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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삶에서 커피는 이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음료가 됐다. 아침에 한 잔, 점심에 한 잔 커피를 마시는 직장인의 모습은 보편적 일상의 한 단면이 됐다. 그만큼 커피는 대중적인 음료가 됐고 즐기는 방법도 다양하다. 수요가 많은 만큼 커피를 판매하는 카페나 전문점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있을 정도다.

커피의 대중화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우리나라는 조선 후기 커피가 전래되어 커피 문화의 시작이 늦었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커피 소비국으로 자리했다. 커피 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렇게 커피는 마력의 음료로 전 세계인들을 사로잡고 있다. 커피 안에 들어간 중요한 성분인 카페인은 각성 효과가 뛰어나고 이는 피로를 잊게 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또한, 커피 특유의 향과 맛은 자꾸만 사람들이 커피를 찾게 한다. 커피 중독과 남용에 대한 우려도 있지만, 커피의 수요는 여전히 줄지 않고 있다. 그만큼 커피는 매력적이다. 

이 커피 역사의 시작은 서기 1000년 경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추정된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와 인접한 중동 지역에서 커피를 먹고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는 지금처럼 가루를 걸러내 음료로 마시기보다는 식재로나 약재 등으로 사용했었다. 커피에 들어간 카페인 성분이 각성 효과가 뛰어났고 이를 기능적으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커피콩이라 불리는 커피의 열매를 볶는 과정, 로스팅을 거쳐 물에 우려내 마시는 음료로 발전했다. 커피는 커피나무의 열매 속 씨앗을 말린 생두, 생두를 로스팅 한 원두 그 원두를 갈아 만든 가루에서 추출한 음료를 통칭하고 있다. 참고로 커피의 중요한 성분인 카페인은 커피에 있는 성분으로 정의된다. 

 

 

 



이런 커피의 대중화와 전 세계적인 보급의 배경에는 중동과 지중해 연안, 아프리카와 유럽까지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가졌던 거대 제국 오스만의 세력 확장이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1453년 천년 제국 로마의 마지막 보루라 할 수 있는 동로마 제국, 비잔티움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해 유럽을 경악에 빠뜨렸다. 콘스탄티노플은 기독교 문명의 최 전선에 자리한 거점으로 그 역사적 의미가 컸다. 이슬람 세력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역사적으로 큰 사건이었다. 이는 중세 십자군 전쟁 이후 끊임없이 충돌해온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의 대결에서 그 추가 크게 기우는 사건이기도 했다. 

콘스탄티노플은 경제적을 동. 서 교역에 있어 중요한 요충지였다. 콘스탄티노플은 동. 서양을 잇는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교역의 중심지로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고 있었다. 13세기 후반 지금의 튀리키예 한 편에서 건국한 오스만 제국은 이후 빠르게 그 세력을 확대했고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갔다.

고대 로마시대 이후 서양 문명이 주도권을 잡고 있던 튀르키예, 그리스 발칸반도 지역이 점점 이슬람 영역으로 포함됐다.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국가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콘스탄티노플 점령을 시도했다. 견고한 요새이기도 했던 콘스탄티노플은 강력히 저항했지만, 산으로 한섬을 하루 만에 이동시키고 최첨단 무기와 정예 병사를 모두 동원한 오스만제국의 기세를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콘스탄트노플 점령을 이끈 오스만제국의 황제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로 오스만제국의 수도를 옮기도 이스탄불로 그 이름을 바꿨다. 이스탄불은 동. 서양 문물이 공존하는 국제적인 대도시로 영광의 시간을 지속했다. 지금도 이스탄불은 세계적인 대도시로 자리하고 있고 강을 사이에 두고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를 이루는 독특함을 함께 유지하고 있다. 

 

 

 



오스만 제국은 이후 그 세력을 유럽으로 넓혀나갔다. 그 과정에서 유럽 왕국들과의 전쟁이 불가피했다. 1526년 오스만제국은 유럽의 강국 헝가리 왕국과의 전쟁에 승리하며 그 세력은 발칸반도를 넘어 동유럽으로 더 확대했다. 오스만 제국은 오스트리아 빈 공략에 실패하며 유럽 더 깊숙이 세력을 확장하지 못했지만, 광대한 영토를 장악한 대제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런 오스만제국의 세력 확장은 그들의 문화와 각종 기술의 전파도 촉진했다. 그 한편에서 커피의 유럽 전파도 있었다. 오스만제국은 세력 확장 과정에서 중요한 커피 산지인 에티오피아와 예멘 관련한 중요 항구인 모카를 장악했다. 이 지역은 커피 재배에 있어 최적의 기후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역의 커피나무는 아라비카로 불렸고 지금도 높은 점유율을 가진 커피 품종이기도 하다. 

이슬람에 전파된 커피는 초기에는 신비주의 종파 사제들이 애용했다. 카페인의 각성 작용과 식욕 억제 효과가 사제들에게 유용했다. 이 커피는 이후 대중들에게 전파됐고 모든 이들이 즐기는 기호식품으로 발전했다. 이슬람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메카에는 대중들이 함께 커피를 즐길 수 있는 카페가 세워졌고 성업했다. 카페는 음주를 극도로 금지하는 이슬람문화에서 이를 대신할 수 있었고 카페는 중요한 사교, 소통의 장소가 됐다. 

이슬람에서 대중화된 커피는 이후 오스만제국 전체로 전파됐다. 그에 따라 커피문화와 재배기술도 발전했다. 커피의 가치를 알아본 오스만제국은 황제가 직접 커피 농사를 장려하고 산업으로 발전시켰다. 카페라는 말의 원형이 되는 카흐베가 오스만 제국 곳곳에 세워졌고 사람들로 북적였다.

커피는 오스만제국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과정에서 지금도 튀르키예의 전통 커피 제조 방식인 오스만 커피의 원형이 만들어졌다. 오스만 전통 커피는 커피가루를 채로 거르지 않고 끓는 물과 함께 마시고 가열 방식도 뜨거운 모래를 이용했다. 그 전통 방식은 지금도 터키에서 통용되고 있다. 이와 함께 오스만의 커피 문화는 한층 화려해진 카페 문화의 발전과 함께 오스만제국 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했다. 

 

 

오스만 제국 영역

 



오스만의 커피 문화는 지속적인 교역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유럽으로 전파됐다. 특히, 바다를 사이에 두고  오스만 제국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가 유럽 커피 역사의 문을 열었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오스만과의 교역 과정에서 커피를 알게 됐고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오스만 전통 커피가 베네치아에 소개됐고 금세 대중화됐다. 커피 수요는 급격히 증가했다. 예멘의 모카항은 오스만과 유럽의 중요한 커피 무역항으로 발전했다. 

이에 오스만제국은 커피산업의 보호를 위한 조치를 했다. 타지역에서의 커피 재배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커피 열매를 열처리해 싹을 틔울 수 없도록 해 판매했다. 커피의 맛을 좌우하는 중요한 과정인 로스팅 기술의 발전하는 계기였다. 일설에는 기독교 문화권이었던 커피의 원산지 에티오피아에서 커피를 접한 기독교 사제들이 커피 열매를 악마의 열매로 인지하고 불에 태워버리려 했지만, 오히려 깊은 향과 맛이 나면서 커피를 볶아서 먹게 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유래가 어찌 되었던 커피는 그만큼 대중적인 음료가 됐고 더 많았고 풍미 있는 커피를 마시기 위한 연구와 노력이 지속되었다는 건 분명하다. 그 과정에서 커피의 맛을 깊게 하는 방식이 등장하고 다시 대중화됐다 할 수 있다. 

유럽에 전해진 커피는 빠르게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커피는 이후 대중들이 즐겨 마시는 커피로 발전했다. 커피 수요도 급격히 늘었다. 오스만 제국은 커피 무역으로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런 커피의 빠른 전파에 따른 에피소드고 있었다.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커피는 이교도인 이슬람에서 전파된 음료라는 점에서 부정적 인식이 많았다. 이에 한편에서는 커피를 악마의 음료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에 교황이 나서 그 여부를 판단했는데 교황마저 그 맛에 반해 커피에 세례를 내리고 커피를 공인했다는 야사가 있다. 그만큼 커피는 유럽인들의 기호에도 맞는 마력의 음료였다. 커피는 의도했건 안 했건 동. 서양, 기독교와 이슬람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됐다. 한편으로서는 동. 서양의 관계에서 오스만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했다. 

이런 커피 역사의 주도권이 서양으로 넘어가는 사건이 1683년 발생했다. 16세기 17세기를 거쳐 전성기를 구가하던 오스만제국은 이후 점점 쇠퇴했다. 절대 권력자 술탄의 지위가 약해지고 권력층의 분열이 발생했다. 오스만제국은 내부의 문제의 해법을 외부에서 찾았다. 

 

 

 



오스만제국은 16세기 실패한 오스트리아 빈 공략에 다시 나섰다. 1638년 7월 오스만제국의 군대는 빈을 포위했다. 전쟁 상황은 오스만 제국에 유리했다. 오스만제국은 공성전에 나서지 않고 포위전을 지속하며 빈이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렸지만, 이는 유럽이 힘을 합치고 전열의 정비할 시간을 주고 말았다. 하나로 뭉친 유럽의 군대는 반격에 나섰고 오스만제국은 그 기세에 밀려 2차 빈 전투도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오스만제국의 유럽에서의 세력 확대는 더는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세력이 점점 위축되고 말았다.

오스만 제국의 쇠퇴는 커피 문화에 있어 유럽이 이를 주도하도록 했다. 2차 빈 전투의 결과는 지역의 세력 판도 변화와 함께 오스트리아 빈의 독특한 커피 문화 발전을 촉진했다. 오늘날 통용되는 커피 형태인 가루를 걸러내 크림을 커피 위에 얹고 설탕을 곁들인 비엔나커피가 등장했다. 여기에 보편적으로 먹는 크루아상 빵도 이 전쟁을 기점으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커피의 주도권을 가져온 유럽은 커피를 수입하는 것에서 벗어나 커피를 에티오피아와 유사한 기후 지역에 있는 식민지에서 재배하며 자체 생산에 들어갔다. 네덜란드는 그들의 식민지 인도네시아 커피를 재배하기 시작했고 이는 자바커피의 원조가 됐다. 이후 커피는 베트남과 브라질 등 적도를 중심으로 한 커피 벨트가 형성되고 형성되어 많은 곳에서 커피가 재배되고 이는 커피 대중화를 촉진했다. 

이와 함께 유럽을 중심으로 한 커피 문화가 세계 커피 문화를 주도하고 있다. 미국으로 넘어간 커피는 아메리카노로 대표되는 미국의 커피 문화를 만들어냈다. 그사이 오스만 제국과 커피의 상관관계는 희미해지고 말았다. 커피는 동. 서양의 힘의 관계를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커피는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들 속에서 그 문화가 발전했다. 오스만이 발전시킨 커피 문화는 유럽에서 또 다른 형태로 발전했고 사실상의 국제 표준이 됐다. 힘의 상관관계에 따라 그 문화도 좌우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요한 건 커피는 그 형태와 상관없이 전 세계인이 가장 많은 즐기고 마시는 음료고 가장 대중적인 음료라는 점이다.

커피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 것보다는 그 안에 담긴 역사의 흐름을 함께 음미한다면 더 깊은 커피 맛을 깊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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