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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해안과 접해 있는 원 삼국시대 마한에서 그 지역의 기원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긴 역사를 간직한 지역이다. 일설에는 보령이라는 이름이 자연재해가 적어 붙어졌다고도 한다. 그만큼 예로부터 살기 좋고 풍요로운 바다가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보령시는 긴 해안선이 있고 서해안에서는 보기 드물게 긴 모래사장이 있는 대천해수욕장이 있어 여름이면 많은 피서객들이 몰린다. 여기에 세계적으로 이름난 축제인 보령 머드축제가 매년 여름 열린다. 보령 머드축제는 지역의 대표적 축제로 보령을 상징하고 있고 보령을 대표적인 관광도시로 자리하도록 했다.

이 보령시는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78회에서 찾았다. 178회는 그동안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출연한 김영철 배우와 함께 하는 마지막 여행으로 그 의미가 남달랐다. 

보령의 항구 오천항 항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장소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 이곳의 바다 풍경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장소가 있었다. 조선 시대 그곳에 지어진 정사인 영보정이 있었다. 오천항 지역은 조선시대 왜적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한 군사 주둔지였다. 하지만 이곳은 영보정을 포함해 멋진 풍경으로 더 알려졌다. 조선의 임금이었던 광해군도 세자 시절 이곳에 오고 싶어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그만큼 영보정은 보령을 대표하는 장소였다. 

지역의 역사를 뒤로하고 비 내리는 선착장으로 향했다. 마침 바다에서 조업을 마치고 돌아온 어선이 보였다. 그 배에는 바다에서 채취한 키조개가 가득 있었다. 키조개는 깊이 40미터의 깊은 바다 개펄에서 자라난다. 키조개는 일반 조개와 달리 크고 풍부한 살이 있다. 이 키조개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잠수부가 직접 바다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엄청난 수고를 들여 키조개가 바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보령 바다의 키조개는 특히 더 유명해 지역의 명물로 자라하고 있다.

 

 

 



선착장을 벗어나 식당들이 모여있는 골목을 찾았다. 그곳에서 3대가 함께 한다는 간판을 내건 식당이 있었다. 실제 이 식당은 식당을 시작한 어머니와 그의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의 아들로 역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식당을 시작한 어머니는 몸이 아파 일을 하지 못하지만, 두 부자가 식당 일에 한창이었다.

이 식당의 주메뉴는 칼국수였다. 과거 할머니의 손맛을 이어가며 그 맛을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의 아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식당에서 일을 배웠고 수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아들은 30여 년이 흘러 가업이 된 식당에서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할머니의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고 가업의 계승자로 할머니의 손맛을 배워가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대학 진학을 하지 않고 식당 일을 하는데 걱정이 많았지만, 이제는 든든하기만 하다.

아들은 태어나서부터 난치병인 혈우병을 안고 있었다. 모든 게 조심스럽고 치료를 위해 노심초사했던 나날이었다. 아들은 그런 어려움에도 씩씩하게 자랐고 야구선수로의 꿈도 꿨다. 하지만 몸 상태를 고려해 그 꿈을 중도에 포기해야 했다. 대신 아들은 가업이 된 식당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만들어가고 있다. 그와 가족들에게 이 식당은 행복을 지켜가는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보령의 산 아랫마을을 찾았다. 작지만 눈에 띄는 간판이 입구에 있는 잘 정리된 공원이 있었다. 꽃들이 곳곳에 핀 산책로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그 끝에 자리한 예쁘게 꾸며진 카페가 있었다. 꽃들로 인테리어 된 카페는 사시사철 시들지 않게 생화를 보존 처리한 프리저브드 플라워를 활용해 카페를 꾸몄다. 이 카페는 인테리어와 함께 손님들에게 내놓은 디저트나 차에도 꽃으로 채워져 있었다.  꽃향기 가득한 특색 있는 카페였다.

이 카페의 사자 부부는 과거 찜질방으로 사용되다 방치된 건물을 직접 시공해 카페로 만들었다. 부부는 도시에서 의류 사업을 했다. 하지만 치열하고 하루하루 숨 막히는 삶에 지쳐 부부는 귀향을 결심했다. 잠시 삶의 휴식을 위해 보령으로 내려왔지만, 이곳의 자연과 꽃이 좋아 기간이 늘어났고 7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가족들 모두의 보금자리가 됐다. 부부는 꽃과 함께 하면서 건강도 회보하고 가족의 평화로운 일상도 되찾았다. 도시에서 느낄 수 없었던 삶의 여유 속에 부부는 자녀들과 함께 행복한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보령의 명소 대천해수욕장을 찾았다. 서해안 최대 백사장을 자랑하는 해수욕장을 걸었다. 그곳에서 궂은 날씨에도 바다를 즐기기 위해 이곳을 찾은 어린 학생들의 에너지를 함께 할 수 있었다. 또한, 보령의 대표적 축제인 머드 축제를 소개하는 머드 박물관에서 잠신 시간을 가졌다.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개최하기 못했던 머드축제는 올여름 다시 열린다고 했다. 그와 함께 해양 자원 등 바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머드 박람회도 함께 열린다고 했다.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한 머드축제로 이 지역이 사람들로 북적이는 모습을 상상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한적 마을, 거대한 석재 조형물이 늘어선 어느 작업장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석재 작업에 열중인 장인을 만났다. 그의 작업장에는 보령에서 많이 나는 검은빛의 오석이 눈에 띄었다. 오석은 진흙이 굳어 만들어진다고 했는데 돌에 글을 새기기에 아주 적당한 돌이라고 장인이 말했다.

장인은 어린 시절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그의 꿈은 가족들이 배를 골지 않는 것이었고 쌀을 얻을 수 있는 부잣집 머슴살이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우연히 석재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를 위해 어린 나이에 홀로 서울로 상경해 일을 배웠다.

그렇게 그는 15살 어린 나이에 돌밥을 먹으며 살았다. 그는 서울에서 홀러 지내면서 쌀밥을 혼자 먹는 게 미안할 정도로 시골에서 가난에 고생하는 가족 걱정이 가득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가족들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살았다. 그리고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세월 속에 장인은 여러 멋진 작품들을 남겼고 명성도 얻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자신의 기술이 뛰어나지 않다고 했다. 그에게 돌을 다듬고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일종의 수련일 뿐이었다. 노년의 나이가 된 석재 장인의 망치와 정소리가 여전히 힘찼다. 

보령의 천년 고찰 흔적이 남은 성주사지를 찾았다. 백제시대 지어진 사찰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소실되고 주춧돌과 흔적만 남았다. 그 사찰의 역사를 안고 서 있는 석탑과 석불만이 이 사찰이 어떤 곳인지를 알게 했다. 모진 시련 속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석탑과 석불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대천 해수욕장 인근, 보령의 시장을 찾았다. 시장의 풍경과 사람들을 따라가다가 시장 한편의 닭집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모자가 운영하는 40년 치킨 가게를 만났다. 그곳에는 추억의 시장 통닭에 매콤한 순대 복음이 함께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은 청년 시절 고시생으로 큰 꿈을 안고 서울의 고시촌에서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들은 귀향해 어머니의 가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포근히 안아주었다. 그렇게 흐른 15년의 세월, 모자는 환상의 콤비를 이루며 가게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아들은 어머니가 조금이나마 삶의 여유를 가지길 소망하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가게는 삶의 터전이었고 인생의 전부였다. 잠시라도 가게와 떨어져 있으면 불안한 나날이었다. 아들은 어머니가 일에만 묻혀 살지 않고 가게를 벗어나 더 넓은 세상과 함께 하길 원하고 있었다. 그런 아들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기원하며 다시 길을 나섰다.  

 

 

 



보령의 한 농촌 마을을 찾았다. 오래된 은행나무 군락지가 인상적이었다. 이 은행나무 군락지에는  한해 100톤 넘게 나는 은행나무 열매가 수확됐다. 과거 농번기 농가에 큰 수익원이었다.  그리고 그 은행나무 열매는 모아 까고 열매를 모았던 일은 동네 여성들의 몫이었다. 그때 그 여성들이 이제는 노년의 나이가 되어 은행나무 열매와 함께 하고 있었다. 과거와 같이 은행나무 열매가 아까워 발을 동동 구르던 시절은 지났지만, 그 어르신들에게 과거 은행나무 열매와의 추억은 생생했다. 

이제는 여유롭게 그때의 기억을 추억할 수 있게 된 요즘이다. 그 기억을 안고 자란 은행나무는 여름의 햇살을 가려주며 어르신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어르신들의 추억과 그 추억을 안고 자란 은행나무는 서로에게 소중한 친구로 보였다. 

이렇게 여름이 깊어가는 어느 날 보령에서의 여정이 마무리됐다. 늘 그렇듯 사람들은 삶의 굴곡을 극복하고 또 극복하며 그들의 일상의 지키고 행복으로 시간들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돈이 많든 적든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진정한 삶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시간이었다. 

여정이 끝난 후 그런 이들과의 만남을 가졌던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진행자 김영철 배우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는 짧고 담담하게 그동안의 소회를 전하고 작별을 말을 남겼다. 2018년 여름 시작한 여정을 이끌었던 이와의 이별은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김영철 배우 역시 애써 슬픔과 아쉬움을 감정을 숨기는 모습이었다. 그는 또 다른 곳에서 만남을 약속하며 또 다른 길을 떠났다.

이렇게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숨 가쁜 여정이 마무리됐다. 이제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는 김영철이라는 이름이 빠지고 동네 한 바퀴로 새롭게 여정을 시작할 예정이다. 하지만 김영철의 없는 동네 한 바퀴는 왠지 허전해 보인다. 그만큼 김영철 배우의 존재감은 매우 컸다. 당분간 그 허전함을 메우는데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김영철 배우를 그의 약속대로 다른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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