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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를 앞두고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가 찾는 곳은 인천항의 역사를 간직한 북성동과 신포동이었다. 이곳은 인천항이 개항하고 최초의 근대 철도인 경인선이 생긴 이후 여러 역사의 흥망성쇠를 함께했다. 쇄국정책을 보리고 개항을 선택한 조선이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전초 기지가 인천항이었고 최초 근대식 시설이 차례로 들어서기도 했다. 

하지만 인천항은 서구 열강과 일제 침략의 역사를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던 아픔도 지니고 있다. 6.25 한국전쟁 당시에는 북한군의 남침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이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킨 인천 상륙 작전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후 인천항은 수출 주도의 경제 정책에 밀려 부산항에 비해 발전이 더뎌지기도 했지만, 최근 중국과의 무역이 늘어나고 인천공항과의 연계를 통해  새로운 무역항으로 발전을 모색하고 있기도 하다. 

인천항은 우리 근대사의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집약된 곳이라 할 수 있다. 프로그램에서는 북성동, 신포동의 곳곳을 다니면서 시간의 흐름이 점점 더 빨리지는 현실에도 과거의 전통을 놓지 않고 있는 이들과 고단한 현실 속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중국풍의 느낌이 가득한 차이나타운에서의 여정이었다. 인천항 주변의 차이나타운은 과거 청나라의 조계지, 즉, 치외법권 지역이 생기면서 중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군락을 이룬 것이 그 기원이 됐다. 1980년대 화교들에 대한 재산권을 제한하는 등의 조치가 내려지면서 쇠퇴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양한 중화요리 전문점이 밀집한 지역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거듭났다. 

인천의 차이나타운에서는 중국 전통 방식의 음식점이 눈길을 끌었는데 지금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화덕 만두집과 중국 전통의 구슬 신발을 만드는 양화점에서 전통을 지키고 이어가려는 이들의 끈기와 의지를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자동화된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수작업으로 일을 해나가고 있었다. 화덕 만두집과 양화점의 주인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힘든 현실에서도 중국의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고 있었다. 문화의 다양성이 이제는 소중한 자산이 되는 현실에서 가치 있는 곳이었다. 

중국 전통문화의 향기를 뒤로하고 여정은 인천항을 찾는 선원들의 쉼터였던 오래된 여관과 그 여관을 개조해 운영 중인 카페로 향했다. 이곳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고 그 독특함은 젊은 손님들의 발걸음을 이끌고 있었다. 낡은 LP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팝 음악의 선율은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마음을 이동시켰다. 

카페의 올드팝 선율에 발을 맞추며 향한 또 다른 장소는 쫄면으로 이름난 한 분식집이었다. 그곳에서 중년의 손님들은 과거 학창시절을 추억했고 젊은 손님들은 쫄면의 독특한 식감을 즐기고 있었다. 분식집에서 우연히 소개받은 쫄면 공장에서는 쫄면이 냉면을 만들다 실수로 만들어졌다는 유래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만약, 그 실수가 없었다면 지금의 쫄면을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는 점에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옛 격언이 딱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인천항 부두로 나선 여정은 그 한편을 지키고 있는 거대한 곡물 저장창고를 보여주었다. 수입 곡물이 저장되는 그 창고는 그 높이가 22층 아파트 높이와 필적할 정도였다. 그 창고가 더 눈길을 끈 건 창고 전체를 수놓은 그림이었다. 동화의 장면들을 각 기둥마다 그려 넣은 그림은 하나의 스토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그림은 기네스북에 등재될 정도로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삭막할 수 있는 항구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명소이기도 했다. 

인천항 부두를 떠나 발걸음은 갯벌 포구인 북성포구로 이어졌다. 북성포구는 밀물과 썰물에 따라 배가 운행할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곳으로 주변의 공장과 어우러져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과거 북한에서 월남한 이들이 정착하면서 어촌이 형성되었고 지금도 북성포구를 터전 삼아 삶을 꾸려가는 이들이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 작은 배에 의지해 물고기를 잡고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하는 선장과 만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바다에서의 힘든 삶을 물려주지 않으려 했지만, 아버지 사후 그 삶을 이어받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배를 타는 일이 맞지 않아 항상 배멀미에 시달리는 선장은 조업을 하는 일이 여전히 고통스럽다.  하지만 가장의 책임과 의무는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매일매일 새벽 바다로 그를 향하게 하고 있었다. 그런 아들을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어머니는 항상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이런 어머니의 진심이 그를 지켜주었는지 그는 바다를 터전으로 힘차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인천항을 따라 자리한 북성동과 신포동은 과거의 역사를 간직한 채 사람들의 삶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삶 속에서 희망을 찾는 이들이 노력과 의지들이 모여 인천항은 그 역사를 계속 이어올 수 있었다. 북성동과 신포동을 가로지른 여정에서 인천항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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