 눈길을 끌었다. 누군가 손으로 그려낸 그 지도에는 그 당시 명동의 모습이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그 장면과 함께 방송에서 보여준 명동의 모습은 과거를 추억하게 했다. 그때도 명동은 시대의 변화가 가장 먼저 전해지고 유행을 선도하는 곳이었다. 지금은 상권의 중심이 홍대, 강남 등으로 분산되어 있지만, 과거 명동은 유행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고 대표적인 핫플레이스였다. 명동은 젊은이들을 모이는 장소였고 사람들로 북적였다. 연말연시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뉴스 화면에 지금도 명동이 등장한다.
화려함 가득한 명동 거리 한편에서 작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옷 수선집을 찾았다. 패션의 중심지답게 과거 명동에는 많은 옷 수선집이 있었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고 2집만 남아있다고 했다. 찾은 곳은 자매가 운영하는 옷 수선집이었다. 7자매 중 첫째와 둘째인 두 자매는 그들의 청춘과 인생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자매는 일을 하며 다른 형제자매를 포함한 가족들을 부양했다.
힘들고 고된 일의 연속이었지만, 자매는 그 기억 속에 후회라는 단어를 넣지 않았다. 그들로 인해 가족들이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었다는 게 그들에게는 행복으로 보였다. 이제 노년의 된 자매지만 지금도 서로 힘이 되며 옷 수선집을 지키고 있었다. 이런 그들을 잊지 않고 찾아주는 단골들은 자매에게는 큰 힘이 되고 있었다. 이제 옷이 흔해지고 쉽게 버려지는 세태에서 자매는 누군가의 추억이 담긴 옷에 새롭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며 그들의 추억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상가 거리 한편에 빨간색의 분식집이 보였다. 작지만 무려 45년의 역사를 지난 분식집이었다. 이 분식집의 시그니처 메뉴는 사장님의 손맛 가득 들어간 마늘 떡볶이였다. 수십 년 내공이 함축된 떡볶이였다. 사장님은 25살의 젊은 나이에 노점으로 분식집을 시작했다. 당시 젊은 엄마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거리로 나섰다. 첫째 딸이 장애를 가진 탓에 더 열심히 돈을 벌어야 했고 더 힘내서 살아야 했다. 그 결과 노점으로 시작해 30년이 지나 지금의 분식집을 명동에 열 수 있었다. 이제 그 분식집은 어머니와 막내딸이 서로를 의지하며 운영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딸에게 어머니는 일 때문에 보기 힘든 존재였지만, 이제는 어머니의 든든한 조력자가 됐다. 어머니와 딸이 함께 하는 분식집은 이제 45년의 내공에 또 다른 수십 년의 역사가 더해질 예정이다.
다시 명동 거리를 걸었다. 그 길에 과거 건축 양식의 건물이 보였다. 명동예술 극장이었다. 이 극장은 일제강점기 건립되어 일본 연극을 공연하다 1930년부터 영화를 상영했다고 전해진다. 해방 후 1946년 국제극장으로 개칭되었고 1947년 시공관으로 개칭되어 연극 공연이나 집회 장소로 쓰였다. 6.25 한국 전쟁 후 개보수 작업을 거쳐 1957년 명동예술회관으로 이름을 변경되고 국립극장이 됐다. 1960년대 명동국립극장으로 개칭되어 1973년까지 연극과 오페라, 무용 등 다양한 공연이 열리는 공연의 메카로 자리했다. 그 시절 공연 예술인들에게 명동국립극장은 꼭 서보고 싶은 무대였다. 많은 이들의 꿈과 희망이 담긴 장소였다.
이후 명동예술극장은 남산에 큰 규모의 국립극장이 들어서면서 국립극장의 기능을 잃었고 영화관 등으로 사용되다 폐쇄되는 일도 있었고 금융 업체에 매각되어 내부가 개보수되어 사무실로 사용됐다. 1990년대 들어 철거되어 원형이 사라질 위기도 있었지만, 지역 상인들을 중심으로 한 복원 운동이 일어났고 2002년 8월 문화관광부가 건물을 명동국립극장으로 다시 개수하기로 결정하고 2004년 정부에서 건물을 매입해 2009년 지금의 명동예술극장으로 재개관되어 연극 전문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시대의 흐름과 개발의 광풍이 지배하는 서울 도심에서 문화 예술의 역사는 지켜졌고 그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키려는 노력과 그 가치를 인정한 정부의 결단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더 많은 임대수익과 더 많은 가치 창출의 논리에 이 건물이 사라졌다면 과거 청년 예술가들의 꿈과 희망도 함께 사라질 수 있었다. 명동 상권에 당당히 자리한 명동예술극장이 그래서 더 아름답고 멋지게 보였다.
명동의 상가 거리를 다시 걸었다. 명동의 거리는 썰렁함이 느껴졌다. 명동 상권의 중요한 고객이었던 외국인들이 사라지고 여러 곳에 상권이 등장하면서 명동 상권은 점점 쇠퇴기를 맞이하고 있다. 실제 상가 곳곳에 공실과 임대 안내가 붙어있는 모습은 지금의 명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한편에서 새로운 꿈을 펼치기 위해 노력하는 청년들이 있었다. 상가 한편에 개업한지 몇 개월 안된 식당이 발걸음을 이끌었다.
이 식당은 청년 사장님은 과거 성악가를 꿈꾸다. 우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우동을 배우기 위해 성악가의 꿈을 접고 일본 유학을 결정했다. 분명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그는 그 꿈을 위해 온 힘을 다했고 명동 상권에 우동 전문 식당을 열게 됐다. 그 어느 곳보다 경쟁이 치열한 명동, 과거와 달리 상권의 명성이 점점 쇠퇴하는 시점에 이곳에 식당을 여는 건 큰 모험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장님은 위기가 기회라는 신념과 함께 명동의 저력을 믿고 이곳에 들어왔다. 그의 열정과 노력이 결실을 맺기를 기원하며 다시 길을 나섰다.
명동의 상징인 명동성당을 찾았다. 명동 성당은 과거 우리나라 천주교 최초 순교자인 김범우의 집이 있던 자리에 새워진 성당으로 우리나라 천주교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명동성당은 종교적 의미와 함께 민주화 운동의 성지이기도 했다.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인사들에게는 그들을 탄압하는 군사정권의 압제를 피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이곳이었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명동 성당은 그들을 보호하며 군사정권에 맞섰다. 이후에도 사회적 약자들의 그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 명동 성당의 역사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명동 성당 주변을 걸었다. 명동성당 야외 광장에서 급식소가 보였다. 주변의 노숙자나 생활 형편이 어려운 노인들에게 무료 식사를 제공하고 있었다. 코로나 사태 이후 무료급식소 운영에 운영에 어려움이 커진 상황이지만, 명동성당의 무료 급식소는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며 나눔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 훈훈한 장면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길을 걷다가 작은 시계방이 보였다. 좁은 공간이었지만, 그 역사가 50년이 넘는 시계방이었다. 시계방 사장님은 50년 세월 늘 같은 시간에 시계방을 열고 닫는 일상을 지속하고 있었다. 사장님은 이곳에서 명동의 변화를 몸소 느끼며 살았다. 사장님의 시계방은 언론에도 소개될 정도로 명동의 명소가 됐다. 하지만 그의 일상은 변함이 없다. 이제는 일이 힘든 나이지만, 그를 찾는 단골들을 위해 일을 멈출 수 없다고 했다.
그에게 매일 시계방을 여는 건 손님들과의 약속이라 했다. 단골들은 그에게 오랜 세월 추억의 담긴 시계를 맡기도 있었다. 사장님은 언제 올지 모르는 손님들의 시계 수리를 위해 구하기 힘든 부품들을 준비하고 보관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수십 년 세월 동안 그의 생각과 일상을 기록한 글들이 눈길을 끌었다. 그 글들은 그와 명동의 역사를 기록한 기록물로 보였다. 그가 일하는 자리는 한평 남짓한 공간이었지만, 그곳에는 50년의 수많은 이들의 기억과 추억, 역사가 담긴 곳이었다. 작지만 가늠하기 힘든 이야기들이 함께 하는 우주와 같은 곳이었다.
여정의 마지막 좁은 길을 따라 식당들이 들어서 있는 노포 골목을 찾았다. 그 길의 끝에서 한 식당을 만났다. 30년 된 그 식당의 중요한 메뉴는 한치 불고기였다. 싱싱한 한치와 돼지고기가 조합된 그 메뉴는 어머니의 손맛과 함께 그 손맛을 이어가려는 아들이 손맛이 더해져 있었다. 어머니는 식당을 하면서 늘 바쁘고 고단한 삶을 살았다. 장성한 아들은 그런 어머니의 고단한 일상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자 식당 일을 함께 해다. 이제는 든든한 조력자이자 후계자가 됐다. 명동의 역사와 함께 한 노포는 그렇게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명동에는 화려하게 보이는 외관 속에 수십 년 세월을 이어온 우리 이웃들의 삶이 함께 하고 있었다. 명동의 지금 명성도 이런 보이지 않은 곳에서 일하는 이들의 노력이 있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지금 명동은 코로나 사태 등 외적 요인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한결같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이 있어 또 다른 희망을 기대할 수 있다. 명동의 이웃들이 웃을 수 있는 날이 다시 찾아오길 기원해 본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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