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발발한 6.25 한국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미군이 해외 파병된 전쟁이었다. 우리나라도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전투병을 파병했다. 미국은 인도차이나반도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전쟁에 나섰고 1964년부터 1973까지 10여 년 동안 베트남전을 지속했다. 이 기간 베트남과 인근 국가에는 제2차 세계대전 보다 많은 폭탄이 쏟아졌고 당시 최고의 첨단 무기가 사용됐다. 막대한 인명, 재산 피해가 있었다.
이런 엄청난 희생에도 미국은 원하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사실상 패전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베트남의 공산화됐고 인근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그 길을 걸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 현대사의 큰 오점이었다. 베트남 전쟁을 두고 가장 그림자가 긴 전쟁이라는 말을 평가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베트남전쟁은 최근 아프가니스탄 사태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9.11테러를 일으킨 테러조직 알카에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아프가니스탄 집권 세력인 탈레반을 공격하면서 전쟁을 시작했고 2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에 미군을 주둔시켰다. 긴 전쟁이었지만, 미국은 탈레반 세력 소탕에도 실패했고 막대한 전비와 인명피해 속에 고전했다. 아프가니스탄은 구 소련에 이어 미국까지 강대국의 무덤이라는 악명을 그대로 재현했다.
미국은 탈레반과 협상을 모색했고 평화협정 타결과 함께 미군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철군은 매우 신속하고 전격적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은 큰 충격과 혼란에 빠져들었다. 탈레반은 다시 아프가니스탄의 권력을 장악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이 탈레반을 억제할 수 있다고 공언했지만,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은 무기력했다. 미군 철수 직후 아프가니스탄 수도는 탈레반에 점령당했다.
미군은 많은 무기와 기지를 버려둔 채 아프가니스탄을 떠났다. 미국에 협조하던 서구적인 문화와 사회시스템에 동화됐던 많은 아프가니스탄인들은 철수하는 미국과 연합군을 따라 함께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하려 했고 공항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하지만 모두가 함께 떠날 수는 없었다.
이제 과거 극단적 이슬람 세력으로 악명을 떨쳤던 탈레반의 체제의 부활과 함께 많은 아프가니스탄인들은 공포 속에 살아가고 있다. 상황에 다소 차이는 있지만, 미군이 철수한 이후 패망한 남베트남, 월남의 상황과 너무 닮아 있다. 그때의 실패를 미국은 다시 재현했다.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말하면서 베트남 전쟁을 다시 소환하는 이유다. 역사 예능 프로그램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그 베트남전의 과정과 결과를 살폈다.
베트남전은 베트남 식민 지배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었다. 베트남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 과정에서 제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지금도 베트남 몇몇 도시에는 당시 식민 지배의 흔적들을 간직한 건축물들이 남아있다.
프랑스의 식민 지배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동남아시아 지역을 침공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일본에 밀려나면서 큰 틀이 흔들렸다. 베트남은 독립 지도자 호찌민을 중심으로 독립을 추진했다. 제국주의 일본이 베트남을 침략했다. 일제는 베트남을 강제로 지배하면서 식량 자원인 쌀을 포함한 물적 수탈을 자행했다. 베트남은 일제의 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였다.
베트남은 프랑스에 이어 또 다른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 저항해야 했다. 그런 식민 지배 저항의 역사 끝에 베트남은 독립을 할 기회를 잡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면서 베트남은 외세 세력들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듯 보였다. 베트남 독립운동 세력은 베트남독립연맹 줄여서 월맹이라 불리는 조직을 결성하고 독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이런 베트남에 프랑스가 다시 침략했다. 프랑스는 베트남에 대한 식민 지배의 기득권을 다시 찾으려 했다. 베트남은 독립을 위한 전쟁에 다시 돌입했다. 프랑스는 화력의 우위에도 베트남에 밀렸고 1954년 베트남은 프랑스군에 승리했다. 제국주의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상징적인 베트남 독립전쟁이었다.
이제는 그들의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지만, 이번에는 미국이 개입했다. 미국은 북위 17도 선을 중심으로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할하고 남부 베트남을 그들 영역으로 삼았다. 공산주의 세력이 장악한 북부 베트남은 독립영웅이자 국부로 불리는 호찌민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부가 수립됐다. 이런 상황은 우리나라 해방 직후 미국과 소련이 아무 근거 없이 임의적으로 설정한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남북을 분할 점령한 상황과 매우 유사했다.
미국은 1954년 강대국들의 협의 결과인 제네바 협정을 근거로 베트남을 남북 분할 통치하고 2년 후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토록 한다는 로드맵을 제시했다. 과거 우리나라의 해방 직후 신탁통치 후 총선거 실시를 계획했던 모습과 너무 닮아있다. 베트남의 혼란을 막고 민주 정부 수립을 지원하겠다는 이유였지만, 실상은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은 베트남 전체 국민의 지지를 받는 인물로 당장 선거를 한다면 압도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정상적인 선거라면 공산주의 베트남 정부가 수립될 가능성이 매우 컸다. 미국인 베트남의 공산화가 도미노 현장을 일으켜 인근 국가의 공산화를 촉진할 수 있음을 우려했다. 결국,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각각 별도의 정부가 수립됐다.
당시는 강력한 냉전 체제로 민주주의 진영이나 공산주의 진영 모두 상대 세력의 확대를 극도로 경계하는 상황이었다. 6.25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냉전의 최전선에 있었던 한반도가 전쟁터가 된 사건이었다. 베트남 역시 그들의 원치 않았지만,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하게 됐다.
미국은 공산주의 북베트남에 대응하기 위해 남베트남에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와 함께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응오딘지엠을 지원해 친미정권을 수립하도록 했다. 응오딘지엠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에 친미주의자였다. 미국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인물이었지만, 국민적 지지를 받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민주공화정의 수립을 이끌었지만, 실상은 조직적인 부정선거에 의한 권력 독점이었다. 응모딘지엠은 그의 동생, 그리고 그의 가족들이 남베트남의 권력을 장악하며 국정을 주도했다. 그들의 강력한 반공정책은 남베트남 내 공산주의자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숙청으로 이어졌고 무고한 이들도 다수 이에 포함됐다. 권력강화를 위한 공포정치로 변질됐다. 남베트남 내 반정부 세력이 커지는 원인을 제공했다. 반공정책은 남베트남으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권력이 소수에 독점되면서 독재화됐다는 점이 문제였다. 응모딘지엠 정권은 권력을 사유화하고 이권을 독점했다. 반대 세력에 대해서는 탄압으로 일관했다.
정권의 부정부패에 대한 자정노력도 부족했다. 권력은 물론이고 경제적 이권도 소수 권력자들이 독점하면서 국민들의 큰 반발을 불러왔다. 이는 당장 눈앞에 북베트남이라는 강력한 적을 두고 이에 맞설 수 있는 국민적 통합과 역량을 구축하는데 큰 장애물이 됐다.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리더십도 보이지 않았다. 이는 반정부 세력의 확산을 불러왔다. 특히, 공산주의 무장 조직인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일명 베트콩이 반정부 세력을 주도했다. 베트콩의 존재는 남베트남 정부에 큰 위협이었다.
각종 실정에 더해 응오딘지엠은 종교적인 편향성으로 민심을 잃었다. 가톨릭 신자인 그는 베트남 국민들 대부분이 믿는 불교에 억압하고 탄압을 가했다. 사찰이 파괴되고 다수 승려들이 숙청의 칼날을 맞았다. 이는 돌아선 민심을 더 분노하게 했다.
1963년 독재 정권의 실정과 종교탄압에 항의하는 베트남의 고승 틱광신의 분신과 소신공양 사건은 성난 민심에 불을 붙였다. 이를 두고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응오딘지엠의 제수 쩐레쑤언의 망언은 한 마디로 가관이었다. 그는 소신공양을 바비큐로 비유하며 국.내외적인 공분을 불러왔다. 남베트남 전역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고 응오딘지엠 정부는 점점 궁지에 몰렸다. 심지어 그들을 강력한 지원하던 미국마저 등을 돌리는 상황이 됐다.
이 틈을 타 1963년 11월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응오딘지엠과 그 동생은 군부에 체포되어 총살됐다. 독재자의 비참한 최후였다. 이후 남베트남은 지속적으로 쿠데타가 발생하는 등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한 상황이 지속됐다. 이런 상황을 통제하고 해결할 지도자의 리더십이 없었다. 남베트남 지역에 공산주의 세력이 점점 더 힘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 그 시점에 미국의 대통령 케네디가 암살되면서 미국도 남베트남 문제에 당장 개입할 수 없었다. 남베트남의 극심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미국 내에서는 군사적 개입의 필요성에 대한 의견이 커졌다.
이후 미국은 케네디에 이어 존슨 대통령이 취임했다. 그는 남베트남의 공산화 우려에도 군사적 개입에는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취임 후 얼마 안 된 시점에 전쟁을 하는 건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북베트남을 지원하는 소련과 중국이 있어 베트남에 대한 군사작전은 세계대전의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공산주의 세력 확대를 저지해야 한다는 명분론이 점점 힘을 얻었다.
이 시점에 큰 사건이 발생했다. 1964년 8월 남. 북베트남 국경에 인접한 통킹만 해역에서 미 군함이 북베트남군의 공격을 받는 사건이 있었다. 미군이 북베트남의 직접 공격을 받은 건 처음이었고 그 공격은 2차례 이어졌다. 이는 미국 내 강경파에 힘을 실어주는 사건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무력 사용을 승인했고 미군이 남베트남에 파병되는 계기가 됐다. 베트남전쟁의 시작이었다.
문제는 이 통킹만 사건이 알려진 사실과 다른 진실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 사건은 훗날 언론 보도 등을 통해 미국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 정부는 이에 대한 명확인 입장을 밝히지 않았지만, 미국 내에서도 통킹만 사건은 조작된 것임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조작이 아니라 해도 미국 정부는 왜곡된 정보나 극히 지엽적인 정보에 의존해 무력 사용을 결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전쟁에서 미국인 단기간의 승리를 자신했다. 당장은 남베트남 지역내 공산주의 세력인 베트콩에 섬멸이 주 목적이었고 미국은 그들의 세력을 크게 위협적으로 보지 않았다. 북베트남군에 대해서도 과소평가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미국인 베트남 현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상대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다. 무엇보다 북위 17도선 아래로 전장을 한정하면서 군사작전 수행에 제약이 발생했다. 미군은 소련과 중국의 개입을 우려했지만, 이는 북베트남군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할 수 없게 했다. 전쟁은 미국이 방어적인 입장에 서야 했다.
북베트남군과 그들이 지원하는 베트콩 세력은 게릴라전으로 미군에 맞섰다. 울창한 정글을 배경으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강하게 저항했다. 미군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정글이라는 전장에서 싸움을 해야 했다. 이에 미국은 전쟁사에 처음으로 헬리콥터를 운송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고 공격형 헬리콥터를 전장에 투입했다. 여기에 막강한 공군력을 바탕으로 제공권을 장악하고 전력 폭격기 등을 활용해 대규모 공습전을 펼치며 맞섰다. 하지만 전쟁은 애초 미국의 예상과 달리 장기전으로 흘러갔다.
양측의 정규군이 처음 격돌한 1965년 이아드랑 전투에서 미국은 북베트남의 전력을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월남 지역에 침투한 대규모 북베트남 정규군을 상대로 미군은 고전했다.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가까스로 전투에 승리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피아 구분을 하지 않는 무차별 공습을 의미하는 브로큰애로우 작전을 실행하기도 했다. 피해 규모는 북베트남군이 월등했지만, 미군의 피해도 컸다. 북베트남군은 미국이 생각한 것으로 이상으로 강했다. 이에 미국은 파병군 규모를 크게 늘렸다. 우리나라의 전투병 참전도 함께 이루어졌다. 북베트남군 역시 미군의 강력한 화력을 제대로 경험했다. 이에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전면전을 피하고 정글을 활용한 게릴라 전을 더 강화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게릴라전은 매우 효과적이었고 미군을 괴롭혔다. 정글 자체가 거대한 방어막이었다. 미군은 정글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전과 다른 전술과 전략이 필요 해지만,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아주 익숙했다. 그들은 정글 곳곳에 함정과 부비트랩을 만들었고 많은 미군들이 이에 희생됐다.
베트콩들은 평소에는 농민이자 지역 주민으로 위장하다 전투병으로 돌변했다. 베트콩은 구찌터널이라 불리는 지하 요새를 구축해 미군의 대규모 공습을 피하고 생활공간으로 삼았다. 구찌터널은 모두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졌고 그 길이가 250킬로에 이르는 것도 있었다. 여기에 북베트남은 정글 지형과 인근 라오스, 캄보디아를 거치는 호찌민 로라 불리는 비밀 보급로를 만들어 남베트남 지역의 베트콩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들은 점점 정글전에 대한 공포심이 커졌다.
심지어 미군들 사이에서는 죽음을 상징하는 스페이드 에이스 트럼프 카드를 지니고 다니다 섬멸한 베트콩의 입에 물리적 주술적 행위가 유행하기도 했다. 그만큼 미군에서 정글전은 힘겨웠고 베트콩은 신출귀몰한 존재였다. 미국은 역사상 최대 폭탄을 쏟아붓는 폭격으로 맞섰다. 폭격은 베트남은 물론이고 적의 보급로가 지나는 캄보디아, 라오스 등에서 큰 피해를 발생하게 했다. 그때의 수많은 폭탄들을 지금도 모두 제거되지 못할 정도다. 하지만 미국의 물량 공세에도 적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이에 미국은 전쟁의 큰 장애물인 정글을 없애기 위해 고농도 고엽제를 살포하는 극약 처방을 하기도 했다.
고엽제에는 맹독성 물질인 다이옥신이 다량 포함되어 일반에는 사용되지 않는 약품이었다. 이 고엽제는 정글을 황폐화시키는 한편 사람에게도 큰 피해를 불러왔다. 다수의 민간인들의 고엽제로 인해 질병에 시달렸고 유전병으로 이어졌다. 그 피해자 중에는 미군과 남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장기화된 전쟁에서 일대 전환점이 마련된 사건이 있었다. 1968년 1월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새해 명절을 맞이해 월남 일대의 주요 도시들을 직접 공격하는 대공세를 펼쳤다. 이로 인해 사이공을 포함한 도시들이 불타고 파괴됐다. 주로 정글지역에서 이루어지던 전투가 도시에서도 일어났다. 이는 남베트남 국민들을 크게 동요시키는 일이었다. 또한, 미국 대사관이 적에 습격당해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도시에서의 시가전은 고스란히 뉴스를 통해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생생하게 보도됐다. 이전까지 전쟁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상황을 몰랐던 미국 국민들은 전쟁의 참상을 직접 접할 수 있었다.
이 대공세는 미군의 반격으로 실패했지만, 미국은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해야 했다. 미국 내 반전 여론이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반전 시위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강하게 일어났고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이에 새롭게 집권한 미군 닉슨 대통령 정권은 단계적인 철군 계획을 발표하며 성난 여론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반전 여론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반전 시위대에 대한 발포사건까지 나오면서 여론은 급격히 악화됐다.
베트남에 파병된 미군 역시 반전 여론에 영향을 받았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미군들 상당수는 극심한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미군들의 일탈 행위가 늘어났다. 마약 복용자가 증가하고 상관에 대한 항명과 살해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미군들이 현지에서 반전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싸우기도 전에 이미 전의를 상실한 미군이었다. 닉슨 정부로서는 해법 마련이 필요했다.
미국은 더 이상 전쟁 수행이 어렵다는 판단을 했고 전쟁 종결을 위한 협상에 나섰다. 1973년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미국은 남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했다. 이렇게 정전이 이루어졌지만, 내전은 끝나지 않았다. 북베트남과 남베트남과의 전쟁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 정부군을 압도했다. 이미 내부의 부정부패로 남베트남 정부는 국민들의 신뢰를 잃어버렸고 압도적인 화력과 병력에도 남베트남군은 무기력했다.
결국, 1975년 북베트남군의 총공세로 월남,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베트남 전쟁은 막을 내렸다. 베트남의 공산화와 함께 다수의 남베트남 국민들은 국외 탈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많은 인원들이 탈출하기는 어려웠다.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다 목숨을 잃기도 했다. 상당수 남베트남인들은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떠도는 보트피플로 전락했다. 얼마 전 봤던 아프가니스탄인들의 탈출 행렬과 너무 닮은 모습이었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실패의 기억만을 남기게 됐다. 5만 명이 넘는 미군이 전사했고 막대한 전비가 소모됐다.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 상당수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등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렸고 그로 인한 범죄 등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됐다. 미국뿐만 아니라 베트남 역시 물적 인적으로 전쟁의 피해가 막심했다. 그 피해의 흔적인 아직도 남아있다. 베트남이 그들 나라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했다면 겪지 않았을 전쟁이었고 비극이었다. 지금도 베트남전은 미국과 베트남에게 아픈 상처로 남아있다. 이념과 강대국들의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냉전시대의 아픈 유산이 베트남전쟁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 비슷한 실패를 또 경험했다.
베트남전쟁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기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면 언제든 강대국들의 전장이 될 수 있다. 조선 말기에는 나라를 지키기 못하고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겪기도 했다. 조선은 외교로 일제의 침략에 맞서려 했지만, 힘없는 나라를 도와줄 나라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도 국제 관계에서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
특히,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있고 6.25 한국전쟁의 비극 이후 남북이 분단된 우리나라는 지금도 전쟁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 그런 어려움에도 우리나라는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됐고 10위 안에 들어가는 군사 강국으로 거듭났다. 전후 독립한 나라에서 보기 드문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
지금 우리의 번영과 발전한 민주주의를 지키고 계속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이 평화를 지키는 평화체제의 구축이 시급하다. 그 주체는 우리가 돼야 하고 누군가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외교는 철저히 국익과 실용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미 그럴만한 역량도 갖추고 있다. 우리는 부정부패로 스스로 무너진 베트남, 아프가니스탄과는 다르다.
과거 우리는 베트남전을 말할 때 우리 상황이 빗대어 막연한 공포심을 가지고 이를 대했다. 이제는 시대가 변했고 우리나라는 더 이상 후진 나라가 아니다. 베트남전은 냉엄한 국제질서의 속성과 그에 대처하는 방법 등을 살피는 냉정한 분석이 필요한 역사다. 분명한 건 전쟁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되고 전쟁은 모두의 파멸, 평범한 국민들의 씻을 수 없는 비극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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